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교리
우리의 가장 큰 강점
(약점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조던 스테판
왈라왈라 대학교의 남자 기숙사 복도 한가운데에는 다음 성경절이 새겨진 돌비가 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재림 신자들은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는 회중에 대해서 확고히 맞설 것이다.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해 부정확한 견해를 설교하면 교회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불화가 일어나면 어떠한가? 이런 문제도 <애드벤티스트 리뷰>에 헤드라인으로 등장할까? 그리스도 안의 연합이 우리 교회의 기본교리라면, 왜 이 연합이 도전받을 때 우리는 그토록 무관심한 걸까?
아프리카에서 배운 교훈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사람 중 세상에서 이 지역에만 존재하는 놀라운 야생 생활의 기회를 놓칠 사람은 별로 없다. 나는 케냐에 거주하는 동안 위엄 있는 사자부터 볼품없는 코뿔소까지 여러 동물을 보았다.
얼룩말과 타조는 중요한 요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분명 두 동물은 아프리카 사파리의 슈퍼스타는 아니다. 코끼리, 사자 사진을 저장할 공간이 모자랄 때 우선 삭제하는 동물이 이들이다. 얼룩말은 깜찍한 나귀보다도 작다. 그리고 타조가 무섭지 않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 두 종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은 눈에 두드러진다.
얼룩말은 시력이 약하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의 탁월한 후각과 청각으로 보충한다. 타조는 청각과 후각이 제한적이지만 큰 눈이 있어 시야가 좋다. 두 동물은 서로를 의지하여 자신의 부족을 보완한다. 포식자에게서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종종 같은 지역에서 풀을 뜯는다.
이 동물들이 서로의 강점을 사용하여 함께 일하는 것처럼, 우리도 상대의 강점을 교회 전체의 강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만약 남의 결점 집어내는 직업이 있다면 두둑하게 급료를 챙길 사람이 많을 것이다(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도 많은 봉급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어느 여신도에 대해 여러분은 그를 예배 기획의 최고 전문가로 여기는가? 아니면 최악의 찬양 인도자로 보는가? 교회에 친구들을 데려오는 십 대 청소년을 격려하는가? 아니면 그의 친구들이 문신에 귀걸이를 했다고 그를 나무라는가? 영화 비평가들과 진품을 찾는 수집가처럼 우리는 불완전한 모습을 찾는 일에 전문가들이다.
우리를 최고로 연합시키는 것
교회의 연합이 무엇과 같은지 바울은 로마서에서 최고의 비유를 들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의 신자들을 보라. 다리 역할을 맡을 사람, 즉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라고 요청하든지 가려는 사람이 있다. 눈의 역할에 적합한 사람도 있다. 그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잘 찾아내는 재능이 있다. 입을 다물고 경청하는 귀와 같은 사람, 고치고 치유하는 손과 같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입의 역할을 해내는 친구가 누구나 하나쯤은 있다.
하나의 은사만을 지닌 동일한 성향의 사람들만 양성한다면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가 성립될 수 없다. 다양성 속에서만 모두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분열을 가져올 것처럼 보이는 것, 즉 ‘차이’가 우리를 한데 묶어 주는 경우가 많다.
당신에게 드리는 질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연합되어 있는가? ‘예’인가 ‘아니오’인가? 재림교인, 특히 우리 세대의 교인 중에는 아니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 자신조차도 이 기사를 쓰기 시작하기 전에는 아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곳 맥스웰 아카데미에서 한 로마 가톨릭교인 학생과 대화를 나눈 뒤 나의 시각이 바뀌었다.
관심 있는 가톨릭 의식에 대해 토론한 후, 그가 재림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졌다. 그는 재림교회 학교에 다녔고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재림교회에 대해 칭찬할 만한 것이 있는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당신들 모두는 정말 가깝고 가족과 같습니다.”
그와 나눈 대화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놀라운 경험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잘 모를 때가 있다. 생각보다 우리 교회가 잘 연합되어 있다는 게 가능한가? 우리 교회의 연합은 지난 몇 년간 엄청나게 공격받았다.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는 주제가 등장한다는 것은 강한(심지어 극단적인) 확신으로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이것을 교회에 존재하는 연약함의 표시로 보았다. 그러나 이번 대화를 통해 나의 태도를 재고하게 되었다. 우리의 연합만큼이나 심각하게 흔들리는 문제가 없다면 그리고 사탄이 자기에게 가장 위협적인 부분을 공략하려고 든다면,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교회의 연합이 우리의 가장 큰 강점으로 부각될 것이기 때문에 사탄이 여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17:20~23)
우리는 잘못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스도인 연합이란 서로에 대해 동의하거나 똑같이 생각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연합할 수 있다. 연합의 핵심은 서로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는 것이다. 제자들을 언급하며 엘렌 화잇은 연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평가, 불만, 의견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실 때에는 불화가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서로 사랑하도록 이끌고 주님의 교훈은 제자들을 단합하게 만들며 한 마음과 한 정신이 되기까지 모든 차이점을 조화되도록 이끌었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중심이시다. 그 중심에 접근하는 만큼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갈 것이다”(소망, 296).
오늘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곧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참된 연합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교회의 가장 큰 강점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것이야말로 멋지고 신나는 일 아니겠는가!
조던 스테판
왈라왈라 대학교 신학과 4학년 학생이다. 1년간 휴학하며 학생선교사로 케냐에서 활동하고 있다. 케냐 맥스웰 애드벤티스트 고등학교 남학생 담당이자 교사로 봉사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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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연합
교회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 가운데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 많은 지체를 가진 한 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이에서 민족, 문화, 학문, 국적 등의 구별이나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간의 차별이 분열의 요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 상호 간을 하나의 친교에로 결속시키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 우리는 편견 없이 솔직하게 서로 섬기고 또 섬김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같은 신앙과 소망을 나누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별을 가지고 나아간다. 이러한 연합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이 일체가 되신 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시 133:1; 마 28:19~20; 요 17:20~23; 행 17:26~27; 롬 12:4~5; 고전 12:12~14; 고후 5:16~17; 갈 3:27~29; 엡 2:13~16; 4:36, 11~16; 골 3: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