현실 세계의 복음
성육신의 사명으로 오신 그리스도
릭 맥 에드워드
주변을 보노라면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할 수 있는지 나는 종종 놀란다. 점점 더해 가는 세속주의, 정치적 선전, 상충하는 영성 때문에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잦아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의 희생과 메시지를 이해해야 할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를 더욱 닮아서 이웃에게 혹은 아직 예수를 아직 알지 못하고 다른 종교를 따르는 수십억 사람에게 그분을 나타낼 수 있을까?
예수님은 삶을 통해 아름다움과 단순함을 드러내셨다. 오늘날 우리의 선교를 이끄는 능력은 거기에 있다. 성육신 되신 예수님의 사역에서 얻는 교훈이야말로 분주하고 종종 산만해지는 제자들에게 해독제가 된다.
성육신과 사명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메시지에서 두 이름이 눈에 띈다. 먼저 ‘예수’가 그분의 이름이어야 한다(‘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임마누엘’이란 그분의 사명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마 1:23)라는 뜻이다.
성육신의 신비를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때는 기대감이 넘치는 시대였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당시의 유행이었다. 다니엘의 예언이 높이 평가되었다. 거기서 새로운 왕이 도착하는 시각을 알 수 있었다. 유대인은 혐오스런 로마로부터 자신을 해방해 줄 구원자를 기대했다. 메시아는 해방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기 1세기에 유대인들은 기대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눈앞에 나타난 하나님은 기대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결국 그들은 메시아가 왔는데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성육신의 6가지 본질적 특징은 사명에 대한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 줄 것이다.
1. 하나님이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셨다.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다른 모습을 제시한다. 우리에게 관심이 깊은 분, 피조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타락 이전의 에덴에서 하나님은 피조물과 개인적으로 직접 교제하셨다. 타락 이후에는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직접적인 상호 작용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주로 섭리와 계시를 통해 교통하셨지 대면하신 적은 거의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계획의 표상으로 성소가 마련되었지만, 완벽한 대체물은 아니었다. 성육신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말의 참뜻을 알려 준다.
2. 하나님은 자신을 비우셨다. 나는 절대로 이것을 다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한 것을 기억하는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하나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을 뿐 아니라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종의 형체를 갖기로 선택하셨다. 우리를 위해 자기를 비운 것이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하였다.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여기에 놀란 사람이 많았다. 정복자를 기대했는데 종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미련 없이 거절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3.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예수님은 하루하루 진짜 사람으로 사셨고 우리가 느끼는 한계를 똑같이 경험하셨다. 그분은 슬픔과 기쁨을 느꼈고, 배고픔과 불면을 겪었다. 우정과 거절을 경험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의복을 입어야 했고, 몸을 씻어야 했고, 몸에 상처를 당해야 했다. 서기 1세기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모기, 파리, 바퀴벌레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피할 수 없었고 그 밖에도 유쾌하지 못한 삶의 현실들을 견뎌야 했다.
예수님은 완전히 인간이셨다. 성육신 되신 그분은 피조물과 동일하게 되셨다. 우리와 같이 되신 하나님을 우주에 나타내 보여 주었다.
또 예수님은 태어난 곳의 문화를 인정하셨다. 그분은 유대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유대의 통과 의례를 겪었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삶의 방식을 배웠고 유대인 선조들의 문화를 따랐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도록 선택된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기 위해 그분은 세상의 문화를 널리 습득했다.
4. 그분은 아기로 오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전문가가 아니라 배우는 자로 오셨다. 그리스도는 인자이셨다. 삶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기로 오셔서 어린 시절을 경험하고 성인으로 자라는 길을 선택하셨다. 그분은 배우는 자가 될 필요가 없었으나 불행하게도 그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이 세상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해 하늘의 눈높이로 볼 때 자신을 낮추셨다.
5. 그분은 사람들의 영적 필요에 앞서 육체적인 필요를 먼저 채우셨다.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주지 않는다면 성육신의 존재는 완벽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해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 사람들을 만져 주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신체적·정서적 고통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동정하셨다.
독자들은 엘렌 화잇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진술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만 참된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갈망하시며 그들과 섞이셨다. 그들을 동정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고, 그들에게 신임을 얻으셨다. 그런 다음에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가난한 사람은 구제를 받고, 병든 사람들은 간호를 받고, 슬픔과 사별(死別)을 당한 사람은 위로를 받고, 무식한 사람은 가르침을 받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권면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해야 한다”(치료, 143).
6. 그분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야기, 비유, 격언을 사용하셨다. 그분은 친숙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접촉하셨다. 농업과 기타 삶의 방식 등 1세기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사용하셨다. 그분은 목자, 청지기, 주인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각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중요한 진리를 전달하셨다.
예수님은 눈높이를 맞추셨다.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영원한 진리를 전하셨다. 메시지가 이해될 수 있도록 그분은 청중에게 친근한 일상의 경험을 소재로 활용하셨다.
예수님의 사명과 우리의 사명
인류를 위한 위대한 열정으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셨다. 이 땅에 오시기 위해 예수님이 무엇을 잃어버려야 했는지 생각해 보라. 하늘의 궁전과 거룩한 보좌에 머무는 평화, 장엄한 천사들의 합창, 하늘 아버지의 임재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위엄, 그런 것이 원래 그분의 삶이었다. 궁핍, 질병, 타락한 행성에서 겪는 문제로부터 벗어나 계셨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와 성령과 완벽한 친교를 나누셨다. 수백만의 천사들이 매일 그분을 섬기기 위해 서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면 이런 구원의 계획을 하늘에서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가난과 위험의 길, 배설물과 파리가 들끓는 냄새나는 마구간을 선택하셨다. 삶의 생생한 광경, 소리, 냄새 가운데로 오셨다. 우주의 왕께서 이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한 일이었을까!
예수님이 요셉의 목공소에서 일하다가 망치로 엄지를 때린 적은 없었는지 나는 궁금하다. 나사렛에서 지낸 소년 시절과 분주한 일상이 궁금하다.
성인으로서 그분은 직업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집도 없었다. 추종자들과 이곳저곳으로 떠돌아 다녔다. 팔레스타인의 별이 빛나는 시골 하늘 아래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분은 문자 그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두 가지 측면의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해 범죄자 취급을 받고 죽으셨다. 바로 우리가 져야 할 것을 대신 지시고 수천 년간 진행된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분의 사명은 이타적이었다. 그분은 인간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인간으로서 유혹을 받았으나 죄 없이, 타협 없이 사셨다.
우리가 성육신의 접근법을 따른다면 우리의 선교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릭 맥 에드워드
대총회 글로벌미션 부장이다. 아내 마샤와 함께 메릴랜드 로럴에 살고 있다.
발문
성육신 되신 예수님의 사역에서 얻는 교훈이야말로 분주하고 종종 산만해지는 제자들에게 해독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