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유산
어디서나 선구자
재림교회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교사 가족 이야기
디윗 S. 윌리엄스
독립심 강한 영국인 조지프 부스는 재림교회 해외 선교 위원회의 서기인 W. A. 스파이서에게 한 가지 선교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스파이서는 그의 제안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 사역에 커다란 복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지역에 ‘유색인’ 사역자가 활동하면 매우 유리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하면 스파이서가 기록했듯이, “백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 특별한 사역을 실행”할 수 있었다.1 게다가 부스에게는 선교 기지와 다른 용도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부지 809만 3,713평방미터(245만 평)와 건물이 있었다. 제칠일침례교인들이 시가 2만 5,000달러인 땅을 4,000달러에 재림교인들에게 양도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 기지 운영, 건물 관리, 그곳의 잠재력 확장을 위해 책임자가 필요했다.
토머스와 헨리에타 브랜치 부부
콜로라도합회가 ‘유색인’ 가족을 추천했다. 대총회가 여행 경비를 지불하면 콜로라도합회는 아프리카에 체류하는 동안 그들에게 봉급을 지급하기로 했다. 토머스 H. 브랜치는 1856년 12월 24일 미주리 주 제퍼슨카운티에서, 헨리에타 패터슨은 1858년 3월 12일 미주리 주 로어노크에서 대가족의 막내로 각각 태어났다. 그들은 1876년 12월 7일 캔자스 주 캔자스시티에서 결혼했고, 첫째 아이 메이블이 1878년에 태어났다. 그들은 1892년 재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그즈음 1887년에 토머스, 1891년에 폴 그리고 1896년에 로버트가 차례로 태어났다.
콜로라도의 선구자들
콜로라도합회가 브랜치 부부를 선택했을 때, 그들은 이미 선구자들이었다. 헨리에타는 간호사 훈련을 받았고 의료 선교사로서 봉사할 수 있는 추가 과정도 마쳤다. 토머스는 콜로라도 푸에블로에서 유능한 강사이자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는 학생이었고 열정적인 평신도 사역자였다. 1세기 전에 그가 뿌린 씨앗의 결실로 오늘날 푸에블로와 덴버에 규모가 큰 아프리카계 미국 교회 네 곳이 생겼다.
토머스와 헨리에타는 교회에서 파송한 대부분의 선교사보다 나이가 많았다. 토머스는 46세, 헨리에타는 44세였다. 그 당시 결혼하지 않은 딸 메이블은 24세였고, 각각 15세, 11세, 6세인 남자아이 셋은 새로운 경험을 앞두고 기대에 부풀었다. 이 모험적인 가족 원정에 장남 토머스가 함께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재림교회에서 흑인이 아프리카로 파송된 적이 없기 때문에, 브랜치 가족은 다시 선구자가 되어야 했다. 따라야 할 역할 모델이 없었기에 마케도니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준비에 대한 굳은 믿음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쁘게 갔다. 콜로라도합회는 5월 22일, 토머스 브랜치에게 안수했고 그들의 출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형제들과 동역자들 그리고 우리가 섬겼던 사람들을 즉시 떠나 이전 고향인 덴버에 가서 여행을 준비했다. …몇 가지 필요한 것을 챙긴 다음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우리는 시카고로 떠났다. 스파이서 목사님을 거기서 만났고 여행에 필요한 안내를 들었다.”2
아프리카로
브랜치 가족은 1902년 6월 4일 수요일 아침, 영국 런던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고 6월 12일 도착했다. 영국에서 첫 번째 안식일을 보낸 던컴홀 교회에서는 “온 성도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3 런던에 도착한 지 2주 후 이번에는 추진력과 아이디어로 이 여행을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 외골수 조지프 부스와 함께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그들의 앞에는 사우샘프턴에서 동아프리카로 가는 7주의 항해 그리고 새로운 사역지에서 주를 위해 봉사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익숙한 미국 땅을 등지고 떠났지만 “사랑하는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시는 넓은 수확지가 있고 우리는 그분의 포도원의 한 부분인 그곳으로 가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4라고 확신하며 말할 수 있었다.
독불장군 부스
잠베지 강 입구에서 영국 영사는 9일 동안 그들을 붙들어 두었다. 그 기간에 브랜치 부부는 조지프 부스가 어떤 사람이며 그로 인해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알게 되었다. 부스는 친아프리카 정치•사회 사상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공직자들은 일부 미국 흑인들이 아프라카에 독립 정신과 반항심을 퍼뜨린 데 대해 이미 염려하고 있었다. 이른바 에티오피아니즘이라고 하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은 1890년경 남아프리카에서 시작했다. 장차 에티오피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 것”(시 68:31)이라는 성경 구절을 특이하게 해석하면서 아프리카에 독립 교회들이 발생하던 시기였다. 이 사상에 연루된 장본인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토머스 브랜치가 아니라 영국계 조지프 부스였는데도 식민주의자들은 에티오피아니즘과 교육받은 미국 흑인을 동일시했다.
부스는 <아프리카인을 위한 아프리카>라는 책을 썼고 거기서 영국의 식민주의 철폐를 위한 방법도 제시했다. 그는 완전한 인종 평등을 믿었고 불평등에 반대하라는 부름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느꼈다. 기업화된 선교는 아프리카인의 재정적•교육적 독립을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부스는 거기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부지 계획으로 마음을 끌었을 때 스파이서 목사와 재림교인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따라서 브랜치 가족은 에티오피아니즘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당국에 확신시키기 위해 애를 먹었다.
그곳의 선교 기지인 플레인필드 미션에서 브랜치와 부스 사이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브랜치 부부는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 이외에 부스의 제안에는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부스는 항상 어떤 프로젝트에 연루되었고 선교 대금이나 브랜치 부부의 봉급을 제대로 지불한 적이 없었다. 결국 6개월 후 해외 선교 위원회는 부스를 소환했고 그에게 영국에서 문서전도인으로 일하도록 요청했다.
플레인필드를 이끌다
부스가 돌아간 후 브랜치는 플레인필드 미션의 책임자로 홀로 수고했다. 선교 위원회에서는 그를 돕도록 조지프 H. 왓슨과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을 파송했다.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왓슨은 1년도 되지 않아 33세에 숨을 거두어 선교지에 묻혔고 그의 아내와 아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브랜치는 계속해서 책임자로 애썼고 1906년 7월 4일 말라위에 첫 재림교회를 조직했다.
또 다른 선교사 조엘 C. 로저스가 그곳을 말라물로(‘계명’이라는 뜻)라고 새롭게 이름 지을 때까지 그 일을 맡다가 1907년, 더 나은 기후와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찾아 남아프리카로 갔다. 실망스럽게도 자녀들은 백인 재림교회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거기에 헨리에타의 건강 문제까지 겹쳐 그들은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토머스는 덴버에서 다시 한번 유색인들을 위한 일을 맡았다.
1911년 동펜실베이니아합회에 부름을 받고 나서 브랜치는 선구자의 발자취를 최소한 한 가지 더 남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필라델피아의 첫 아프리카 재림교회를 조직하고 목양한 것이다. 후에 그 교회의 이름은 에벤에셀로 변경되었고 오늘날 필라델피아에 존재하는 약 12개 아프리카 재림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헨리에타 브랜치는 필라델피아에서 1913년 4월 4일 잠들었다.
브랜치 부부는 콜로라도와 말라위 그리고 필라델피아에서 선구자였다. 그들은 정치와 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안겨 주었다. 그들이 재림교회에 남긴 놀라운 업적은 각 지역에서 세계 선교를 수행하는 모든 이에게 영감과 혁신적인 모델로 자리매김하며 온 세상에 전해질 것이다.
1 W. A. Spicer, “The New Missionary Enterprise: Nyassaland”,
2 Mr. and Mrs. T. H. Branch, “Called to Africa”,
3 Ibid.
4 Thomas Branch and Family, “On the Ocean”,
디윗 S. 윌리엄스
46년간 사역했고 1990년부터 2010년까지 북아메리카지회 건강 사역을 이끈 뒤 은퇴했다. 아프리카에서 목사와 선교사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