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의 신 알아가기
5부 1891~1900 호주 체류기
6부 1900~1915 엘름스헤이븐 체류기
하나님의 메신저
호주에서의 저술
세계 교회를 격려하다
엘렌 화잇의 생애와 유산에 대한 고찰
존 스크르지파스제크
엘렌 화잇이 1891년 12월, 호주에 도착한 후 보낸 9년간의 봉사(1891~1900년)는 그녀가 저술을 통해 전 세계 교회에 기여한 기간과 일치한다.
대쟁투 주제와 그것이 교회의 영적 생활에 끼치는 영향력을 그녀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 쟁투가 “미국 사람들의 마음”뿐 아니라 “먼 나라 사람들의 마음”에도 전해져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1 호주에 도착하기 전까지 엘렌 화잇은 막막한 상황, 즉 다가올 여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명한 지시를 하지 않으신 점 때문에 괴로워했다. “오늘 아침, 나의 의무와 관련하여 마음이 불안하고 고민스럽다. 내가 호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나는 미국에서 이 먼 나라로 떠나라는 특별한 빛을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나는 갈 것이다.”2
엘렌 화잇은 곧 은퇴할 나이였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 그녀의 주요 목적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나는 조용하게 쉬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책으로 출간하고 싶다.”3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인간 생애에 간여하시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구하면서 그녀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깊게 신뢰했다. 화잇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주님 앞에 내 일을 내어놓았다.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인도하시리라 믿는다.”4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S. S. 알라메다호를 타고 1891년 12월 8일, 시드니에 도착했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지낸 기간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숙고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그녀가 호주에 있을 동안 교회에 끼친 공헌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녀는 상대적으로 어린 교회의 영적인 부분을 보살폈다. 둘째, 이상에 근거한 격려를 통하여 기관의 발전과 긴박한 선교 사업을 도왔다. 셋째, 그녀의 가장 왕성한 저술 시기(1888~1911년) 가운데 호주에 지낸 9년은 아주 중요했다. 전 세계 교회를 향해 그녀는 영적인 삶을 두드러지게 강조했다. 그녀의 저작들에서는 인간의 가치, 존엄성, 독특성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 사랑에 대해 영감 넘치도록 심오하게 다루어 놓았다.5 그녀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양육
엘렌 화잇은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젊은 교회를 영적으로 양육하기 시작했다. 시드니에서 보낸 첫 안식일에 그녀는 요한복음 17장으로 설교했다. O. A. 윌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그토록 희망과 용기가 되는 말씀을 그들은 이전에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6
편지에서는 대부분이 이 중요한 주제를 모른 채 지낸다고 설명했다. A. G. 다니엘스를 언급하면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주제와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아주 어렴풋한 빛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7라고 그녀는 기록했다.
이어지는 수요일에 엘렌 화잇은 멜버른으로 가서 에코 출판사 직원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875년에 주어진 이상에 근거해서, 그녀는 직원들 사이에 연합과 조화가 부족하다고 말했다.8 그 직원들의 자세에 대해 경고했다. 그녀의 기별을 듣고 심령들이 쪼개졌다. “형제들은 서로 고백하며 서로의 목을 안고 울면서 용서를 구했다.”9
이 시기에 엘렌 화잇이 제공한 영적 보살핌을 다 설명하려면 지면이 부족하다. 그 양육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연구에서 깊이 우러나온 것이었다. 1891년 12월 27일에 기록된 일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구원의 계획과 타락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저는 거침없이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제와 그녀의 신뢰할 만한 영적 보살핌으로 인해 엘렌 화잇과 호주 재림교회 사이에 강한 유대감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관계의 결속은 어머니가 어린 자녀에게 발휘하는 영향력에 견줄 만했다.10
이상에 근거한 격려
엘렌 화잇은 기관의 발전과 긴급한 선교를 위한 교회의 비전을 구체화했다. 그 일은 1874년 4월 1일에 받은 이상과 연결된다. 사자는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그대들은 이 시대를 위한 사업에 대해 너무 제한된 식견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보다 광범위한 견해를 지녀야만 합니다.”11
사업이 전 세계적으로 적용되었기에 그 도전은 놀라운 일이 되었다. “이 기별은 세계 각처로 강력하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오리건으로, 유럽으로, 호주로, 대양의 많은 섬들로 전파될 것입니다.”12
호주에 정착한 지 몇 달 후에,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그 경험은 이 나라와 미국에 있는 백성의 유익을 위한 주님의 크신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또 저 자신의 유익을 위한 보배로운 경험이었습니다.”13
이런 생각으로 엘렌 화잇은 선교 사업을 위한 성경 학교를 건립할 때 주된 역할을 했으며(1892년 8월 24일), 이것은 오늘날 애번데일 대학교라는 교육 기관의 설립으로 이어졌다(1897년). 화잇은 건강 관리와 건강한 생활에 대해 관심을 고취시켰고 교회가 그러한 하나님의 선교 영역으로 확장해 가도록 용기를 북돋았다. 그녀의 이상에 근거한 추진력으로 말미암아 시드니 재림교회 병원과 새니태리엄 건강식품회사가 탄생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모든 기관이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 기관들은 세계적으로 주님의 선교 사업을 확장하는 데 조화를 이루며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 교회를 위한 엘렌 화잇의 이상
엘렌 화잇이 호주에 있는 동안에 대쟁투의 핵심 주제가 나타났다. 이전에 기록된, 선악 간의 대쟁투에 대한 역사적 개관은 하나님과 사탄이라는 두 적대 세력이 실제로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는지를 강조했다. 1888~1911년에 기록된 출판물에서는 그 문제의 핵심, 다시 말해 어둠의 권세에 대항하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 여정으로 독자의 관심이 쏠리게 했다.
호주에서 완성된 고전인 <시대의 소망>(1898년)에서 화잇은 다음과 같은 주옥같은 말을 남겼다.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얻는 중에 각 사람은 개인적인 경험을 얻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각기 개인적으로 그분께서 마음에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모든 다른 소리가 침묵하고 우리가 조용한 가운데 그분 앞에서 기다릴 때 영혼의 침묵이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분명히 들리게 한다.”14
1897년, 그녀는 또 다른 주제, 즉 그리스도인 교육의 가치에 초점을 두기 시작했다. 곧 출간될 엘렌 화잇의 책 <교육>(1903년)을 언급하면서, 윌리 화잇은 “<부조와 선지자>, <각 시대의 대쟁투>, <시대의 소망>, <산상수훈>, <실물교훈> 등 어머니의 저술에서는 구속의 계획에 대해 더 많이 다루었다.”15라고 말했다.
확실히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인 교육의 본질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가치와 잠재력과 독특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는 역할을 대쟁투의 맥락에서 요약해 놓았다. 악의 세력이 인간의 생명을 붕괴시키는 반면에, 하나님의 임재는 봉사의 잠재력과 사회를 개선할 힘을 고취시키고 회복시킨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동안 엘렌 화잇은 시간 추정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과 신뢰에 평가 기준을 두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그런 믿음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때 생긴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이 모든 일에서 그녀의 저술은 세계 교회가 예수님 손길을 확장하도록 격려한다. 사실, 호주에 거주하는 동안 그녀는 편지를 통하여 미국의 사업도 간여했고 미국에서 급부상하는 군왕적 권력을 질타하기도 했다.
잊을 수 없는 자취
엘렌 G. 화잇이 1900년 8월에 떠났을 때, 호주 교회는 상실감이 컸다. 그곳에서 보낸 9년간의 봉사 동안 사람들은 그녀가 베푼 사랑스런 돌봄을 통해 친절을 경험했다. 쿠란봉에서 거주했던 사업가 토머스 러셀은 다음과 같이 상실의 아픔을 잘 요약했다. “E. G. 화잇 여사가 우리의 조그만 마을에서 보내던 시간을 우리는 아주 그리워할 것입니다. 과부와 고아가 그녀에게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궁핍한 사람들을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먹여 주었습니다. 어두운 그늘이 있던 곳에 그녀는 환한 햇살을 비추었습니다.”16
1 Ellen G. White manuscript 29, 1891, in
2 Ellen G. White manuscript 44, 1891, in
3 Ellen G. White manuscript 29, 1891, in
4 Ellen G. White letter 57, 1891, in Arthur L. White, Ellen G. White: The Australian Years(Washington, D.C. :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83), vol. 4, p. 18
5 1888~1911년에 출간된 저술 : <각 시대의 대쟁투>(1888), <부조와 선지자>(1890), <정로의 계단>(1892), <산상보훈>(1896), <시대의 소망>(1898), <실물교훈>(1900), <교육(1903), <치료 봉사>(1905), <사도행적>(1911), <교회증언> 다수
6 Ellen White letter 21, 1891(See also A. L. White, Ellen G. White: the Australian Years, vol. 4, p. 22)
7 상게서
8 Ellen G. White Estate Document File 105j: William C. White, “A Comprehensive Vision.”
9 Ellen White manuscript 45, 1891, in A. L. White,
10 Arthur Patrick, “Ellen White: Mother of the Church in the South Pacific”,
11 Ellen G. White,
12 상게서
13 Ellen G. White letter 18a, 1892, in
14 Ellen G. White,
15 Arthur L. White,
16 Thomas Russell, Cooranbong, May 3, 1900. 이 메모는 1900년 8월, 엘렌 화잇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건네준 앨범에 기록되었다.
존 스크르지파스제크
호주의 애번데일 대학교 내 엘렌 G. 화잇 연구센터 소장
캡션
1887년 노르웨이 모스에서 유럽의 첫 야영회가 개최되었다. 숙박과 집회를 위해 텐트가 사용되었다. 텐트 앞 중앙에 있는 엘렌 G. 화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