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적인 충동인가, 심사숙고인가?
우리는 어디에서든 예수님을 따르라고 부름 받는다
베른트 센게발트
어부들이 그물을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한 남자가 해변에 나타나고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주변에 모여든다. 그리고 기적을 목격한다. 그들은 미련 없이 그물을 버리고, 말하자면 생업을 그만두고 그를 따른다. 생계 수단을 포기하고 어떤 보장도 없이 낯선 사람을 따라 불확실한 미래로 들어가기로 한다(마 4:18~22).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것처럼 보이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이 야기를 복음서에서 읽고 놀란 적이 있는가? 그들처럼 즉시 그리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본 적이 있는가?
모델은 누구인가?
나라면 무엇보다도 그러한 중대한 결정에 대해 조금 더 시간을 갖고 기도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따르려는 대상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아보고 싶을 것이다.
여기에 좋은 소식이 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단지 충동적으로 결정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이 특별한 사건은 서기 29년 여름 즈음에 일어났는데 이는 예수님이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고 대략 1년 반에서 2년이 지난 후였다.1
이 점은 쉽게 간과된다. 하지만 성경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것은 분명해진다. 마태복음 4장 12절에는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 1장 14절에서 발견되고 누가복음의 내용도 예수께서 어부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했을 때 갈릴리에서 이미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예수께서는 침례 요한이 체포되기 전에 활발하게 사역하셨다.
하지만 당시 예수님의 활동 내용은 요한복음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요 2:1~12),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13~17절) 그리고 이어지는 간단명료한 구절을 거기에서 읽을 수 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23절). 요한은 밤에 일어난 니고데모와의 만남(요 3:1~21)과 예수님과 침례 요한 모두 침례를 준 것에 대해 기록했다. 후자와 관련해서 성경은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23~24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두 번째로 갈릴리에 왔을 때 사람들 사이에 그의 인기는 아주 컸다. 그가 머무시는 곳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 사는 왕의 신하가 소식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가나로 찾아가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요 4:45~47).
요약하자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즉시 모든 것을 버린 것처럼 보이는 위의 네 사람은 오랜 시간과 기회를 거치며 그들의 주님과 구주를 알게 되었다(요 1:35~42). 그들은 예수님과 아주 가까이 지내면서 그분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경험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았다. 심지어 예수님을 대신해 침례도 주었다(요 4: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충동적인 결정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침례를 받고 얼마 후 예수께서는 그들을 파트타임 제자로 삼았다가(요 1:35~51), 약 1년 반에서 2년이 지난 후에 그들을 전업 제자로 불렀다.2 인간으로서 우리는 보통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중요한 결정을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적용하셨다.
예수님의 부름에 즉시 행동해야 할 때
물론 예수께서 부르실 때 “즉시” 행동해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야곱의 우물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메시아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확신하자마자 즉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신앙에 대해 솔직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말했고 결국 주민 사이에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요 4:28~42).
데가볼리의 거라사 지역에 귀신 들렸던 사람 이야기는 또 다른 예이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대신에 예수께서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자기 삶에 일어난 기적에 대해 고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예수님을 떠나 그의 경험에 대해 말하며 데가볼리 지역을 떠돌아다녔다(막 5:18~20). 얼마 후 예수께서 그 지역을 다시 방문했을 때 그분을 만나기 위해 사천 명이 모였다. 사흘 동안 그분께서는 그들을 가르치고 고치셨으며 두 번째 먹이시는 기적을 이루셨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는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것에 반해 이번에는 대부분이 데가볼리 지역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경험을 즉시 나누기 시작한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의 동네에서 왔다(마 15:29~39).
나를 따르라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즉시 실천에 옮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복을 전하는 것은 중요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한 방법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자신도 신중하셨다. 남을 위해 일하실 때 깊이 생각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까지 요구할 수 있는지도 아신다.
이 사실에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의 설교도 같은 모델을 따르고 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그분은 말씀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역의 첫 1년 반 동안 예수께서는 오직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설교하셨다. 그곳에서 유대인 지도자의 저항이 너무 커지자 장소를 갈릴리로 옮겨 자신의 하늘 왕국 기별을 전하셨다. 가는 도중 사마리아에서(마 4:12) 설교하셨다. 갈릴리에서 저항이 너무 거세지자(요 6:66), 데가볼리를 포함해서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사역하셨다(마 16:13).3
복음서를 빠르게 읽다 보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중요한 연결 고리와 흥미로운 사항을 간과하기 쉽다. 연대표가 항상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하고 또 걸린다. 특히 인간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맡기도록 그분께서 부르신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리고 그 때를 그분은 정확하게 아신다.
1
2 Ibid., p. 319
3 Ibid., p. 428
베른트 센게발트
독일 남부에 있는 슈배비슈 지역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이 기사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바덴뷔르템베르크연합회의 소식지
발문
인간으로서 우리는 보통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중요한 결정을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