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 유산
깁슨 시저(레이얼 시저와 함께)
또 한 명의 원주민 아들
개척자가 되는 길은 다양하다
나는 열 살 때까지 넓은 들판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남아메리카 북쪽 베네수엘라 그란 사바나에 굽이굽이 펼쳐진 웅장한 평원이었다.
나의 이름은 깁슨 시저. 타우레판 아카와이오 원주민 중 한 사람이다. 페몬어(語)를 사용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베네수엘라 사람, 영어를 사용하는 가이아나인 그리고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브라질 사람과 함께 수려한 땅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위에 열거한 유럽의 언어뿐 아니라 몇 가지 원주민 언어도 말한다.
우리의 영토는 고대 암성 형성의 장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른바 ‘테푸이’로 유명하다. 사바나 층에서 융기하여 솟아난 테푸이에는 지형 특성으로 웅장한 폭포가 생기는데 그중 하나가 앙헬 폭포이다. 아유얀테푸이가 그 원류이며 높이가 979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물줄기 높이만 측정해도 807미터이다. 폭포를 쓸고 가는 가우햐 강은 그 지역의 험한 급류 중의 하나이다.
토착어로 ‘과야냐’라는 말은 이 범접하기 어려운 이곳 내륙의 풍성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물의 나라’를 뜻하는 그 용어는 가이아나, 수리남, 카옌, 베네수엘라, 브라질 오지의 비옥한 토양을 잘 묘사하고 있다. 깊은 정글은 전 세계의 동물원에 이국적인 동식물을 숱하게 제공해 왔다.
타우레판어를 사용하는 친척들은 브라질, 베네수엘라, 가이아나의 경계가 만나는 로라이마산 아래의 국경을 여전히 자유롭게 넘나든다. 10살 때 고향을 떠나 가이아나로 온 다음 나는 새로운 땅, 새로운 언어, 새로운 이름, 새로운 삶을 얻었다.
파루이마, 와라마동, 조지타운
파루이마는 전통적인 아메리카 원주민 마을이다. 이 마을에 들어선 재림교회 학교에 라일리 시저가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나는 학교 때문에 그 마을로 갔다. 얼마 뒤 라일리 선생과 아내 루시는 나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자기 집으로 나를 데려가 양자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가는 큰 발걸음인 줄을 나는 알지 못했다.
2년 후인 1948년, 부친이 교사로 근무하시는 와라마동 마을로 이사했다. 자신의 첫 아들에게는 오지 아카와이오에서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걸 아버지는 깨달았다. 와라마동에서 2년을 보낸 뒤 부친은 나를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으로 보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나를 첫째 아들로 삼을 때만큼 적적하지 않았다. 자녀가 이미 4명이었다. 당시 나는 14살이었고 동생 발은 4살, 그 밑에 시어런과 레이얼이 있었다. 1950년에는 조지타운에 재림교회 학교가 없었지만, 재림교인 교장선생님은 계셨다. 아버지 시저는 나를 브룩스 더미트에게 맡겼다.
성인이 되다
하지만 조지타운은 나를 위한 아버지의 꿈이나 배움에 대한 나의 목마름을 채워 주기에 여전히 충분하지 않았다. 세 달간 조지타운에 머문 뒤, 나는 카리브 해를 건너 트리니다드 섬에 있는 캐리비안 트레이닝 대학으로 갔다. 나의 선생이자 부모인 라일리와 루시 시저가 훈련받았던 곳이다. 그 학교에서 3년을 머무르며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배움을 계속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나의 민족을 위해 역사를 이루는 것이 주님께서 내게 정해 주신 일이었다. 아버지 시저가 목회자로 가이아나의 에세키보 해안으로 가게 되었을 때, 와라마동에서 내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했다. 17세 나이에 재림교회 사상 최초로 가이아나 토착민 교사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맡았던 와라마동 학교에 다닐 때 애니타라는 소녀가 있었다. 애니타는 나보다 1살 어렸다. 애니타의 아버지 윌리엄 프레더릭 켄스윌은 여행을 많이 다녔다. 안전상의 이유로 애니타는 파루이마 마을에 거주하는 선교사 목사님과 아내 로이 브룩스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다. 처음에는 애니타의 아버지가 주말마다 보러 오셨지만, 애니타가 13살이 된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는 애니타가 자기를 찾아오도록 했다.
“나의 딸이 이제 성인이 되는구나.” 윌리엄이 말했다. “너도 이제 좋은 신랑감을 찾아야 하는데 깁슨은 어떠냐? 아니면 그와 비슷한 친구면 좋겠구나.” 그것이 아버지와 딸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 주에 애니타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멀리 트리니다드에서 나는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곁에 아무도 없네.” 혼자서 나는 중얼거렸다. 해결책은 브룩스 사모님께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를 위해 애니타를 잘 돌봐 달라고 편지를 썼다.
하지만 삶이 항상 단순한 것은 아니다. 가르치려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마음에 끌리는 그리스도인 여청년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를 무척 좋아하는 에스더와 조지타운의 브룩스 목사님 댁에 있는 애니타가 계속 생각났다.
어느 날 나는 애니타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주일 후, 브룩스 목사님은 우리를 결혼시키기 위해 와라마동으로 애니타를 데리고 왔다. 1954년 3월 18일이었다. 그녀는 나의 오랜 학교 동창이었다. 그녀가 13살 때 그녀의 아버지는 나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권한 뒤 돌아가셨다. 브룩스 사모님께 나를 위해 잘 돌봐 달라고 부탁했던 그 소녀가 나와 결혼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혹은 웃기게도 우리 중 아무도 애니타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애니타는 나를 삶의 동반자로 삼기로 흔쾌히 동의했다.
함께하는 삶
난 와라마동에서 7년 동안 가르쳤고 그중 6년은 애니타가 교사이자 나의 사랑하는 아내로 나와 함께했다. 후에 우리는 8시간 거리의 카코로 이사하여 새 학교를 열었다. 리더의 자격에 관한 모든 것을 이곳에서 테스트 받았다. 학교 건립에 동참하도록 마을 사람을 설득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 우리는 교실 칠판에서부터 학교에 필요한 집기 일체를 제작했고 학교 건물도 직접 지었다.
카코 이후의 삶
카코를 떠난 뒤에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광업, 벌목, 농업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의 준비와 와라마동과 카코에서 보낸 시간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1973년, 몬 레포스 농업학교를 시작으로 나는 직업 교육가로 봉사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 8곳에서 가르쳤다. 파루이마, 와라마동, 카마랑, 카코, 자왈라(마자루니 고지대), 임바이마다이, 치나우옌, 필리피 등 이름이 노래 가락처럼 재미있는 아메리카 원주민 마을이었다. 애니타는 산파 자격증을 얻기 위해 교직을 중단했다. 와라마동을 근거지로 애니타는 1973년부터 2001년까지 일했고 가이아나의 오지에서 산파로서 28년 동안 단 한 명의 아이도 잃지 않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와라마동과 카코에서 보낸 역사적인 삶의 순간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가족을 얻기 위해 그리고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국경을 방황하던 작은 소년에게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셨다. 삶에는 슬픔과 기쁨이 함께한다. 그런데도 딸 셋, 아들 넷, 모두 합쳐 일곱 자녀를 얻게 하시고 그 아이들이 어른으로 잘 자라게 하신 하나님께 나는 감사한다. 아이들의 성공, 가이아나의 역사적인 데이비스 원주민 사회에서 발전한 재림교회 교육 그리고 일생 동안 함께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생각하면 동족을 위한 그리스도인 교육 선구자로 나를 사용하신 하나님께 앞으로도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앞으로 나는 약속된 하늘나라의 경계를 넘은 다음에 나의 자녀들, 학생들과 함께 영원한 학교에서 예수님께 배울 것이다.
깁슨 시저
현재 은퇴하여 고향인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주 산타엘레나데우아이렌에 살고 있다.
발문
고향을 떠나 가이아나로 온 다음 나는 새로운 땅, 새로운 언어, 새로운 이름, 새로운 삶을 얻었다.
캡션
가족과 함께한 깁슨(오른쪽에서 네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