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파일
제럴드 클링바일
만만치 않은 환경에서 도덕적 딜레마를 헤쳐 나가려면?
우리는 옳고 그름의 경계가 모호한 세상에 살고 있다. 정치나 경제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조차 투명성에 대해 논하며 도덕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도 탐욕, 독선, 권력욕 그리고 윤리적 절대성의 노골적인 무시는 더 많이 눈에 띈다. 수년간 정부의 규제를 교묘하게 벗어나 절차를 무시하고 성과에만 치중하는 거대 기업들은 또 어떤가? 메시지는 분명하다. 걸리지 않는 한 계속하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윤리적 도전과 유혹이 비껴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마음을 다해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결심하면 문제의 양상이 더 복잡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안식일 문제를 놓고 주님께 충성할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지를 고민하는 수천만 재림 신자들이 그렇다. 뇌물 수수가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는 곳도 있다. 때때로 인생은 복잡하고 골치 아프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성경에 절대적으로 부합하는 길을 찾으려고 씨름할 때가 적지 않다.
윤리와 성경
일반적으로 윤리는 개인이나 단체의 행동을 좌우하는 도덕적 원칙이라고 알려져 있다.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데 이것은 필수적이다. 주변의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사는 데 길잡이가 되는 원칙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원칙의 뿌리를 성경에서 찾는다. 사실 기독교인에게 윤리란 신학에 신발을 신긴 것이다.
윤리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개인 그리고 개인과 집단 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법률이나 분명한 진술을 떠올린다. 그런데 윤리적 원칙의 주요 원천은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운다.
성경 이야기에는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사례 연구가 가득하다. 윤리를 체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원칙들을 익히고 실제 삶에서 그 원칙이 적용된 사례를 보면서 더욱 효과적으로 윤리를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열 개뿐인 반면, 그분의 백성이 윤리적 문제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수백 가지도 넘게 진술되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승리를 목격하고 그들이 쓰러질 때는 고통을 함께 느낀다.
인생 역전 스토리
창세기 37~50장에 나타난 요셉의 이야기는, 개인 혹은 집단으로서 윤리적 도전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될 다양한 경험을 집대성한 태피스트리와 같다. 요셉의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은 어느 날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간다. 이집트에 도착한 요셉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빛의 속도로 승급하여 마침내 보디발의 모든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 그러나 요셉의 기개는 보디발의 아내가 보내는 성적 추파와 노골적인 유혹으로 발목이 잡힌다(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여자의 존재감을 가늠케 하는 단서가 된다.). 번번이 거절당한 그녀는 요셉에게 강간죄를 뒤집어씌운다.
감옥에 갇힌 요셉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요셉의 탁월한 업무 수행 능력을 알아본 간수는 그에게 감옥 관리를 맡긴다. 이후 이야기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자신이 꾼 두 가지 꿈을 이집트의 술객과 박사들이 해몽하지 못하자 파라오는 죄수인 동시에 간수의 오른팔이던 요셉을 불러낸다. 설득력 있는 해몽으로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된다.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할 만한 인생 역전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그 시점부터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 백성 곧 가나안에 살던 야곱 가족의 이야기와 맞물리기 시작한다. 극심한 흉년으로 그의 형제 10명이 이집트에 식량을 구하러 왔을 때, 요셉은 자신의 과거와 맞닥뜨린다. 이야기의 나머지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요셉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겪은 윤리적 딜레마와 도전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중심의 윤리를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될 그의 네 가지 중요한 순간을 살펴보자.
위기와 성장
성장이란 위기나 장애물을 성공적으로 극복해서 얻는 결과라고들 말한다. 그 ‘시험’이 어떤 모양새를 띠든지 간에 선택을 잘해야 더 안전하고 당당해질 수 있다. 성서학자들은 요셉 이야기에 나타난 시험의 동기에 대해 오랫동안 주목해 왔다. 그의 이야기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드리도록 명령받은 아브라함의 시험을 답습하는 듯하다(창 22장).1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은 철없는 고자질쟁이로 묘사된다. 사이가 벌어지고 편이 제각각인 분열된 가정에서 그는 부모의 편애를 받으며 자랐다.
형들이 그를 노예로 팔았을 때 그의 세상은 와르르 무너졌다. 보디발의 노예로 전락한 그가 지도력을 발휘할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창 39:2) 하신다는 사실을 감지한 보디발은 신참 노예의 잠재력을 믿고 그를 집안 관리로 임명한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의 일부이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이런 변화는 두 차례 더 반복된다.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이 복 주셨다는 말이 여러 차례 언급되기 때문이다(2, 3, 5, 21, 23절). 그분은 거기 계셨다. 비록 보디발의 노예가 머무는 장소였다 해도 말이다.
요셉 이야기에서 시험의 주요 초점은 창세기 42~45장에 집중된다. 여기서는 요셉의 형제가 시험받는다. 셈족어에서 ‘시험’을 뜻하는 주요 동사인 ‘바칸’이 창세기 42장 15~16절에 등장한다. 요셉이 형들을 알아본 후에(8절) 그들이 가나안의 첩자인지 확인하겠다며 공식 절차를 내세워 시험하는 대목이다.
흥미롭게도 시험은 각기 다른 모양과 형태로 나타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리아 산에서 시험받았고(창 22장), 이스라엘 백성의 인내심은 광야에서 시험받았다.2 단련되는 경험은 또 다른 ‘시험’의 경험들과 연결되어 요셉의 믿음과 성실을 향상시켰다. 창세기 42장에서 철없는 고자질쟁이가 성숙한 지도자로 변했다. 위기와 시험은 성장과 변화를 일으킨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다.
성경은 요셉과 형들 모두 시험과 위기 덕분에 성장했다고 말한다. 형들은 동생이 어떻게 없어졌는지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정체에 관하여는 꽤 진지하게 대답했다(13절).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잘못을 인정한 것과(21절) 두 번째로 이집트에 와 있는 동안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간청한 것(창 44:18~34) 모두가 성숙과 성장의 증거이다.
유혹과 승리
인류의 타락과 더불어 시험은 인간을 끊임없이 따라다닌다. 시험은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골자를 이루고 있다. 요셉이 보디발 집안의 2인자로 급상승한 이후, 어느 날 그는 “나와 동침하자”(창 39:7, 12)라고 노골적인 유혹을 받는다. 히브리에서 이 말은 육체적 관계를 나타낸다. 요셉의 답변은 의미심장하게 길다. 그는 안주인의 제안에 거절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주인의 신뢰를 저버리는 짓이다. 또 그의 설명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죄란 인간관계뿐 아니라 무엇보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침범하고 비틀어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절)라는 말에서 그는 고백과 진술에 종종 사용되는 용어를 쓰고 있다(왕상 8:47; 대하 6:37; 렘 14:20).
죄는 모든 종류의 관계를 파괴시킨다. 창세기 39장에 암시된 죄, 즉 간통을 저지른 사람은 구약법에 따르면 돌에 맞아 처형되어야 한다(레 20:10; 신 22:22).
유혹에는 대응과 결단이 필요하다. 유혹에 빠지든지 아니면 유혹을 이겨 내고 승리를 거두든지 둘 중 하나이다. 요셉이 “날마다”(창 39:10) 끈기 있게 거절하고 유혹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옷을 잃어버리기로 결심한 것은, 죄가 개인적•집단적 관계에 끼치는 파괴력을 인지하고 있는 동시대 독자들에게 위대한 본보기가 된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달아나는 게 사회문화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런 행동으로 얻는 치욕이 무엇인지 서구 독자들은 대부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죄의 영향으로 관계가 파괴되는 길보다 굴욕을 얻는 길을 택했다. 이렇게 요셉은 자신보다 하나님의 명예를 높였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유혹에 대한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왔을 때 요셉이 형들을 상대하는 데에도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집트의 총리로서 혐의를 조작하여 형들을 처단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의 절대 권력으로 충분히 원한을 갚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형들을 시험하는 동안 복수나 원한을 갚는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슬프지만 교회 안팎에서 권력 남용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특히 권력이 어느 한곳에 집중되면 어떤 지도자라도 강렬한 유혹을 받는다.
이런 현실적인 유혹을 이겨 낸 것이 요셉의 특징이다. 이것이 성서적 지도자의 표본이다. 과부, 고아,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력의 횡포를 이스라엘과 유다의 선지자들이 종종 크게 나무란 점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사 1:23; 10:2; 렘 7:6; 22:3; 겔 22:7; 슥 7:10).
나의 것과 당신의 것
물질은 건전한 관계에 장해가 되기도 한다. 요셉이 자신의 특별한 옷을 과시했기 때문에 형들에게는 뿌리 깊은 증오와 질투가 생겼다(창 37:8, 11). 여기 사용된 소유대명사가 그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유다는 그를 “우리 동생”(26절)이라고 말했고 그 결과 요셉은 노예 상인에게 팔려 목숨은 건졌다. 이후 아버지 야곱에게 건네준 피 묻은 옷은 “요셉의 것”, “아버지의 아들의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내 것’과 ‘네 것’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서도 볼 수 있다. “나와 동침하자.”라는 말에서 내포된 것은 ‘나’, ‘내 것’이 전부이다. 그에 반해 요셉은 자신의 주인과 하나님을 가리키며 ‘그의’, ‘그분의 것’(his)을 강조한다. 이 싸움의 한가운데, 즉 자기중심적인 변덕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죄에 대한 승리 사이에 하나님이 서 계신다. 요셉의 스토리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거듭거듭 그에게 인자를 더하시고(창 39:21) 그와 함께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23절).
‘나의 것’과 ‘당신의 것’은 이기심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삶의 일부를 차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다. 나타나시든 숨어 계시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관여하신다. 십자가 사건 이후로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른 체할 수 없다. 자신이 세상에 관여하고 있음을 이 세상에 똑똑히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림과 과정과 목적과 최종적 전망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계신다.
하나님이시라
“요셉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누군가 물었다. 하나님의 임재는 복합적이다. 그분은 숨어 계신다. 착한 사람 혹은 비교적 괜찮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게 용납하시는 분도 결국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어려운 상황에서 구해 주지 않으신다. 자기 자녀를 학대와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지도 않으신다. 때때로 그분의 임재(그리고 은혜)는 잠정적이며 요셉을 통해 소개된다.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과 파라오의 감옥에 은혜를 베푸셨다. 꿈을 통해 삶과 죽음을 통보하시는 그분의 목소리는 고요하다(창 37, 40~41장). 요셉은 이 중요한 개념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목소리를 수차례 들을 수 있었다(창 41:16).
창세기 45장 5~8절에는 요셉 이야기의 신학적 사상이 잘 드러난다. 마침내 요셉이 형들에게 정체를 드러내고 형들이 놀라고 두려워서 말을 잇지 못할 때, 그는 “하나님이시라”라고 나직이 말한다.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결국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그리스도인의 생각을 나타낸다. 사람들이 일을 꾸미고 계획하며 잊어버리고 기억해 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종살이, 시련, 투옥, 세간의 주목, 최고의 신분 상승,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무대 뒤에서 조용하고 능숙하게 일하셨다. 언제나 가족, 민족, 세상을 보존할 길을 찾아내셨다. 요셉을 통해 하나님은 파괴의 수단을 건설과 유지의 수단으로 뒤바꿔 놓으셨다(잠 16:4, 7; 19:21; 롬 8:28).
흥미롭게도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우리는 그분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역할이 대부분 미미하기 짝이 없음을 발견한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이 기여하고 있다고 단 한 번도 강조한 적이 없다. 그는 늘 하나님과 함께 출발한다. “요셉은 요셉보다 하나님에 대해 더욱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3라고 어느 주석가는 말했다.
“하나님이시라.” 이 고백은 우리의 최선조차 성공에 기여하는 바가 별로 없다는 건강한 인식이다. 무대 뒤에서 하나님께서 조용히 활동하시고, 안내하시고, 지도하시고,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요약
요셉의 이야기는 한 폭의 경이로운 그림이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도덕적 실패와 승리를 들여다본다. 그 그림을 통해 위기는 성장을 위한 촉매제이며 시험을 통해 승리 또는 패배에 이른다는 것을 확인한다. ‘내 것’과 ‘네 것’에 관한 문제는 진실에서 눈을 떼게 만드는 곁가지일 때가 많다는 사실을 그 그림에서 깨닫는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나 자신 너머를 볼 수 있게 하는 더 큰 공동체 안에서 품격의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게 진실이다.
결국 “하나님이시라”라는 관점이 모든 계획, 활동, 결정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삶의 일부가 되실 때 우리는 자유를 얻고 자아를 잊어버릴 수 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하늘의 가치를 퍼뜨릴 수 있다.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며 매 순간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를 바라고 있다.
1. Gregory S. Smith,
2. 민수기에 이 시험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3. V. P. Hamilton,
사이드바
이야기에서 발견하는
윤리적 원칙들
‘미성년자 관람 불가’ 등급이 종종 포함된 구약의 이야기에서 적절한 윤리적 원칙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다음 6가지 원칙들을 제안한다.*
1. 이야기 전체를 살피라.
요셉이 응석받이 아이에서 용감하게 상대를 용서하는 인물로 성장했음을 기억하라.
2. 적절한 정보를 통해 일관성을 찾아내라.
성전의 진설병을 먹고 생존을 위해 거짓말한 다윗의 도덕적 딜레마에 집중하기보다 놉의 제사장 아히벨렉을 기억하라. 그는 하나님의 지도를 받은 뒤 다윗에게 진설병을 제공했다(삼상 22:10).
3. 문맥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라.
서술된 내용에 의미를 너무 많이 부여하지도, 너무 적게 부여하지도 말라.
4. 시간의 흐름과 인물의 변화에 유념하라.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 13:14)이라고 불린 것은 일부다처 결혼과 간음을 행하기 전이었다.
5. 십계명과 연결하여 생각하라.
성경 이야기에는 십계명과 조화를 이루며 살지 않는 주인공도 등장하지만 그들을 두둔하지는 않는다.
6. 그리스도의 모본을 생각하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은 다소 상투적이지만 분명 도덕적 삶의 시금석이다.
*Ron du Preez, “Delights and Dangers of Using Stories for Sermons: How to Interpret and Apply Biblical Narrative,”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