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자유
제럴드 A. 클링바일
그들은 작은 보트를 타고 출발한다. 수십 명이 탈 수 있는 공간에 수백 명이 꽉 차 있다. 남녀노소 모두 더 나은 땅을 찾아가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남수단, 소말리아, 콩고 등 전쟁과 기근과 박해가 일상인 곳에서는 어디든지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목적지는 유럽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혹은 생존을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해, 안식과 자유를 위해 그들은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
그들의 곤경은 우리의 공감대를 자극한다. 우리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안식, 소속감 그리고 안전과 자유에서 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며 산다. 파도와 싸우고 온갖 역경을 이겨 내는 보트를 보면서 더 나은 곳과 참된 안식을 얻으려는 우리 자신의 여정이 떠오른다.
자유를 위해 창조되다
그 이야기에는 안식일이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을 인간은 안식일을 통해 매주 기억한다. 사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주신 선물이다. 제칠일은 인류 역사에서 핵심적인 두 사건을 기억하게 한다. 첫째, 인생에 시작이 있음을 알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대로 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창 1장). 하나님께서는 숨이 멎을 만큼 놀라운 환경과 진정으로 경이로운 창조물들을 디자인하고 창조하기 위해 엿새를 투자하셨다. 창조는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선명한 색깔과 믿기 어려운 모양과 생명 자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 “안식일을 기억하라”(출 20:8)는 우리 마음과 심령을 만물이 창조되었던 순간과 연결시킨다.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품성의 기본적인 사본에 모세가 포함시킨 안식일은 신신학이나 새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한 창조, 완전한 관계 그리고 선택의 능력을 상기시킨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첫 부모들은 제칠일마다 만났던 창조주를 신뢰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9~11절). 그분이 안식하셨기에 우리도 안식한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함과 복 주심에 경탄하므로 쉼을 누린다. 창조의 안식을 발견하고 그분께서 건강하게 해 주실 것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안식한다.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한다. 그렇지만 안식일에 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은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새로운 세대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문턱에 서 있었다. 텐트에 사는 대신에, 그들은 앞으로 영구한 집을 짓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백한 의지와 품성의 표현을 다시 들을 필요가 있었다. 신명기 5장의 본문은 시내산 기슭에서 처음으로 십계명을 선포했던 내용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두드러진 차이도 존재하다. 그 차이는 중요한 안식일 계명에서 나타난다. “기억하라” 대신에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준수하라” 혹은 “지키라”라고 요청한다(12절). 안식일 준수는 의식 있는 결단이다. 되는 대로 지키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놀라움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근본적인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5절). 그 본문은 실제로 암묵적인 것을 명백하게 해 주고 그것을 새로운 세대에게 말한다. 창조는 안식의 근본이다. 해방은 안식일의 가장 명백한 표현이다. 그 이후로 매 안식일, 이스라엘(그리고 그대와 나)은 인류의 참된 상태를 기억해야만 했다. 우리는 잃었다가 찾아진 자가 되었고, 노예였다가 해방되었다. 손수 인류를 지으실 뿐 아니라(창 2:7) “강한 손과 편 팔”(신 26:8)로 자유를 주신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은 창조물이다.
스토리의 나머지
사탄이 안식일을 파괴하는 데 그토록 집착하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자신이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말라며 그 대신 자족, 자기 의, 독립을 우리 귀에 속삭인다. 창조와 구원의 영원한 징표가 선악 간의 우주적 전쟁의 초점이 되었다. 지난 세기들, 심지어 수천 년간, 안식일과 연관되어서 잦은 폭력적인 쟁투가 목격되었다. 이를 통해 안식일이 그저 단순한 또 다른 날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안식일은 오히려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 활동의 중심을 대표한다.
그리고 쟁투는 계속된다. 예수께서 마침내 다시 오실 그날이 되어서야 보트들은 은신처와 보호, 자유를 찾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나르는 일을 멈출 것이다. 수억 명이 안전과 피난처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이동하는 죄로 병든 세상에서 고통, 멸망, 학대가 아주 널리 편만할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마다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고 이런 고되고 고통스런 삶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다. 피조물을 위해 언제나 일하시는 분(요 5:17)께서는 어느 날 목적을 이루실 것이고 우리를 그분의 궁극적인 안식(히 4장), 즉 우리 자신에게서의 안식, 의와 거룩함을 스스로 얻어 보려고 하는 연약한 시도로부터의 안식, 우리 존재가 정상이라고 느끼고 있는 고뇌와 슬픔으로부터의 안식으로 기꺼이 맞이하실 것이다. 그때 우리는 진실로 그분의 ‘샤바트’ 즉, 안식을 알게 될 것이다. 머지않은 시간에.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서 보낼 첫 안식일을 고대하며 매 안식일을 즐기고 있다.
* 다음을 참고할 것 – Ellen G. White,
사이드바
안식일
자애로우신 창조주께서는 엿새 동안의 창조 후 쉬셨으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창조의 기념일로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율법의 넷째 계명은 이 제칠일 안식일을 쉼과 예배와 안식일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교훈과 실천에 조화되게 봉사하는 날로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하며 인간 상호 간에 교제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구속의 상징이며 우리의 성화의 표징이요 우리의 충성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왕국에서 누리게 될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맺은 영원한 언약에 대한 영구한 표징이다. 이 거룩한 시간을 저녁부터 저녁까지, 즉 해 질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즐겁게 준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행위를 경축하는 것이다(창 2:1~3; 출 20:8~11;31:13~17; 레 23:32; 신 5:12~15; 사 56:5~6; 58:13~14; 겔 20:12, 20; 마 12:1~12; 막 1:32; 눅 4:16; 히 4:1~11).
발문
안식일 준수는 의식 있는 결단이다. 되는 대로 지키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