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묵상
희망이 이긴다
윌로나 카리마바디
초등학교 때 나는 조부모님을 꽤 따랐는데 안타깝게도 그분들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사셨다. 하지만 1년에 몇 번은 우리 집에 오셔서 몇 주 동안 머물곤 하셨다. 나에게 조부님의 방문은 늘 대환영이었다. 보통 때 허락되지 않는 것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맛있는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손주들을 ‘망가뜨리는 일’에 그분들은 빠삭했다. 학교, 숙제, 엄격한 취침 시간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일상에서도 그분들이 오시면 방학처럼 신났다.
하지만 그런 즐거운 날들은 금세 지나갔다. 우리는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맞는 일상은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조부모님은 부모님을 이기기 때문이다. 곧 다시 만날 거라 말씀하시며 도착하면 전화하겠다고 약속하시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진 기억은 없다. 아마 나는 너무 예민한 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분들의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는(911테러 이전이었다.) 말 그대로 우울증에 빠지곤 했다. 농담이 아니라 나는 매일 울며 집 주위를 힘없이 돌아다녔고 좀처럼 웃음을 띨 수 없었다. 감사하게도 이러한 불안감은 1주일밖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치 누군가를 애도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부모님은 나의 눈물과 시무룩한 표정을 보고 걱정하시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건강히 잘 계시고 전화만 하면 금방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다독거리셨지만 그렇다고 그분들이 옆에 계시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원하면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실제로 함께 있다는 것, 매일 보면서 함께 있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도 조부모님이 떠났을 때 느낀 상실감을 기억하고 있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재미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그저 슬프기만 했다.
가여운 제자들
1년간 차례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 통독하는 계획을 실행 중이다. 이 글을 쓸 무렵에는 52주 중 4주째가 되었다. 멋진 경험이었다. 내가 알고 좋아하는 구절을 다시 읽었고, 새로운 것을 탐구했다. 경이로움에 빠지기도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복음서 이야기,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의 경험담을 읽으면서 그들이 참 안타까웠다. 예수님이 무덤에 계신 동안 그리고 승천하신 다음에 그들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하면 정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수년 동안 함께해 온 자신들의 구주,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버리고 따르기로 한 그분, 그분이 가 버렸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그 어두운 시간에 그들이 마음속 깊이 무엇을 느꼈을지 나는 상상이 간다. 물론 그분이 가르쳐 준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육신으로 함께할 수는 없지만, 그분이 결코 자신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도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하늘로 돌아갔을 때 기쁘면서도 괴로웠을 것이다.
부활 후에 그분은 바로 떠나지 않으셨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제자들은 이스라엘 왕국을 복원할 계획에 대해 그분께 물었다. 아마 그들은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에서 자기들이 늘 고대했던 모습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늘 생각했던 방식, 말하자면 그 자리에서 단번에 백성을 구속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주님이 육체적으로 떠날 일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희망을 걸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정확한 시간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한편으로는 늘 함께하겠다는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도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분은 계획을 세우고 계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취된 약속
조부모님이 무사히 도착하신 다음 전화로 달래 주시면, 나는 그분들을 머지않아 또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한 주 동안의 우울증이 수그러들고 다음 만남을 기대하기가 더 쉬워졌다. 학교, 친구, 유년기 생활 등 바쁘게 지내는 것도 분명 도움이 되었다.
제자들은 이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커다란 임무가 생겼다. ‘가서 전하라.’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전하고 가르치라고 그들에게 명하셨다.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고 그분의 재림을 위해 백성을 준비시키라고 하셨다. 우리에게도 이 일이 계승되었다. 그분이 하늘로 승천하셔서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9절)을 보면서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앞으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더 큰 격려 없이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다. 장중한 격려였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0~11).
그 순간 그들은 단 한 가지로 인해 마음이 가벼워졌을 것이다. 바로 ‘희망’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것으로 삶의 무게를 견뎌 낸다.
조금만 있으면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을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 나는 슬픔을 잠재울 수 있었다. 수년 후 조부님이 돌아가셨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으로 느끼는 슬픔과 때때로 그분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나는 똑같은 희망으로 견뎌 낸다. 조금만 있으면 그분들을 만날 테니까.
제자들은 그 희망으로 전진했다. 이별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이를 때까지 우리도 희망으로 전진한다. 이 얼마나 야무진 꿈인가!
윌로나 카리마바디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부편집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