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의 여정
‘성실’이라는 개념은 한 개인, 특히 그리스도인의 생활 습관과 신념 체계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산물이다. ‘성실’이란 상황에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 지속적으로 충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신념과 원칙을 ‘굳게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충실, 헌신, 신뢰도 등이 그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인류의 가장 좋은 이미지가 바로 ‘성실’이다. 가족, 친구, 국가, 하나님께 충성한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과 용기를 얻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선한 동기로 시작해도 실패할 때가 있다. 그래서 그토록 바라는 ‘위대함과 선함’의 정점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한계가 없다. 성실은 하나님 성품의 한 부분이다(출 34:6). 이것으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다.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3).
엘렌 화잇은 성경에서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비난과 박해로 고통 받은 사람들을 묘사하면서도 이러한 사람들의 성실함에 대해서는 칭찬하지 않는다. 단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뿐이다.
“확고부동함에 관한 인간의 이런 모본들을 통해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할 수 있다. 그분은 늘 곁에 계시고 그 은혜는 끊이지 않는다”(행적, 575). 결국 진정으로 성실하신 분은 오직 그분뿐이다.
서아프리카,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차드, 인도, 미국에서 들려주는 신앙 고백을 소개하겠다. 각자가 경험한 믿음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품성과 사랑이 소개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도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신뢰하기 바란다.
– 편집진
역경 속에서도 충성
줄린 듀커슨 카파오
“너는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2009년 8월 19일에는 내 삶과 계획, 내 모든 것이 바뀌었다. 8월 19일이 될 때까지 2주 동안 뉴질랜드에서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의 친정에 다녀왔고, 주말에는 4살짜리 아들과 호주 멜버른의 여성 협의회에서 강연을 하고 왔다. 협의회 동안 두통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충분히 잠을 자고, 약을 먹고 물을 많이 마셨는데도 효과가 없었다.
호주에서 돌아온 후 며칠 동안은 시력 감소, 무감각증, 두통, 탈진, 균형 감각 이상, 식욕부진 등과 같은 특이 증상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8월 19일, 함께 계단을 오르던 동료는 내 오른쪽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다른 증상들을 말하자 그는 당장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시력 검사, 엑스레이, 심전도를 비롯하여 기타 검사들을 해 보았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의사는 뇌졸중이나 급성 종양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검사는 MRI 검사였다. 요란한 기계에 누워 머리를 고정시키고, 시편 23편을 떠올리며 기도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내 삶에 함께하실 것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MRI로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결과가 어떻든 간에 내게 처할 상황을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저녁 8시쯤 되자 응급실 의사가 개인 면담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다발성 경화증입니다.” 드디어 병명을 알았다. 말 그대로 뇌와 척수가 “많이 손상”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울었고, 기도했고, 궁금했다. 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했다. 다시 울었다. 남편 로우루와 두 아이도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 상황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열흘 뒤 극심한 구토, 균형 감각 이상, 근력 저하로 병원에 입원했다. 걸을 수 없었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머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슬픔과 상실감이 몰려왔다. 그때 로우루가 내 손을 잡고 노래를 불러 주고 나와 함께 웃어 주고, 함께 기도해 주었다.
혼란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 상실감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밝은 빛 때문에 눈을 떴는데 걷지도 못했던 내가 병원 침대에서 뛰쳐나와 창문으로 달려갔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보였다! 내 마음에 평안과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이 넘쳤다. 그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한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
그 순간부터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평안이 가득했고, 나를 집어삼킨 혼돈을 다 받아들였다. 보이든 보이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는 상처가 있다고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다.
다시 열심히 살기로 결심한 뒤 의사와 가족과 나는 가장 적극적인 치료 방법을 사용하기로 선택했다. 2009년 8월 어느 날, 6개월간의 화학 요법 치료가 시작되었다. 1차 치료 기간 동안 나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2차 치료 기간 동안에는 남편이 내 휠체어를 밀고 다녔다. 3차 치료 기간 동안 보행 보조기를 밀고 다녔다. 4차 기간에는 목발을 짚고 다녔고 5~6차 치료 기간에는 내 발로 직접 걸었다! 종양학과 간호사들이 일제히 기립 박수를 쳤다.
혼란의 상태와 고통과 좌절로 시작된 여행은 축복과 희망이 가득한 여행으로 끝을 맺었다. 지난 5년 동안 시험 받았던 내 믿음이 급격히 성장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경험하고 내 상처를 알고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정말 많이 좋아졌다. 도전적인 업무 덕분에 성취감을 얻으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며 병의 심각한 재발 방지를 위해 매일 약도 복용하고 있다. 또한 아이들과 신나게 놀며 재림의 소망을 안고 생활하고 있다.
줄린 듀커슨 카파오
테 아로하에 소재한 노아 커뮤니티 서비스 트러스트에서 영업부 차장이자 학습 조력자로 일하고 있다. 뉴질랜드 파머스톤 노스에서 남편인 로우루와 두 자녀(7살 그웬, 10살 그리핀)와 살고 있다.
대세에 흔들리지 않는 성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어요.” 도시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에게 가이드가 배우처럼 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을 노리고 있으니 서로들 잘 챙기세요. 그리고 조심하세요.”
우리는 3주 동안 유서 깊은 건물을 둘러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프랑스어를 조금이라도 배워 보겠다고 더듬더듬 따라 하며 유럽 일대를 여행하고 있었다. 이미 들은 대로 소매치기와 도둑들만 없다면 그곳은 거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마르세유의 소매치기들은 보자마자 지갑을 훔쳐 간다.”는 말을 들었다. 파리에 가서도 지하철, 마트, 심지어 에펠탑 전망대에서까지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마치 소매치기들이 세상 끝까지 쫓아올 것처럼.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집시였다. 그들은 자기 아이들을 떠밀거나, 길을 물어보기도 하고, 건물 계단에서 구걸을 한다. 그들은 동정심을 이용해 사기를 친다고 우리는 경고받았다. 좋은 행동 같지는 않았지만 가능한 한 우리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고 옹기종기 모여 다녔으며 구걸하는 빈손을 그냥 지나쳤다. 우리가 들은 것처럼 집시들은 그렇게 악착같지 않았다. 아기들을 우리에게 내밀지도 않았고 아무도 도둑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집시들이 손을 내밀면 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옆으로 비켜났다.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처럼 행동했다.
샤크레쾨르 성당을 떠날 때쯤, 내 친구 매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내 뒤에 있던 그는 계단에 서서 구부정한 자세로 숄을 걸치고 있는 나이 많은 여성에게 돈을 건넸다. 곧바로 달려온 뒤 그가 말했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어.” 지금까지의 조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아량을 베푼 그의 행동에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매트의 단순한 행동을 보자 토니 캠폴로의 말이 떠올랐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재물을 맡기셨다. 우리가 그 재물을 활용하여 그분께 기쁨을 드리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믿는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후의 심판 날, 그분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는가?’라고 나에게 물으실 것이다. ‘생각은 했지만 그 사람들이 도무지 믿을 만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요.’라고 말한들 내 잘못이 없어질까?”*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공손하게 그러나 비인격적으로 대했다. 하지만 매트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몸을 구부리고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Tony Campolo,
멜로디 로슈먼
캐나다 온타리오 주 해밀턴에 있는 맥매스터 대학에서 성별, 현대 문학, 비폭력 저항을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앤드루스 대학에서는 영어와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우직한 믿음
올렌 네트버그
차드의 베레에 있는 우리 병원에서 나이지리아 쪽으로 오다 보면 카메룬 국경 인접 지역에서 난지르어, 마라바어, 렐레어, 메스메어, 무사예어, 케이라어, 투푸리어, 프랑스어, 아랍어 등으로 말하는 부족들을 지나게 된다.
한 여성이 우리 병원에 왔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아픈 아기를 데리고 왔다. 우리는 신속히 말라리아라고 진단한 후에 정맥 주사로 퀴닌을 투여했다. 그 여성에게는 돈이 없었지만 우리는 하던 대로 무료로 아기를 치료해 주고 엄마와 아기에게 음식도 주었다. 아기는 3일 내내 정맥 주사 치료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나흘간 엄마와 아기가 병원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이 가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느 날 아기 엄마가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나이지리아 북부 일대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인 하우사어로 된 성경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내가 아는 유일한 하우사어로 말을 건넸다. “사누?(안녕하세요?)” 그러자 그녀는 놀라움에 얼굴이 환해지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내 손을 잡고 흔들며 아주 반갑게 “사누, 사누, 사누!”라고 대답했다. 언어가 120여 개 이상인 나라를 상상이나 해 보았는가!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다행히 함께 일하는 사람 중에 나오미라는 여성은 나이지리아에서 수년간 살아서 하우사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나오미를 불러 아기 엄마에게 말을 걸어 보라고 했다. 그제야 아기 엄마의 이름이 나고데라는 것을 알았고 그녀의 놀라운 이야기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차드인이자 난지르 부족인 어느 남성이 나이지리아에 와서 일을 했다. 그는 나고데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부부는 아기를 낳았고 이름을 블레스드라고 지었다. 그런데 극단주의 테러 조직인 보코하람이 차드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매복 공격으로 잡혔다가 가까스로 벌판으로 달아난 남편은 몇 개월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이때 나고데의 낙천주의 성격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무모하리만큼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나고데는 남편이 차드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래서 무모할 정도로 낙천주의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시작했다. 먼저 남편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일단 카메룬으로 건너가 교회 여기저기를 다니며 다음 교회로 이동할 돈을 구하기도 했다. 드디어 차드에 도착했고 난지르 부족을 찾아 헤맸다. 집에서 점점 멀어지자 하우사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우사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 각 마을마다 며칠 동안 머물기 시작했다. 그녀는 켈레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베레에서 42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고 가까운 곳에 난지르 족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수백 킬로를 여행한 방식대로 딸 블레스드와 함께 하우사어 성경을 등에 업고 그녀는 또다시 베레를 향해 42킬로미터를 걷기 시작했다.
아무런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도 무지막지하게 낙천적인 나고데의 믿음과 충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베레에 도착하자 다시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며 시장에서 3일을 지냈다.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얻으면 자신은 먹지 않고 블레스드에게 주었다. 블레스드가 말라리아에 걸리자 낯선 사람이 모녀를 우리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나고데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몸을 추스르기 시작하자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눈에, 블레스드의 눈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고데는 매일 하우사어 성경을 읽었다.
네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 나오미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왔다. 그녀는 나고데와 블레스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나고데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나는 모른다. 그녀가 남편을 만나게 될지 아니면 남편이 보코하람에게 살해되어 아프리카 어딘가에 버려졌는지 또는 나이지리아, 카메룬, 차드에서 여전히 아내와 아이를 찾아 헤매고 다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나고데에게 나오미를 보내신 것만큼은 분명하다. 또 우리가 충성하는 마음으로 블레스드에게 무료로 약을 처방하지 않았다면 그 아기는 아마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을 게 분명하다. 나고데의 낙천주의, 결심, 성실이 블레스드와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
나고데는 무지막지한 낙천주의 성격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것이 곧 성실의 의미라는 데 베드로는 동의할지도 모른다. 나고데는 제대로 된 계획이나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할 만큼 이성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본능으로 그리고 하우사어 성경으로 용기를 얻어서 자신감과 확신 속에 무작정 찾아 나섰다.
엄마와 아이는 잘 먹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낸다. 우리 병원에서 블레스드를 무료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해, 후원자들의 성실함 때문에 가능했던 보살핌에 대해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바란다며 나고데는 나에게 한없이 고마워했다.
그녀의 성실함과 우직한 낙천주의로 정작 내가 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올렌 네트버그
아내 다나와 함께 아프리카 차드의 베레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두 아들 리올과 제인, 두 딸 애디슨과 주니퍼가 있다. 이 부부의 활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다음 블로그를 방문해 보라. missionarydoctors.blogspot.com
성실한 안식일 준수
레이먼드 애디비빅논 훈농크페
성경에서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 다니엘과 세 친구 이야기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게 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특히 베냉 같은 나라에서 안식일을 지킬 때를 포함해서 말이다.
나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자랐다. 2001년 베냉으로 건너가 형들과 함께 그곳에 머물며 학업을 이어 나갔다. 재림교인이었던 작은 형 덕분에 재림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2007년 5월에 침례를 받았다. 재림교인이었음에도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안식일에 입학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사범대에 합격했다. 2009년 11월, 대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베냉 북부 지역인 나티팅구로 떠났다.
나티팅구에서는 안식일에 수업도 하고 시험도 보았다. 교회에 가기 위해 어떻게든 수업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시험을 보는 날에는 교회에 가지 않고 시험을 치렀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면서 교회에 나가다 말다를 반복했다. 교회에 있는 형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들의 기도가 그렇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중반에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도록 허락하셨다. 미적분학 시험이 안식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망설였다. 안식일인데 시험을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기 딸이 안식일을 신실하게 준수하기로 결심했다고 소개한 목사님의 간증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는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 <각 시대의 대쟁투>에 등장하는 개혁가들의 이야기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시험을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비단 이번뿐이 아니라 앞으로 안식일에 치러질 모든 시험까지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학업을 포기할 각오도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하나님의 성령께서 도우셨다. 안식일이 되어 나는 교회로 갔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몇몇 친구가 내게 질문했다. 나의 믿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시험을 치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그분의 능력을 보여 주셨다. 교수들이 지금까지 내가 받은 학점과 똑같은 점수를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기적을 경험한 뒤 나는 하나님께 더욱더 충실하게 되었다. 나티팅구에서 모든 학업을 마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날을 성수하기로 한 내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내게 힘을 더해 주셨다.
하지만 안식일 준수에 관한 도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졸업식이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런데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반의 대표 학생이 되었다. 또다시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안식일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2014년 서아프리카 세네갈에서 통계학을 공부하기 위해 입학 시험을 치를 기회를 얻었다. 안식일에도 수업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친척들은 반대했지만 나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했다. 집 근처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여전히 안식일에도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안식일을 준수하기로 결심한 나는 안식일에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 마지막 시험 역시 안식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선생님들이 내가 다른 날에 시험을 치르도록 허락해 주셨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많은 사람에게 매우 큰 도전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데 겁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깨달았다.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현재 나는 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고, 이전에 안식일에 대한 신념 때문에 내게 실망했던 교수님이 지도해 주신다.
우리 하나님은 놀라우시며 전능한 분이다. 그분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다. 이런 그분을 제대로 믿어 보지 않겠는가!
레이먼드 애디비빅논 훈농크페
서아프리카 베냉에서 수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거저 나눠 주어야 할
하나님의 은혜
페이스 토
말레이시아 산맥에 둘러싸인 사바 언덕 한가운데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이 마을에 가려면 울퉁불퉁한 험로 36킬로미터를 헤치고 강에 도달해야 한다. 강을 건널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건기에는 문제가 없지만 우기에는 수위가 너무 높아 건너지 못한다.
어찌어찌해서 강을 건넜다면 또다시 밤방간 마을까지 험로를 통과해야 한다. 그 마을은 아름답다.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가면 멀찍이 키나발루 산 뒷모습이 보인다.
밤방간 주민은 농사를 지어 근근이 살아간다. 마을에 학교는 하나이며 걸어서 40분 걸리는 이웃 마을 아이들도 이 학교에 다닌다. 밤방간 재림교회 초등학교라고 부르는 이 학교에서는 교사 세 명이 1~6학년생을 가르친다. 올해는 53명이 등록되어 있지만 파종기, 수확기, 우기에는 등교생이 20명까지 줄어든다. 자녀들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동네에서 등록금은 대부분에게 불가능한 사치이다.
지난 13년 동안 에스터 게르버는 밤방간 학교 사업을 성실하게 지원했고 학생들의 변함없는 멘토가 되었다. 에스터는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여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생계 유지만도 벅찼지만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에스터가 교육에 열정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학교 후원이란 교사의 급료나 등록금을 지원하는 재정적인 부분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세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면 단 한 번 도와주고 나서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럼 안녕!’ 하고 끝나서는 안 돼요. 부자이든 가난하든, 배웠든 못 배웠든, 사람들은 존중받아야 하고 공평하고 정당하게 대우받아야 해요. …어디 출신이든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 자신이 하늘 아버지의 왕자와 공주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밤방간 학교 졸업생 스티븐(가명)은 중학교에서 망나니 친구를 만나 그릇된 길로 빠졌다. 가능성이 있는 학생이었지만 학업에 관심이 없었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확신하여 에스터는 스티븐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아. 강요하지는 않을게. 네가 자유롭게 선택하면 돼. 하지만 마지막 학년을 위해 네가 학교를 옮겼으면 좋겠구나. 한번 생각해 볼래?” 스티븐은 학교를 옮겼다.
“처음 몇 달 동안은 계속 졸라댔어요.” 그녀가 그때를 회상했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니 예전 학교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요.” 그러나 8개월 뒤 스티븐은 새 학교에서 자신이 변화된 이야기를 전해 주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 활동의 영적 리더가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하나님이 그 아이를 지도해 주실 거예요.”라고 에스터는 말한다.
“생활 형편과 물리적인 복지를 향상시켜 줄 수 있다 해도 그들이 복음을 접하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학생들의 멘토로 계속 활약하는 에스터는 곧잘 말한다. “내 믿음 때문에 밤방간이 유지되는 게 아니라 밤방간이 내 믿음을 유지시켜 줘요.”
“이제 완전히 지쳤다고 생각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저는 독수리의 날개처럼 솟아오르죠. 하나님은 저와 가족에게 진짜로 복을 주셨어요. 그 복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 주어야 해요. 엄밀히 말하면 제가 뭔가를 거저 주는 것은 아니에요. 되돌아오는 게 훨씬 많거든요.”
페이스 토
싱가포르 엘피조 스튜디오에서 근무하고 있다.
발문
18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공손하게 그러나 비인격적으로 대했다. 하지만 매트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19
아무런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도 무지막지하게 낙천적인 나고데의 믿음과 충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20
처음엔 망설였다. 안식일인데 시험을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