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을 뛰어넘은
이주민 구호 봉사
기증 물품 쇄도, 순식간에 12.5톤
그리스의 레스보스 섬에 의류, 식료품을 포함한 구호 물품 2.5톤 분량이 도착했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이주민들에게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슬로베니아 재림교회는 이주민들을 위해 번개처럼 신속하게 기부 행사를 열었고, 교통 체증이 일어날 만큼 기부자들이 몰리는 바람에 구호 물품들은 슬로베니아 군대의 엄호를 받으며 공항까지 운반됐다.
“슬로베니아인들은 동정심이 많아요.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기꺼이 돕습니다. 기부 물품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보내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형편을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잘 이해하니까요.” 아드라 슬로베니아 지부장 마야 아하츠가 말했다.
터키 해안 끝자락에 위치한 레스보스 섬은 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 중 한 곳이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번 이주민 사태 때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어느 월요일 저녁, 레스보스 섬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의사와 수의사들이 비정부 기구에 긴급 구호 요청을 보내왔다는 소식을 아드라가 접하게 되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고통 당하는 이주민이 많다는 소식이었다.
슬로베니아와 그리스가 속한 트랜스-유럽지회는 “목요일 오후 3시까지 구호 물품이 슬로베니아 국제 공항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고 회의를 할 시간이 없었다.”고 보도 자료를 통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아드라 봉사자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긴급 기부 행사 소식을 알렸다. 현금 기부 행사를 기획하는 동안, 200만 인구의 남동부 유럽 국가에서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공식 기부 장소로 11곳이 마련됐고,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는 비공식 기부 장소 12곳 이상이 생겼다.
공중파 TV 방송에서도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이번 행사를 보도해 주었다. 슬로베니아에서는 아드라가 첫 번째로 이번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류블랴나에서 열린 기부 행사 첫날 수요일 저녁에 기증 물품이 포장, 분류, 기록을 거쳐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겨우 첫날이었는데도, 창고를 하나 더 빌려야 할 정도로 기증품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아하츠 아드라 슬로베니아 지부장이 말했다.
기부 이틀째이자 마지막 날이었던 목요일에도 기부 행렬이 이어졌다. 기부 행사가 끝난 후, 슬로베니아 정부군들이 공항까지 운송을 도왔고 마감 시간 전에 모든 물품이 무사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 화물칸에 예약된 공간에 맞춰 기증품 2.5톤 마련을 목표로 시작한 이번 행사에는 총 12.5톤이 모였다.
아드라 슬로베니아에서는 세르비아 이주민들을 위하여 아드라 세르비아에 남은 물품을 전달했다. 슬로베니아 국영 철도는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까지 물품을 무료로 운송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슬로베니아 국영 항공사인 아드리아 항공도 레스보스까지 후원 물품을 무료로 운송해 주었다. 류블랴나와 레스보스의 두 공항 관세청에서는 기증품에 대해 국경세 등 관련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기증받은 12.5톤의 기증품들이 베오그라드와 레스보스의 이주민들에게 무사히 전달되었고, 이주민들은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폴 찰스
길거리 소년
목사가 되다
“낙제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몇 개월 전, 재림교회가 성경적 안식일로 성수하고 있는 토요일에 시험을 볼 수 없는 재림교인 학생들의 시험일 조정을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교육부와 성공적으로 협상을 타결한 것이다.
교육부의 시험일 담당관과 면담을 마친 후에 친절한 목소리로 담당관이 질문했다. “어느 지역 출신이신가요?”
누군가에게 “어느 지역 출신이신가요?”라고 묻는 것은 개인적인 대화의 시작인 경우가 많다. 나는 소개할 때, 학창 시절 12년 동안 13번 학교를 옮겼다고 말하며 대화를 시작하곤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의 부모님이 외국 대사이거나 주재원이었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형제들과 나는 5분간의 법정 심리 후에 우리 집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 조치됐다. 하지만 새로운 집은 따뜻한 가정이 아니라 감금 장소에 불과했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어린 시절 나는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해결했고, 버스 정류장에서 자거나, 기차역에서 놀았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닌 이상은 학교를 거의 빠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버린 음식을 먹었고 남들이 오래 입어 너덜너덜해진 옷을 입었다. 잠자리는 맨바닥, 사탕수수밭, 남의 침대였다. 부담스런 짐 덩어리 취급을 당하며 수천 번이나 멸시당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럼에도 학교에서 한 번도 낙제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도 기적에 가깝다.
청소년 보호 시설에 살며 힘겹게 삶을 이어 가던 14살 때였다. 나의 공허감을 채워 주는 것이 음식만이 아니라고 생각한 어느 신실한 여인이 <시대의 소망>이라는 책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분은 따스하고 동정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두 번째로 받은 책 <정로의 계단>을 읽고, 세 번째 책인 <선지자와 왕>을 읽고 있을 때 그분은 나를 교회로 초대했다. 처음 교회에 갔던 날, 목사님은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여러분이 어떤 분께 속해 있느냐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 교회가 나의 교회가 되었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셨던 루크머니 무니사미 집사님은 내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너를 목사로 부르신다고 나는 믿는다. 너는 목사님이 될 거야.” 2년 후에 내가 청소년 보호 시설을 나와야 하는 나이가 됐을 때, 루크머니 집사님은 별세하셨다.
그 후 3년 동안 나는 아홉 군데를 옮겨 다녀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루크머니 집사님을 처음 만나서 같은 버스에서 내려 같은 목적지로 함께 걸어가던 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은 루크머니 집사님이 청소년 보호 시설에 처음 출근하는 날이었고, 내가 청소년 보호 시설에 입소하는 날이었다.
그 후 2년간, 하나님은 루크머니 집사님을 통해 내가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연습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에게는 나를 위한 특별한 계획이 있다고 집사님은 말해 주셨다. 침례를 받고 첫 발자국을 떼던 순간에 처음으로 나를 안아 주고, 15살 때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하던 날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를 경청해 주던 분이 바로 루크머니 집사님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루크머니 집사님의 삶을 2년간 연장해 주셨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위해 나의 삶을 연장해 주시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일하신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지금 나처럼 살아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폴 찰스 남아프리카-인도양지회의 홍보부장이다. < Revolutionary Preaching . . . in a Secular World>,
켄트 켄싱턴
피지 최초의
재림교인 대통령
지오지 코누시 콘로테,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피지의 첫 번째 재림교회 대통령인 지오지 코누시 콘로테가 <애드밴티스트 월드>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은 조국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첫째로 모시며 대통령직을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11월에 대통령에 취임한 콘로테(68세)는 직업 군인으로 피지군(軍)에서 봉사하던 중 진급을 거듭한 끝에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4년 전에 재림교회에 입교한 콘로테 대통령은 의회 의원과 장관으로 봉사하던 중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콘로테 대통령은 기독교 신앙과 정치 활동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저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는 저의 신앙 양심을 따라 결정합니다.”
또 그는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일이 옳은 일입니까?’라고 주님께 묻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일이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이라면 하나님 뜻대로 될 줄 믿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너무 단순한 것 같아 보이지만, 저는 이런 방식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콘로테 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과거에 자신의 신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습니다. 장관이 된 후에 사람들이 제게 이제 정치인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저는 평생을 군인으로 살 것입니다. 원칙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으로써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이 저의 결정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콘로테 대통령은 피지 최초로 UN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UN의 부사무총장이자 레바논 주둔 UN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8년에는 레바논에서 이스라엘군의 퇴각을 확정 짓기도 했다.
이제 콘로테 대통령은 피지의 대통령으로써 2013년 피지 개정헌법에 따라 피지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는 국군통수권자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애드벤티스트 월드>와 인터뷰를 통해 콘로테 대통령은 여러 이유로 주목받고 있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콘로테 대통령은 재림교인으로써 첫 번째 대통령일 뿐 아니라 피지 소수 민족인 로투만 족 최초의 대통령이고, 비족장 가문 출신으로서도 첫 대통령이다.
대통령 선출 소식을 듣고 놀라셨습니까?
네,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겸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 직임을 받았습니다.
재림교인 최초일 뿐 아니라 로투만 족 출신으로 그리고 비족장 가문 출신으로도 첫 번째 대통령입니다. 피지 역사에서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피지는 1987년에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1987년부터 항상 대통령직은 족장 가문 출신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정부에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2013년 헌법 개정으로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졌고, 국가 유공자 누구든지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습니다.
피지를 위한 비전은 무엇입니까?
저는 피지가 하나의 국가, 연합된 국민으로 이루어진 공동 운명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재림교인이 되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재림교회에서 저는 초신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감리교 가정에서 태어나 감리교인으로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4년 전에 감리교회를 떠나, 재림교회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저의 온 가족이 재림교인이 되기까지 긴 사연이 있습니다만, 주님이 거니시던 중동과 이스라엘에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세상의 역사와 비교해 가면서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른 교파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재림교회를 선택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 이루어진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과 장소에서 역사하십니다. “내 백성아, 나오라! 바벨론에서 나오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재림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재림교회를 잘 드러낼 수 있을까?”라고 재림교인들이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저는 재림교인일 뿐 아니라, 종교와 인종을 떠나 피지 국민의 대표자입니다. 하지만 제가 재림교인이라는 사실에는 아무 변함이 없습니다.
재림교인들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피지 재림교인들은 기뻐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여러 부분에서 저를 돕고 있습니다. 재림교인을 포함하여 피지의 기독교인 모두가 앞으로도 저를 위해 계속 기도해 주시고, 그리스도인의 모본을 보여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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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슬로베니아의 한 가족이 수도 류블랴나에 아드라가 마련한 기증품 집하 장소에 물품을 후원하고 있다. 오른쪽 : 마야 아하츠 아드라 슬로베니아 지부장이 TV 방송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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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찰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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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콘로테 피지 대통령이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오른쪽 : 2015년 11월 12일, 수도 수바에서 대통령 취임식 선서 중인 지오지 코누시 콘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