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나의 힘
1904년 미국의 작곡가 윌 라마르틴 톰슨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예수는 나의 힘이요’라는 찬미가로 표현했다. 그가 작사∙작곡한 이 노래에는 2천 년 동안 수백만 그리스도인이 전해 온 소중한 감격이 드러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값진 공적을 통해 중재자가 되시므로 이 땅의 모진 세파에서도 우리가 하늘의 삶을 맛볼 수 있다는 감격인 것이다.
이번 달 커버스토리에는 세계 곳곳의 재림교인이 보낸 간증을 소개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그들만의 방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을 사랑한 어느 고등학생의 진심 어린 간증부터 쓰라린 사별의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깨닫고 감사한 두 여성의 이야기까지 모두가 뜨거운 언어로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의 노래를 통해 세 천사의 기별에 나타난 영적•정서적•도덕적 관점들을 우리는 보다 잘 이해하게 된다(엘렌 화잇, 마지막 날 사건들, 199~200).
– 편집진
나를 만족시키시는 분은 오직 예수
시셀리시실레 은들로부
부모님은 안식일마다 우리에게 교회에 나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한 번도 교회에 간 적이 없다.
예수님 없는 교회에서
나는 15살 때 침례를 받았다.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나면 삶에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이라 기대했다. 죄인인 내가 자동으로 성인군자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20년 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드렸지만 하나님을 잘 알지는 못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그리스도인 생활에 정착하지 못했다. 패션과 파티에 정신이 팔렸다. 외모에 집착했고 몸을 꾸미는 데 돈을 많이 썼다. 경건하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행복하고 활기가 넘쳐 보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죄책감 때문에 항상 마음이 괴로웠다. 공허하고 외로웠다.
교회 일을 하면 마음의 평안과 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열심히 교회 활동을 했다. 마음의 평안이 절실했으나 열심히 활동할수록 더욱 공허해졌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내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착한 행실이 나를 의롭게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변화
2008년 10월, 손님 한 분이 우리 교회에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는 내 과거와는 무관하게 나를 의롭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죄를 뉘우치는 죄인인 내가,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셨던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죄책감과의 싸움도 이제 끝이다. 예배가 끝난 후 생전 처음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곧 <생애의 빛>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경도 읽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로마서 8장 1절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확증을 읽고 얼마나 기뻤는지 아직도 그 느낌이 생생하다.
내 가장 큰 소망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었다. <생애의 빛>을 연구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지난날 나의 죄를 모두 처리해 주셨을 뿐 아니라 정결한 마음을 주셨으며 순종의 삶을 살도록 내게 능력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원한 만족을 주지 못할 패션과 파티에 집착하던 나를 구해 주신 하나님께 나는 지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그분께 굴복하는 삶을 사는 방법을 여전히 매일 배우고 있다.
삶에 대한 염려로 믿음이 시험당할 때도 있다. 내가 넘어지더라도 내가 믿고 의지하는 그분이 계시며 언제든 그분께 다시 돌아갈 수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분의 은혜는 항상 차고 넘친다. 그분께서는 내게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시며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신다.
시셀리시실레 은들로부
요리와 피아노 연주가 취미이며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채식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내 서류철을 갖고 계신 예수님
앨러리스 콜리
‘심판의 저울’이라는 촌극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천사처럼 보이는 존재 앞으로 한 명씩 나간다. 그리고 일생의 행적이 적혀 있는 서류철을 천사에게 건넨다. 서류철에 빨간색 종이가 많을수록 나쁜 행동을 많이 한 것이다. 천사는 재빨리 서류철을 살핀 후, ‘좋음’에서 ‘나쁨’까지 눈금이 표시되어 있는 저울에 올라가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내세워 보지만 저울은 어김없이 ‘나쁨’를 가리키며 퇴짜를 놓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신용 카드로 천사를 매수하려고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빨간색 종이로 가득한 서류철을 천사에게 내밀었다.
그때 예수가 나타났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적인 서류철을 천사에게 건넸다. 놀란 천사는 마지막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앗, 미안합니다. 그분께서 당신과 함께 계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가 그 사람 대신 저울에 올라가자 마침내 저울은 ‘좋음’을 가리켰다. 그러고 나서 예수와 그 ‘하나님의 자녀’는 행복한 모습으로 ‘의로운 사람’ 쪽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의란 한마디로
이 촌극은 의의 개념을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다. 개념이나 성경 말씀이 4차원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에게 의란 관계 그 자체이며 일상에도 영향을 끼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14~15절을 살펴보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죽으면, 우리 모두 죽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상징적으로 죽는 것이라면, 그분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 역시 부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창조이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행동은 단지 비정상적인 일이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 형성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내가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충분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안도의 한숨을 쉴 만한 일이다. 새 창조는 나의 착한 행동을 통해 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좋으신 그분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사람들은 자신이 더 많은 일을 하기 때문에 더욱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기의 서류철을 내미시고 나 대신 저울에 올라가시도록 옆으로 내가 비켜섰기 때문에 기쁘게 성공을 누리고 있다. 그분께서 자기의 의로 내 자리를 가득 채워 주신다. 아! 정말 기분 최고다.
앨러리스 콜리
바하마 나소에 산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항상 그분을 위해 일하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분의 의로 되찾은 평화로운 해변
라 베르네 타바레스
내 고향은 안티구아이다. 섬의 해변을 어루만져 주는 유리처럼 맑은 바닷가를 바라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허리케인을 만나면서 해변이 두려워졌다. 높은 안전지대를 벗어난 사람을 누구든 가차 없이 집어삼킬 것처럼 바다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렸을 때는 사나운 물에 빠지면 어쩌나, 유황이 가득한 바다에 빠져 죽으면 어쩌나 수도 없이 생각했다. 성공회에서는 착하게 살지 않으면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벌 주시는 분이라고 배웠다. 정말로 하나님이 무서웠다.
일요일마다 신부님은 나의 부정함을 납득시키려 했다. 마치 내 모든 죄를 알고 있는 것처럼. 절대로 나는 불바다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항상 지옥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동안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죽으면 영원히 불에 탈 것 같아 두려웠다. 성경 말씀을 배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교리, 예배식, 일부 성경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성난 파도 때문에 그토록 바라던, 그토록 필요로 하던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다.
놀라운 변화
나는 뉴욕으로 건너가 재림교인을 한 분을 만나고 나서 재림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 속아 왔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그러면서도 기쁨으로 압도된 내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의로우신 예수님을 어떤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일부 재림교인의 삶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혼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이제 예수님의 의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의 실망과 좌절 역시 극복해야 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의 삶도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막상 침례를 받기로 결심하니 옳은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과의 경험에 관계없이 결정해야 했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죽는 그 순간에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 그분의 의는 참으로 완벽하다! 마치 바닷가에 앉아서 평화로운 일몰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분께서는 빛과 따뜻한 온기로 내게 마음의 평화를 주셨다. 새 땅에서 유리 바다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라 베르네 타바레스
회계 전문가. 2012년 조종사인 남편과 사별한 이후로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두 딸과 살고 있다.
나와 내 결혼 생활을 지켜 주신 분
크레이그 바르도
성인이 되어 잇단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후 재림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어릴 적 친구가 성경을 소개해 주었고, 만약 성경이 교리의 기본이라면 그리스도의 재림 역시 이치에 맞는 것임을 깨달았다.
서서히
새로운 믿음이 생겼다고 실패와 좌절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안식일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내 믿음으로는 내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킬 수 없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왜 내 노력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지 궁금했다. 왜 나는 항상 아내와 아이들과 다투게 될까? 기독교는 나와 내 가족을 방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는 나와 이혼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교회에서 목회부 주관으로 로마서 5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말씀을 듣고 읽을수록 사도 바울이 나를 나약하고 경건치 않으며 죄인인 하나님의 원수라고 묘사하는 것 같았다(6, 8, 10절). 그런데 내 행동의 모든 책임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내가 자백이나 회개하지 않고도, 심지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아도,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고, 예수께서 다시 사심으로 내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놀라운 차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바울은 아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정죄에 이르게 되었는지(18절) 그러나 예수께서 어떻게 상황을 바로잡으셨는지(19절), 모든 사람을 어떻게 의롭게 하셨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생각은 로마서 3장 24절에서의 바울의 주장과도 이어졌다.
내 어깨의 짐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내가 다가갈 때까지 예수님은 기다리고만 있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항상 먼저 내게로 오셨다!
성경을 연구할수록 성경에 나타나는 패턴은 더욱 명확해졌다. 우리가 자백하고 회개하고 심지어 그분을 믿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선물처럼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셨다(롬 5:19; 요일 1:9). 그분께서는 바울이 묘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빌 2:5)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갈 2:20), 우리를 죄의 지배권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빌 2:5).
성경에 나타난 의무와 처벌은 예수께서 감당하셨다. 그분이 이것을 감당하신 덕분에 생기는 유익은 고스란히 우리의 것이 된다. 그분을 믿기만 한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신앙 고백 따위로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더불어 나의 부족함 때문에 은혜 안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다. “내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기 때문이다(고후 3:5). 나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사랑을 가득 채워 주신다. 나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되게 게 해 달라고 나는 기도한다. 나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쉼을 얻는다.
크레이그 바르도
뉴욕에 있는 투자회사의 임원이자 재림교회가 후원하고 있는 선교 단체 가스펠넷 글로벌 미니스트리의 이사이다.
내가 서 있는 곳
샤론 퍼거슨
재림교회 복음 전도자이자 내 남편인 윌리엄 C. 퍼거슨 목사가 2015년 8월 27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 발생 2주 전에 십 대인 두 아이와 나는 서인도 제도의 토바고에서 그리스도의 의라는 제목으로 남편이 전하는 마지막 설교를 들었다. 설교의 한마디 한마디를 통해 우리 가족은 잠시 후 닥칠 일에 대해 준비할 수 있었다. 그때 남편의 설교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 남편의 설교에 힘이 있어. 확실하고 긴박성이 느껴져.’
내일을 위해 준비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었다. 그분은 자신의 심정을 담은 고농축 위로의 양약을 우리에게 조제해 주셨다.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우리가 트라우마를 견디고 여전히 그분을 의지할 수 있기 위해 무엇을 투여받아야 하는지 그분은 알고 계셨다. 남편이 설교에서 강조했고 그이가 사망한 뒤 내 마음에 더욱 와 닿았던 것은,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서 7장 26절에서는 말한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우리가 믿어 왔던 것보다 그분은 훨씬 더 우리에게 가까이 와 계셨다. 심지어 그분께서는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샴쌍둥이보다도 우리와 더욱 가까워져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라는 잠언 18장 24절 말씀에서 아이들과 나는 위로를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되셨고 우리가 그분의 의를 비롯한 그분의 모든 기업을 받을 기회를 주셨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7).
내 고통을 나누신 그분
참 좋으신 하나님! 비통에 잠긴 나와 함께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내 친구가 되신 하나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슬픔을 자기 슬픔처럼 여기는 큰오빠 같은 하나님께 어찌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내게는 소중하다. 남편이 이륙한 지 얼마 안 되어 비상 착륙을 시도하려고 미시간 배틀크릭 공항 위를 빙빙 돌 때, 그 작은 비행기 안에서 영원히 실패하지 않는 조력자로서 남편을 굳게 붙들고 그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신 하나님을 나는 사랑한다.
왜 비행기가 갑자기 땅으로 곤두박질쳤는지, 유일한 탑승객이었던 남편이 왜 죽었는지, 아직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편을 잠에서 깨우실 그날에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 나는 하늘 아버지께 빚진 자이다. 그분은 아버지 잃은 아이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시고 아이들에게 회복과 기쁨을 주시고 아이들이 그분께 영광 돌리며 살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어 주셨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그분을 바라봄으로 변화된 영혼의 풍요가 삶에 넘치게 되었다.
사탄은 알고 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의라는 메시지를 매우 싫어한다. “단 하나의 관심이 만연할 것이며, 하나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의를 비롯한 모든 다른 것들을 집어삼킬 것이다.”(아들과 딸, 259)라고 엘렌 화잇이 서술한 내용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롬 9:28) 라고 사도 바울이 말한 내용을 그는 예의 주시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계시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마음에 받아들이면 그들을 제압하고 있던 장치가 풀려 버릴 것도 사탄은 알고 있다. 마지막 시대에 어떤 박해와 죽음 앞에 놓일지라도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도록 이 기별이 우리를 성숙시킬 것 또한 그는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사랑하고, 감사하고, 회개하며 믿고 겸손하게 굴복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에 반응하기로 결심했다. 이제 내 마음은 온전히 그분을 향해 열려 있다. 내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이며 그분을 위해 바쳐질 것이다. 바울과 남편처럼 나 역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나는 그리스도라는 단단한 바위 위에 서 있다!
샤론 퍼거슨
미시간 주 베리언스프링스에서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호르헤 멘도사 알비르
자신이 어떤 분인지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종종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신다.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 주시고 인간인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 그분은 능력을 보여 주신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그분은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계시는데 이 땅에는 왜 죄악이 판을 칩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겁니까?”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려면 기도할 때마다 응답을 받아야 한다고 예전에는 생각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다.
친구이신 하나님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내가 그분의 친구이며 그분께서는 좋을 때든 나쁠 때든 우리의 친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믿음의 시련을 당하는 사람, 고난과 시련 이후 하나님께서 복 주신 사람의 이야기를 접한다.
삶이 순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자주 찾게 된다. 나도 그랬다. 나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그분과 최고의 관계를 맺었던 것만큼 그분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예수님은 나와 함께하셨고 내가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5분 동안 기도하고, 식사 시간에 그리고 잠자기 전에 한 번 더 기도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나를 일깨우셨을 때 나는 하나님을 정말로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하루 세 번 5분씩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분명 우리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 우리 삶에서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는 것, 그분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든,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든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아는 것 등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이다.
나는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고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연습도 하고 있다. 응답에 관계없이 기도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관계도 시간이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관계 역시 헌신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기적인 기도에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지기를 기도하면 그분은 응답하실 것이다.
진정한 관계에 대해 깨닫게 된 이후에 나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을 내 삶의 첫째로 모시는 법을 나는 배웠다. 그분은 늘 주고 계신다.
호르헤 멘도사 알비르
12학년이며 캐나다 온타리오 주 런던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