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면 율법주의, 알고 보면 위선자
다소 편협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신앙에 관한 새로운 통찰이나 가르침을 전부 다 고려할 만큼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어떤 것을 고려해야 할지는 자기 마음에 자리 잡은 신학적 규범이나 틀에 따라 선택되며 정보는 그렇게 걸러지고 취합된다.
이처럼 신학적 사고의 틀이 형성되면, 예를 들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와 신약에서 원수를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동시에 이해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신학적 틀이 없다면 자가당착에 부딪히나 성경의 한쪽만 지지하고 한쪽은 배척하게 된다.
또 신학적 사고의 틀이 갖춰지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며 신약의 기록은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어느 성경학자가 주장한다고 해도 애당초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꿀 사람은 없다.
이처럼 사고의 체계는 필수적이며 그 역할 또한 크다. 우리가 그 사고 체계에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말이다. 만약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생각의 패러다임을 향상시키고 진리를 더 분명히 규명시켜 주는 핵심 사항들을 놓칠 수도 있다. 재림교인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무의식중에 일종의 사고 체계를 형성해 왔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복음서를 읽다가 예수님이 예리하게 제시하신 핵심 요점을 지나쳐 버리기도 한다. 그와 같은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생각의 패러다임 중 하나가 바로 율법주의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을 좀 더 면밀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패러다임은 안식일학교, 설교, 정기 간행물, 일상 대화 어디에서든 감지된다. “바리새인은 율법주의자였고 율법주의를 가르쳤다.”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주의를 꾸짖었고 은혜와 사랑이라고 하는 새로운 길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율법에 순종하되 율법주의적이어서는 안 된다.” “안식일 준수는 율법주의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인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의하면 복음서에서 가장 위험하게 취급된 것은 율법주의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견책하고 가르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고방식으로 접근하고 싶다. “파고드는 게 있으면 빠뜨리는 게 있다.”라는 격언에 빗대어 볼 때 우리는 율법주의를 솎아 내려다가 ‘위선(hypocrisy, 외식)’은 놓쳐 버린다.
이 차이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교회 친구들에게 복음서 중 율법주의에 대해 언급하는 구절 하나만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럴 때마다 일부는 아무 말도 못했고 일부는 한결같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라는 구절을 들었다. 독자들 역시 같은 구절이 생각났을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여기부터다.
일반적으로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정의하는데 과연 마태복음 23장 23절이 율법주의의 좋은 예가 되는지 살펴보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견책
문제는 이것이다. 예수께서는 정확히 무엇을 꾸짖고 계시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분이 율법주의를 비난하시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반대이다. 예수님은 준수의 동기야 어찌되었든 간에 바리새인의 율법 준수를 가지고 뭐라고 하신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율법 준수를 ‘소홀히’ 여겼다고 책망하셨다.
그뿐이 아니다. 율법을 소홀히 했다고 꾸짖으셨고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을 경시했다고 나무라셨다. 감이 잡히는가? 바리새인은 범법자일 뿐 아니라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을 범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또 다른 차원에서 불순종했다고 그분은 폭로하신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풀이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소홀히 하고 덜 중요한 부분만 지키면서 율법 전체를 지키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한다. 이 마지막 부분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에게 특별한 호칭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호칭은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위선자(외식하는 자)’이다. 그분은 여러 차례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렇다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들이 십일조를 중단하는 게 예수님의 바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분은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은 물론 다른 것도(예를 들면 십일조) 소홀히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물에 들어간 작은 하루살이 한 마리는 걸러내고 커다란 털북숭이 낙타는 꿀꺽 삼켜 버렸다고 충격적인 은유를 사용하시면서,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라는 견책을 마치신다. 이 괴상망측한 물 여과 방법은, 율법의 덜 중요한 부분만 지키고 핵심은 배척하는 위선과 한 쌍을 이룬다. 예수님은 십일조 드린 것(하루살이)을 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낙타)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신 것이다.
그분은 비슷한 비유를 들어 두 번째 ‘화’를 선언하신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회칠한 무덤 이야기이다(마 23:27). 무덤 안에서 썩어 가는 송장을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은 싹 사라진다. 예수님의 견책은 ‘회칠’과 ‘하루살이’가 아니라 ‘낙타’와 ‘죽은 사람의 뼈’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설명한 “외식과 불법”에 해당하는 것이다(28절).
율법주의로 풀이하는 패러다임에서는 하루살이와 회칠에 주목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견책하시는 중심 대상은 낙타와 죽은 사람의 뼈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광경을 한마디로 종합하여 “외식”이라고 표현하셨다. 물론 거기에는 율법주의가 포함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근본 문제로 간주한다면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견책은 본래의 의도에서 크게 왜곡되고 만다.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인가?
위에서 언급한 성경절이나 비슷한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리새인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는 퇴색하기 시작한다. 바리새인은 율법주의의 본보기로 여겨졌다. 해 아래 존재하는 모든 율법을 지키지만 그들의 철저한 순종에는, 칭찬받고, 행위 지향적이고, 구원을 쟁취하고, 스스로 만든 도덕적 틀에 자력으로 도달하려는 동기가 깔려 있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고 예수님의 대화를 살펴볼수록 바리새인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에 문제가 나타난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바리새인1은 율법을 세심하게 지키는 도덕주의자가 아니라 율법을 파괴하는 위선자의 전형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2
설명이 길어졌지만 엘렌 화잇의 진술은 간단명료하다. 그들의 “외관적 성결” 속에는 “불의가 감춰져 있으며”(소망, 617) 그들은 “의식법을 세심하게 준수했으나 정작은 비도덕적이며 천한 삶을 살았다.”(위의 책, 609)고 그녀는 말했다.
이 뚜렷한 특징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보면, ‘위선’이라는 패러다임으로 훨씬 더 잘 설명되는 구절이 많다. 가령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모인 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데는 더 큰 의도가 담겨 있다고 엘렌 화잇은 설명했다. “바리새인들의 성격을 더욱더 충실히 폭로”하기 위해서인 것이다(위의 책, 612). 그들은 율법을 가르쳤지만 자신들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다(2기별, 98).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실상을 제대로 폭로하셨는가?’ 아니면 우리는 바리새인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사람이라고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야만 하는가?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요 7:19)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또 이런 경고도 하셨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
누가복음 3장에서 침례 요한의 설교는 이 부분에 대해 힌트를 주고 있다. 청중이 만약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신학에 빠져 있었다면, 요한이 설교를 마무리하며 던진 마지막 호소는 엉뚱한 것일 수밖에 없다. 마음을 뒤흔드는 회개의 설교를 들은 후 군중은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 질문은 율법주의적 도덕관을 내버리게 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그 순간에 침례 요한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나열한 것이다. “여분의 옷을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나누며, 정한 세 외에는 걷지 말며 거짓 고소하거나 돈을 갈취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0~14). 만약 군중이 ‘행위’에 치우쳐 있었다면 침례 요한의 그런 멘트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행위들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청중이 생각하면 어쩔 것인가? 분명히 핵심 쟁점은 그게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선지자보다 나은 사람인 요한은 21세기의 우리보다 자신의 청중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설교를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볼 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악행을 회개하고 선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쨌든 요한은 청중에게 가짜 확신을 심어 주는 울타리를 걷어 버렸다. 구원에 대해 그릇된 안심을 가져다주는 울타리였다. 그런데 그 울타리는 ‘내가 율법을 지켜서 얻는 구원’이라는 울타리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나의 조상’이라고 안심하는 울타리이다(눅 3:8). 따라서 요한은 이스라엘에 돌이 부족하지 않는 한, 출신 성분에 따라 저절로 구원받는 일 따위는 없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동기
여기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다. ‘핵심 쟁점은 위선에 대한 것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적어도 바리새인과 다른 이들이 율법을 지킬 때 그 동기는 역시 율법주의가 아니었던가?’
분명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사람들이 율법주의적인 동기로 율법을 지켰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런 모습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의하는 율법주의 성향이 바리새인에게 줄곧 나타났다고 쳐도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예수님이 줄곧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율법주의적 동기가 아니라 그들의 ‘범법’에 대해서였다는 사실이다.
동기를 나무라신 적도 있다. 그런데 그분은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려거나 칭찬받으려는 동기에 대해 뭐라고 하셨지 자기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칭찬받으려는 동기를 책망하신 게 아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한다”(마 23:5, 쉬운성경).
화잇 여사 역시 “그들의 경건함을 과시하는 것이 그들의 계속적인 목표였다.”(소망, 612)라고 설명했다. 남이 보는 데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사람들이 선을 행하기를 예수님은 바라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일반적인 생각과 반대로 예수님은 청중이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신앙적으로 헌신하기를 바라셨다. 하나님을 관찰자로 모시는 것이야말로 위선을 막는 해독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설교에서 중요하게 다룬 문제는 다름 아닌 이것이다. 바로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전하 말씀을 생각해 보자(마태복음 6장). 그분은 다음과 같은 레시피를 알려 주신다.
위선자가 되지 않고 의를 실천하는 방법
·의로운 행동이나 신앙적인 행위를 하나 고른다(자선, 기도, 금식 등).
·그것을 남이 모르게 은밀하게 실행한다.
·결과 : 하나님만 그것을 아시고 거기에 따라 보상하신다.
·아버지 대신 다른 사람에게 보상을 받고 싶다면 ‘외식하는 자가 되는 법’을 참조할 것. 종교적 의무를 최대한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맺는 말
여기서 제안한 새로운 접근의 핵심은 이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주의를 가장 심각한 종교적 문제로 다루셨다면 율법 준수(물론 동기가 나쁜 경우도 있지만) 자체가 공격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훨씬 강도 높게 책망하신 부분이 ‘외식’에 관한 것이라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은 ‘범법’과 ‘불순함’이다. 어떤 패러다임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책망에 가장 잘 들어맞는지 복음서를 읽고 자문해 보라. 필자가 제안한 패러다임으로 다가간다면 ‘내가 혹시 율법주의자나 바리새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피해망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율법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망상에 맞먹게 예민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위선에 대해 그리고 범법에 대해 그래야 할 것이다.
이제는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중요한 논제로 부각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여러 세기 동안 율법주의가 주요 쟁점으로 취급되었다. 우리의 삶과 교회에서 율법주의가 문제였다면 당연히 그것을 자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구원받으려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보다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율법을 범하는 사람을 더 많이 목격했다. 율법주의보다는 위선의 문제가 더 심각한 형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2,000년 전만큼이나 오늘날에도 매우 의미가 크다.
조지프 올스타드
재림교회 국제대학원(AIIAS)과 앤드루스 대학을 졸업했다. 아내, 세 딸과 함께 미국 몬태나에 살고 있다.
1. 유대의 바리새인 모두 외식하는 자라고 일반화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물론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사이드바1
고릴라를 보셨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것은 눈에 보인다고 생각한다.”라고 심리학자 아리엔 맥은 말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실시한 실험 결과를 보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실험에서는 두 그룹에게 농구 경기를 시청하게 했다. 한 그룹에게는 팀 사이에 오고 간 패스 횟수를 세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그룹에게는 패스 횟수를 세지 말고 경기만 보라고 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고릴라 복장을 한 남자가 난데없이 코트 안에 들어가 5초 동안이나 눈에 띄도록 머물렀다. 경기만 본 그룹은 경기를 방해한 고릴라를 쉽게 인식했다. 그런데 패스 횟수를 세던 그룹의 절반 이상은 고릴라를 인식하지 못했다. 연구원이 실험 집단에게 물었다. “화면에서 경기장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 못 봤나요?” 그들이 못 봤다고 하자 “고릴라 못 봤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뭐라고요?”라고 되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패스 횟수를 세라고 지시받은 그룹은 특정한 과제를 향해 자신의 관심 범위를 좁혔고 두뇌에서는 공, 사람, 동작만 인식하도록 단순화된 시스템 가동되었다. 작업 능률의 극대화를 위해 단순화된 두뇌 시스템에서는 고릴라와 같이 관계없는 대상은 걸러지고 보려고 한 것만을 보게 된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는 기대감으로 성경을 읽거나 특정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성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을 때이다. 율법주의에 민감한 사고방식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복음서에서 율법주의만 짚어 내려다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고릴라 즉 ‘위선’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에서 인용하고 분석한 것임. Laurence Gonzales,
사이드바 2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고 율법을 지키려면
앤서니 R. 켄트
물론 반(反)율법주의가 해결책은 아니다. 반(反)율법주의는 율법주의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기독교인들을 위선자로 만든다!
해답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그분은 십계명을 모두 지키셨지만 단 한 번도 율법주의자나 반(反)율법주의자나 위선자가 되신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다(고전 10:1~4). 그분께서는 이 계명에 따라 사셨고 오늘날까지도 지키고 계신다!
십계명의 절반 이상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 사람을 율법주의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또 살인, 간음, 거짓말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내거나 도둑질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결코 율법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모를 공경하는 어린아이 역시 율법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계명만 남는다. 바로 안식일이다.
안식일에 쉬고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는 그리스도인을 율법주의자로 규정하고, 일주일 내내 바로의 멍에를 메고 벽돌을 찍어 내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부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로움 가운데 쉼을 얻는 것이 더 좋다. ‘순종하는 사람’으로 불리는 것은 죄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앤서니 R. 켄트 대총회 목회부 부부장이다.
발문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