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저래티
재림교회 교육의 거인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모험은 봉사였다
라엘 시저
유명한 예언의 소리 합창단의 콘트랄토 솔로 가수 델 델커,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라시에라 대학교 명예 총장인 로렌스 T. 저래티, 아서 맥스웰의 걸출한 아들인 편집자 로렌스와 교회 역사가 머빈, 이들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 재림교회의 탁월한 선교사이자 교육자인 토머스 싱클레어 저래티를 자신의 선생, 멘토, 아버지로 모셨다는 것이다.
토머스 저래티의 모험
1936년 12월 31일에 금문교 타워 꼭대기에 기어 올라가 이듬해인 1937년 1월 1일에 내려온 젊은 시절 저래티의 패기는, 모험으로 가득한 그의 일생에 대한 예견이자 준비였다. 그런데 그의 선교 모험은 훨씬 더 의미 깊었다.
그는 중국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아사마 마루호를 타고 상하이로 갔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일본이 중국 해안을 점령하는 바람에 버마(미얀마)로 이동해야 했다. 도시 양곤이 폭격받자 저래티와 가족은 다시 중국 중부로 날아갔다. 거기서 그와 아내 하젤은 충칭 인근, 숭파오 재림교회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의 흥미로운 모험은 배와 비행기 여행, 공수 작전과 피난에 그치지 않았다. 숭파오에서 대학 업무 책임자로 일했던 저래티는 쌀을 화폐로 쓰는 법도 배웠다.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로 미화 1달러의 환율이 중국 20달러에서 5만 6,000달러까지 폭등하자 저래티는 중국 달러의 가치를 예측할 수 없었고 사실상 쓸모가 없는 화폐 대신 쌀을 학비로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정했다.
숭파오에서 그와 하젤은 중국어로 수업을 가르쳤다. 그들은 버마에 머무는 동안 중국어를 배웠었다. 그들은 학생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학교 경험의 현장이자 동료 칼 커리, 제임스 웡, 허브트 류와 함께 복음 사역을 위해 안수받은 장소인 충칭을 각별하게 여겼다.
전쟁이 끝나 캘리포니아에서 휴가를 보낸 다음, 로널드 더글러스가 태어나 숫자상으로 네 명이 된 저래티 가족은, 난징 인근 치우투쳉에 재림교회 대학을 세우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둘째 아들, 에드윈 맥비커가 중칭에서 태어났지만 전쟁 때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아기 때 목숨을 잃고 상하이에 묻혔다.
치우투쳉에서 저래티의 인생 드라마는 계속 이어졌다. 새 건물 몇 채를 짓고 강력하게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가 있는 곳으로 마오쩌뚱의 공산당이 이동을 시작했다. 가족은 양쯔강을 따라 상하이로 내려갔고 그 뒤 홍콩으로 피난했다. 거기서 토머스는 청수만에 있는 재림교회 대학을 맡아 달라고 요청받았다. 오늘날 홍콩 재림교회 대학의 전신이다.
중동으로
1951년, 토머스는 중동 대학 학장을 맡아 레바논 베이루트로 이동해 달라는 대총회의 초청을 받아들였고 즐겁게 책임을 완수했다. 한동안 그는 중동지회 교육부장으로 일했고 그 지역 모든 국가를 여행하면서 교육 사업을 세우고 대학생을 모집했다. 베이루트에서 이란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놓쳐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진 일도 있다. 그는 화가 난 채로 다음 비행기를 탔는데 앞서 놓친 비행기가 테헤란에 착륙하다가 충돌하여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넷째이자 막내인 캐슬린이 베이루트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병원에서 태어났다. 마침내 딸을 얻게 된 가족은 크게 기뻐했다.
학업에 정진하다
이어진 휴가 동안, 토머스는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석사 과정 둘을 거쳐 교육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자격을 갖춘 그는 1960년, 대총회 교육부 고등 교육 담당 부부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수락했다. 특별히 보람을 느꼈던 <저널 오브 애드벤티스트 에듀케이션>을 편집하는 일 외에도 그는 세계 곳곳의 본 교단 고등 교육 기관을 방문하면서 전문 학교로 인가받도록 도왔다. 또 재림교회 대학 교수들이 4년마다 분야별 학술회의를 개최는 모임도 성사시켰다.
1970년에 그는 앤드루스 대학교 교육대학(이후 교육학과) 학장이 되어 박사 학위 과정을 개설했다. 이는 교단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고 덕분에 세계 선교가 강화되었다.
저래티는 1977년, 공식 직임에서 은퇴하여 캘리포니아 앵귄에 거주하면서 연로한 부친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모교인 퍼시픽 유니언 대학과 인근 위마 대학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그는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주로 나파 밸리 야외에서 그 일을 했다. 그의 가족은 적어도 200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은퇴 생활을 보내며 드라마 같은 모든 세월을 돌아본 그는 세상을 재해석하고 예술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1982년부터 1985년까지 하와이합회의 교육 관련 지도 감독관으로 자원봉사 했다. 또 하젤의 회사에 있으면서 그는 하와이를 방문하는 가족들을 즐겨 접대했다.
드라마 같은 건강 이야기
하와이에 있는 동안 토머스는 결장암 진단을 받았다. 매사추세츠로 가서 의사 아들 론과 그를 돌보는 딸 캐슬린과 가까이 있었다. 그들은 그를 뉴잉글랜드 메모리얼 병원에 데려가 뛰어난 외과의 알랜 보크에게 수술받게 했다. 굴복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드라마가 수술에서 다시 한번 발생했다.
보크 박사는 수술을 마친 뒤 수술이 매우 어렵고 복잡했다며 토머스 저래티가 몇 달을 더 생존할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집도하는 보크가 의뢰했던 하나님은 저래티가 일생 동안 의뢰했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저래티의 삶을 연장시켜 주셨다. 저래티는 이후 거의 30년 동안 복된 삶을 누렸다. 그 기간에 큰아들 로렌스 토머스 저래티가 총장으로 부임한 애틀랜타 유니언 대학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고 원동지회 교육 정책 핸드북도 만들었다.
로렌스가 라시에라 대학교 총장직을 수락한 이후 저래티는 아들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거기서 중동 친교 모임을 만들어 중동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도왔다. 2001년에 아내와 사별한 뒤 저래티는 레바논에 있는 중동 대학교에 가서 1년을 가르쳤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86세였다! 중동에서 일정을 마친 후에 저래티는 또다시 자신의 선교 모험을 이어 가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라시에라 대학교는 그의 연구에 대한 보답으로 두 가지 역할을 그에게 맡겼다. 세계 곳곳에서 온 대학원생들의 기숙사인 글래드윈 홀에서 그는 3년 동안 사감을 맡았고 교육학과 겸임 교수가 되어 논문으로 고민하는 중국인 박사과정 학생들을 돕는 즐거움을 누린 것이다.
다시 은퇴
그가 처음 은퇴한 지 30년이 지난 후, 저래티는 94세의 나이로 다시 은퇴했다. 생의 마지막 5년간 그는 중국어 성경을 읽고, 자신의 성경 연구에 기초한 시를 가끔 지었으며, 자전거를 타고 운동하고 그림도 그렸다. 그 외에도 린다 밸리 캐어센터(그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다.)에서 매주 10회 강연도 했고 성경을 가르치고 주민을 위해 시 낭독회를 열곤 했다. 그는 2013년 12월 23일에 별세했다.
젊은 날 금문교를 기어오르고 전쟁과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은 숱한 스토리의 주인공이지만 그것이 그를 기억하게 하는 주요인은 아니다. 오랫동안 <저널 오브 애드벤티스트 에듀케이션>의 편집자로 일했던 비벌리 럼블이 그의 인생과 공헌의 진실을 가장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한 다음의 말에 우리가 그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나타나 있다. “재림교회 교육의 거인.”
라엘 시저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며 영적 거장들을 존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