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묵상
하나님이 이루시는 의
단순하고, 쉽고, 간편하다
윌리엄 G. 존슨
그 성실한 청년은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밤낮으로 고군분투했다. 자기 몸을 고문하면서 금식하고 기도했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지금까지 저지른 죄를 모두 자백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몇 시간씩 자백했는데도 자다가 무서운 생각에 번쩍 잠이 깨었다. ‘기억나지 않아서 아직 자백하지 못한 죄, 분노한 하나님 앞에서 비난받을 그 죄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몸부림치는 그 사람은 바로 수도사 마틴 루터였다. 그가 의를 찾기 위해 사활을 건 덕택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루터는 당시 교회가 제공한 평안의 길을 전부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하지만 그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을 공부하면서 마침내 열망하던 것을 찾았다.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진술 사이의 연관성을 찾을 때까지 나는 밤낮으로 생각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공의란 믿음을 통해 은혜와 순전한 자비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게 만드는 그 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나는 다시 태어나 천국으로 가는 열린 문들을 통과한 느낌이었다.” 1
루터에게 해방감을 준 깨달음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완전히 낯선 개념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다. 그 대신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신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우리의 선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얻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의의 길이다.
로마서에는 이 영광스러운 보증이 가득하다. 그것은 진정 복음, 즉 좋은 소식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예수님의 가르침
루터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자유의 복음을 발견하기 훨씬 전에 예수님은 그 개념을 강조하셨다. 그분은 바울처럼 논리로 꽉 찬 논증이 아니라 마음을 편하게 하는 단순하고도 심오한 예증과 비유를 사용하셨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 중심의 정교한 신학을 만들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의 계명을 613개로 분류했고 구전되는 전통들을 거기에 추가하여 그 613조항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로 삼았다. 따라서 십계명에 간단히 서술된 안식일 조항 위에다, 허용되는 일과 허용되지 않은 일에 관한 긴 목록을 덧붙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신앙관을 놓고 예수님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산상설교에서 그분은 청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정결 예식에 관한 규칙을 두고 논쟁할 때도 그분은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9)라고 질타하셨다.
예수님이 의의 경지를 아주 높여 버리셨기 때문에 복잡한 의식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제도는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란 살인과 간음 등을 저지르지 않는 것 이상이라고 그분은 가르쳤다. 하나님의 의에는 우리의 생각과 동기까지 포함되므로 미워하거나 욕정을 품기만 해도 율법을 범하는 것이었다(마 5:21~47).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의, 인간의 너머에 있는 의, 유대 종교 교사들이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은 의였다. 이것은 너무 까다로워서 인간이 결코 얻을 수 없는 의, 오직 하나님만이 선물로 줄 수 있는 의였다.
예수님의 비유는 계속해서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심지어 충격을 준다. 그것은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 그분의 비유에서는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온종일 일한 사람과 같은 급여를 받는다(마 20:1~16).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갔는데, 한 사람은 일생 동안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한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증오스런 로마 권력자들의 이익을 챙겨 주고 부정하게 재산을 모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세리이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 바로 옆에 서 있는 세리와 같지 않은 점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반대로 세리는 그저 고개를 떨구고 말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놀랍게도 하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의 기도를 받으신다.
또 다른 비유에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는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모두 잔치에 오기를 거절한다. 임금은 종들에게 사거리에 가서 만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잔치에 데려오라고 명령한다. 잡다한 무리가 새로 초대받았지만 임금은 그들 모두를 위해 예복을 준비한다. 하지만 나중에 임금이 손님들에게 인사할 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그를 연회장 밖으로 내던지라고 명령한다(마 22:1~14).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울과 방식만 다를 뿐 사상은 똑같다. 하나님의 의란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선물을 받는 것이다.
구약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 분명하게 선을 긋고 전자는 행위의 시대이며 후자는 은혜의 시대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그렇지 않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금실처럼 엮여 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말한다(창 15:6). 이 구절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4:1~4)와 갈라디아서(3:6~9)에서 강조했다. 예레미야는 야훼를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라고 부른다. 선지자 스가랴는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환영을 본다. 그는 커다란 도움이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데 그때 위로의 말이 하늘에서 들린다.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내가 네 죄악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해 다른 예를 구약에서 많이 인용할 수 있겠지만 특히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돋보이는 구절이 하나 있다. 이사야 52장 13절~53장 12절에는 고난 받는 종에 대한 강력한 표현이 나타난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3~6).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700년 전에 우리 구주의 사역이 이렇게 요약되어 있었다. 이것은 잃어버린 세상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핵심 계획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의 고난 받는 종께서 직접 우리의 죄와 수치를 짊어지신다.
재림교회 역사에서
각 시대마다 복음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좋아 보였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에게 전할 때와 마찬가지로 복음이 선포될 때는 늘 반대가 있었다. 놀랍게도 재림교회 역사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
초기 재림교회 설교자들은 안식일의 중요성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생각에 복음보다는 율법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설교가 “길보아의 언덕만큼이나 건조하다.”2고 엘렌 화잇이 말할 정도로 그들은 율법에 치중하여 설교했다. 1888년,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대총회 회의에서 드디어 일이 터졌다. 두 젊은 목회자 엘릿 J. 왜거너와 알론조 T. 존스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주제를 제시했다. 이것에 대한 강조가 율법과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한 교회 지도자들은 강력히 반대했다. 왜거너와 존스는 당시 대총회 회장 조지 I. 버틀러와 <리뷰 앤드 헤럴드> 편집장 유라이어 스미스 그리고 총회의 다른 임원들에 대항해 홀로 일어섰다.
사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한 지도자가 그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바로 엘렌 G. 화잇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조언은 거부당했다.
하지만 모든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복음은 가로막을 수 없었다. 1888년 대총회 이후로 특히 글과 설교를 통한 엘렌 화잇의 지도 아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메시지는 서서히 더 널리 더 멀리 확산되어 마침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가르침으로 확립되었다.
엘렌 화잇 여사는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일부를 펜으로 묘사했다.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언급하면서 그녀는 이렇게 진술했다. “자기에게 걸맞는 대우를 우리가 받을 수 있도록, 그분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취급을 대신 당하셨다. 우리를 위해 그분은 받을 필요 없는 정죄를 받으셨고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일, 즉 의롭다 함을 얻었다.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그분이 우리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소망, 25).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언급하면서 그녀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준비하신 옷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이 옷, 곧 자기의 의로 만든 두루마기를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입혀 주실 것이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원하노니 내게서…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계 3:18).
하늘 베틀로 짠 이 두루마기에 사람이 만든 실은 한 올도 섞이지 않았다”(실물, 311).
복음에 대한 재림교회의 논쟁 기간 동안 편집자 유라이어 스미스는 <리뷰> 사설을 연재했다. 의롭다 칭함 받기 위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지만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 자신의 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엘렌 화잇은 편지를 통해 그를 강하게 질책했다. 그의 사설을 읽고 났을 때, 자기 옆에 서 있는 “고귀한 분”이 유라이어 스미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그녀는 진술했다. “그는 원수가 만들어 놓은 덫으로 맹인처럼 걸어가고 있지만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빛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빛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3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엘렌 화잇의 주옥같은 표현 중에서 나는 다음을 가장 좋아한다. “받을 자격 없지만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은 그런 사랑을 절대로 보답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 모든 의심과 불신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예수의 발 아래로 오는 사람에게 영원한 사랑의 모든 보물은 무료이며 영원한 선물이다.”4
한 가지 질문
친애하는 독자들에게 이것을 묻고 싶다. 여러분은 자격이 없지만 기쁘게 받기를 원하는가? 여러분의 모든 의, 모든 일, 봉사, 선한 삶이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더러운 누더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인간의 모든 자랑과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를 놀라운 은혜의 무료 선물로 받겠는가?
1 Roland Bainton,
2 < Review and Herald>, Mar. 11, 1890.
3 Letter 55, 1889, in
4 Letter 19e, 1892, in
윌리엄 G. 존슨
<애드벤티스트 월드> 편집장이었다. 현재는 은퇴하여 아내 노엘린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마린다에 살고 있다.
발문
하나님의 의란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주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