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 생활
소유물 곁에 머문다는 것은
일상적인 일에서 영적 채움을 발견하다
샌드라 킬비(가명)
바람이 심하게 불어 사무실 문을 닫으려고 일어선다. 습관처럼 멈춰 서서 잠시 좁은 길을 응시한다.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절박한 감정이 목까지 치밀어 오르지만 어쨌든 그 모습에 익숙해져 버렸다. 총알 자국이 난 황량한 탑들, 꼬리를 문 교통 행렬, 베이루트의 탁한 공기 가운데 무수한 아파트 발코니에서 펄럭이는 수많은 빨래의 풍경은 아직도 선교하지 못한 사람 수백만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창틀에 손을 대는데 근처 회교 사원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애처롭게 울린다. 복음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창밖에만도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그러나 늘 하던 대로 창문을 닫고 도로 책상에 앉는다.
따지고 보면 내가 맡은 일은 그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중동에 있는 재림교회 사무실에서 개인 비서로 일한다. 전 세계 교회에서 일하는 다른 지회의 많은 고용인처럼, 보고서를 작성하고, 통계 자료 형식을 완성하고, 다른 여러 지역에서 온 정보를 수집한다. 여유로운 날에는 화분에 물도 주고 창문도 닦는다. 개인 보좌, 비서, 행정보조원의 일이란 그런 것이다. 직함이야 어찌 되었든 때때로 높이 쌓인 보고서가 사무직 근로자인 나 그리고 교회의 선교 대상인 ‘그들’ 사이에 잔인한 선을 그어 놓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사역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도 현장에 나가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이끌고 싶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은 비교적 활동적이지 않은 일에 우리를 부르셨다.
사무실 근로자들은 선교사인가? 교단의 지원 사역에 종사하는 이들도 선교에 동역하고 있는 것인가? 최근에 나는 사무실 근로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
사무엘상 30장에는 끔찍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다윗과 부하 600명이 돌아왔을 때 시글락은 침공받아 불타고 약탈당했다. 그들의 아내와 자녀, 가축은 끌려갔다. 다윗 그리고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순간 절망에 빠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쉬운 일을 아니었지만 그들은 신속히 마음을 추스른 다음, 퇴각하는 아말렉 군대를 추격하기로 결정한다! 무기와 식량, 추측건대 상당한 양의 군수품을 챙겨 급히 떠났다.
성경은 그들이 빠르게 걸었는지, 천천히 걸었는지, 아니면 달렸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과 그와 함께한 600명이 브솔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 무리 중 3분의 1은 탈진하여 계속 이동할 수가 없었다. 휴식 시간을 갖는 대신에 다윗은 지친 군사 200명을 냇가에 남겨 두기로 했다. 계속 추격하는 400명의 짐을 가볍게 해 주기 위해, 뒤처진 무리에게 그들의 짐을 맡기게 한다. 성경은 이 200명을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라고 기록한다(삼상 30:24).
사무직 종사자 가운데는 다른 이들이 주님의 싸움터로 나갈 때 자기는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200명 같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우리의 역할은 중요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하찮은 일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언급된, 심히 지친 사람들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시냇가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다.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도 건강 문제, 가족에 대한 의무, 나이, 경험, 교육 및 기타 환경적 요인 등으로 현장에서 영혼 구원 사역에 뛰어들지 못하기도 한다. 뒤에 남아서 우리가 진정 교회 선교에 기여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문제로 고민이 된다면 그렇게 생각해 본 사람이 혼자만은 아님을 명심하라! 남아 있던 200명은 탈취물을 나누어 가질 자격이 없다고 실제로 다윗의 부하 중에서도 비난한 사람이 있었다. 22절을 보면 다윗의 군대가 아말렉에게서 가족과 소유물을 되찾은 후에 다윗의 병사 중 몇은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200명에게 탈취물을 나누어 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으니, 우리가 도로 찾은 탈취물들 중 아무것도 그들에게 주지 않고, 각자에게 자기 아내와 자식들만 주어서 그들을 데리고 떠나게 하리라”(한글킹제임스).
후방에 남은 지원대는 자격 미달이고 게으르고 보상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투이다. 전투 현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들에게 처자만 데리고 떠나라고 강력하게 촉구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어도 다윗은 분명 그 200명을 가치 있는 일원으로 여겼다. 만약 그들이 소유물 곁에 머물러서 추격자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지 않았다면, 나머지 400명은 적을 따라 잡을 만큼 빨리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불평하는 전사들에 대한 다윗의 대답은 고무적이다.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삼상 30:23~24).
<실물교훈>에는 “소유물” 곁에 머무는 사람, 다시 말해 오늘날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생각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진술이 있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보시는 것은 우리가 한 일의 양이나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니라 그 일을 한 정신이다”(398). 모두가 최전선에서 싸울 수는 없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에 신실하게 머물 수는 있다. 필요한 물자를 헌신적으로 관리할 수 있고 전장에 나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우리가 검을 휘두르든 소유물을 돌보든,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동등한 상급을 주실 것이다. 사무직 종사자들이 새 신자에게 침례를 베풀거나 전도회를 열어 말씀을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겸손하고 헌신적인 노력의 가치를 동등하게 보신다.
일상에서 의미 찾기
창문 밖을 내다보면, 방황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큰 도시의 모습이 나의 가슴을 끊임없이 아프게 한다. 교차로에서 구걸하고 있는 6~7살짜리 소녀를 볼 때, 눈 밑에 멍 자국이 있는 아름다운 모슬렘 여인을 만날 때, 젊은 나이에 흰머리가 많은 시리아의 난민을 바라볼 때, 최전선에서 수고하는 더 많은 일꾼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다. 나의 삶이 누군가를 위해 차이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다. 평범하고 따분한 일이지만 내가 사무실에서 하는 일이 최전선에 배치된 “400명”에게 작게라도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큰 용기를 얻었다.
시대의 소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많은 사람의 사업이 환경에 의하여 제한을 받는 것처럼 보이나 어느 곳에서든지 신앙과 근면으로 행한다면 세상의 가장 먼 곳에서까지도 그 감화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그분의 사업이 좁은 지역에 국한된 것처럼 보였으나 각 나라에서 많은 무리가 그분의 기별을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가장 큰 결과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가장 단순한 방법을 사용하신다”(소망, 822).
브솔 시냇가에서 기다리고 있든지 또는 전쟁터 한가운데 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가치 있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고 용기를 내자. 만약 우리가 충실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일은 지구 끝에서도 인지될 것이다.
발문
뒤에 남아서 우리가 진정 교회 선교에 기여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