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 생각하라
멀 포이리어
‘전 교인 참여’에 관한 기사를 발람 이야기(민수기 23~24장)로 시작하는 게 생뚱맞아 보일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주로 기억나는 것은 말하는 당나귀이지만 자세히 읽어 보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모압 왕 발락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는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재물을 많이 주겠다고 제안했다. 발람은 수락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만 전하겠다고 주의해 두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그 대신 세 가지 복을 선포한다. 화가 난 왕은 지불을 거절한다.
헤어지기 전 발람은 예언 하나를 보너스로 추가했다. “내가 그를 보나 지금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나 가깝지 않도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서”(민 24:17, 한글킹제임스).
‘왜?’라고 묻는 법 배우기
기획 컨설턴트 사이먼 사이넥은 최근 홍보 개념에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세 단어를 도입했다. 이른바 ‘골든 서클’이라는 배열이다. 동심원의 맨 안쪽 원은 ‘왜’, 그다음은 ‘어떻게’, 맨 바깥 원은 ‘무엇을’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의 생각은 바깥 원에서 안쪽 원으로 진행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은 다음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마지막으로 ‘왜?’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감적인 지도자나 조직가는 생각하고 행동하고 소통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게 그의 요지이다. 말하자면 순서를 거꾸로 뒤집는다는 것이다. 성공하는 리더들은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다시 발람과 발락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둘 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지만 결코 ‘왜’라고 묻지 않는다. 그들이 하고 싶었던 ‘무엇’이란 이스라엘 거민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면 된다고 믿었다. 애당초 이스라엘 백성이 ‘왜’ 거기 와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발락의 좌절과 발람의 양면성이 드러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마지막 예언을 주시는데 거기서 ‘왜’에 대해 설명하신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 영원히 함께할 생각이다. 나에게 계획이 있다.”
사이먼 사이넥의 개념을 하나님께 적용해 보면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성경을 보면 인간의 눈에 비친 하나님의 의사소통 방식은 거꾸로 뒤집혀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제자들은 머리를 긁적거려야 했다. 제자들은 ‘무엇’과 ‘어떻게’에 대해 질문하고 예수님은 ‘왜’에 대해 대답하셨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지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왜’에 대해 말씀하셨다(요 3:16). 우물가의 여인은 ‘무엇’에 묻고 예수님은 ‘왜’ 그런지를 말씀하신다(요 4:26).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성경을 꿰시면서 ‘왜’에 대해 설명하신다. ‘내가 너를 지었기 때문이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히 너와 함께 있고 싶기 때문이다.’ ‘어떻게’에 해당하는 내용은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신 것’이다. ‘무엇’에 해당하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흥분하여 예루살렘으로 다시 뛰어 돌아간다. ‘왜’에 대해 이해할 때 생각과 관점이 바뀐다.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바꾼다.
‘왜’라고 물음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교회는 ‘왜’보다 ‘무엇’을 더 많이 생각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지만 ‘왜’ 그러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을 때가 많다. 다음의 말들이 익숙하지 않은가? “당신은 당신의 구주이신 예수를 알아야 한다”(‘무엇’이다.). “예수를 알려면 교회에 참석하고 채식주의자가 되고 생활 방식을 개혁하고 성경을 더 많이 읽어야 하고…(‘어떻게’이다.). 이 말에는 “그렇게 하면 당신의 삶이 더 나아진다.”(‘무엇’이 된다.)라는 암시가 담겨 있다. 여기에 합류하는 사람도 있지만 관심 없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감격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순서를 거꾸로 바꿔 보면 어떨까? “예수님은 나의 창조주, 구세주, 가장 좋은 친구이므로(‘왜’에 관한 답) 예수님이 곧 오시며 우리와 영원히 함께 살도록 지금 집을 짓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풍성하게 복 주실 것(‘어떻게’에 관한 답)을 믿습니다. 그 예수님(무엇)을 알고 싶지 않나요?” 다른 방법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방법으로는 온전한 회심을 이끌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순서를 뒤집으면 열정, 사랑, 자비, 은혜가 전달되며 사람들은 거기에 반응한다.
생각의 순서를 뒤집어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었던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느 곳에서든지 발견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사람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은 감동을 받아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전 교인 참여
전 교인 참여는 복음 전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열렬히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쉬운 것인데 쉽지 않다. 대부분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관한 ‘왜?’가 이해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안식일에 관한 ‘왜?’를 깨달을 때, 그날은 놀랍도록 기쁜 날이 될 것이다. 예배에 관한 “왜?”가 이해될 때 성도들과 함께하고 싶을 것이다.
‘왜?’를 먼저 생각하면서 미국 메릴랜드의 한 교회가 변화되었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교회가 크지만 불친절하다고 느꼈다. 성도들은 자기가 아니라 남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여러 목회자가 이 문제를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지지부진했고 교회는 활기를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바로 이 ‘거꾸로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천거위원회 기간에 12명가량이 더 친절한 교회 환경 조성이라는 과제를 안고 한 방에 모였다. 따뜻한 분위기가 ‘왜’ 필요한지 생각해 보자고 지도자가 반복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환대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만 자꾸 생각했다. 그러나 지도자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왜?’에 대해 생각하도록 격려했다. “왜 친절해야 할까요? 우리가 왜 여기 함께 모였죠?” 3주 후 드디어 그 ‘왜’에 대해 감을 잡기 시작했다. 그날 그들은 몹시 기뻤다. 성도 12명이 교회를 변화시켰다.
석 달 안에 이 12명은 목회자의 후원 아래 ‘히스 팀(H.I.S. Team)’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에 교인 300명이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히스 팀 멤버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왜) 교회와 교회의 성도들을 돕고(Help), 소통하며(Inform), 지지한다(Support). 한 사람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히스 팀 구성원들은 각자의 재능을 통합하여 갖가지 창조적 방법으로 할 일을 한다(어떻게). 그 결과 무엇이 어떻게 되었을까? 낙심자가 돌아오고, 연이은 전도회를 통해 수침자가 생기고 청소년들이 친구에게 자기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다른 교회의 목회자들이 교회의 변화에 대해 문의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처럼 거꾸로 사고를 시도한 결과이다.
스위스의 마사그노에 있는 한 교회도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교회 신자 수는 6명까지 줄었다. 비전도, 지도력도, 교회 성장도 없었다. 2010년 5월, 가장 어린 목회자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교회를 맡기로 결심했다. 목회 경험은 없었지만 자신이 배운 경영 원리를 기도하며 교회에 적용하기로 했다.
이 젊은 목회자는 사람의 행복을 우선순위로 두었다. 은사에 따라 성도들에게 직분을 맡겼다. 영적인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성도들 간에 더 많이 소통하게 했다. 진심이 담긴 환영의 시간으로 안식일 아침이 탈바꿈했다. 정기 출석 교인이 5명에서 40명으로 늘었고 연령대도 다양했다. 9명이 침례를 받았다. 2015년 5월, 마침내 소그룹에서 공식적인 교회로 자리 잡았다.
분명 주님께서 이런 교회에 복을 주셨다. 그들은 ‘무엇’과 ‘어떻게’로 시작하는 사고에서 벗어나 ‘왜’를 확인한 뒤 ‘어떻게’에 대해 생각했다. 두 교회는 ‘무엇’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성공했다. 사람들은 용기를 얻고 감동받아 함께하며 헌신하게 되었다.
전 교인 참여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의 ‘왜’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