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험한 세상을 위한 희망
마크 핀리
난관에 부딪혀도 기운 차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있다. 바로 희망이다. 희망이란 손에 잡히는 물질이 아니지만 삶의 문제를 뛰어넘어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게 한다. 새날이 다가온다는 희망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목적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희망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고의 삶을 기대하게 만든다. 희망은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희망 때문에 오늘의 어둠 속에 좌절하지 않고 내일은 더 밝으리라고 믿고, 신뢰하고, 예상하고 기대하게 된다.
새뮤얼 스마일즈는 이렇게 말했다. “희망은 태양과 같아서 그 앞으로 다가갈수록 우리가 지고 있던 짐은 그림자처럼 뒤로 물러간다.” 로마 정치가 플리니우스는 “희망이란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다.”라고 했다. 과연 그의 말이 옳았다. 희망이 없다면 세상에는 엄청난 재앙이 몰려올 것이다. 희망이 없다면 사회의 기초가 무너질 것이다.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적막한 절망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요즘은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인 것 같다. 세상은 희망에 굶주려 있고 상황은 해마다 더욱 악화되고 있다. 1999년 미국의 여론 조사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 중 85퍼센트가 미래에 대해 희망적이라고 답했다. 10년이 지난 2009년 12월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희망적이라고 답했던 사람들이 69퍼센트로 떨어졌고, 51퍼센트만이 세계의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내다보았다. 2013년에는 40퍼센트만이 지구의 미래가 낙관적이라고 답변했다. 이 여론 조사는 미국에서 실시되었지만 세계 곳곳의 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희망이 사라지면
우리 사회에 왜 희망이 사라지는지를 설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2003~2012년에 대재앙 수준의 자연재해가 매해 평균 338차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수백만 명이 집을 잃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토네이도, 사이클론, 지진, 허리케인, 쓰나미 등은 세계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어 1,567억 달러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전쟁으로 숱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전쟁 지역에서 도망친 난민은 수백만 명이다. 난민들은 유럽으로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토록 바라던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죽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무자비한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전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다. 중동,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미국 등지에서 발생하는 극악무도한 테러로 걱정과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경제 역시 매우 위태롭다. 경제 종말이 임박할 것이라 예측하는 경제학자가 많다. 러시아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희망 없이 사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그 말의 뜻은 간단하다. 사람이 희망을 잃으면, 꺼져 가는 태양처럼 인생의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희망을 재발견하다
통제 불능인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불확실해 보이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희망의 기초가 되는 확실한 무언가가 있는가? 허다한 사람들이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으며 희망과 확신과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이들은 상상 이상으로 훨씬 더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오늘의 도전과 내일의 시련에 마주한 자신에게 놀라운 용기로 힘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했다. 그분은 소망의 하나님이다.
시편에서 다윗은 절망의 때에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라고 외쳤다. 다윗의 소망이 시작된 곳에서 우리의 소망이 시작된다. 그 소망은 그의 문제보다 훨씬 크고, 그의 어려움보다 훨씬 위대하고, 그가 직면한 어떤 도전보다 대단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셨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며 마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 언젠가 악의 모든 세력을 이기시고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소망 없이 인생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과 같다.
조지 버나드 쇼는 종교적 신념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기독교인을 쓸데없이 목발 짚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는 자유사상가이자 진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글들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 믿음을 걸었던 과학이 파산했다. 과학의 권면은 천년왕국을 세워 줄 것 같았지만 그 반대로 유럽을 자멸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조언들을 믿었던 적이 있다. 수천 가지 교리로 이루어진 예배당에 모이는 수백만 숭배자들의 믿음을 파괴하기 위해 나는 과학의 이름을 힘입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나를 쳐다보면서, 신념을 상실한 무신론자의 참담한 비극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조지 버나드 쇼는 개인의 신념뿐 아니라 희망까지 잃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을 느끼지 못했고, 자신이 우주의 티끌에 불과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임을, 하나님께 사랑받고 매 순간 하나님을 힘입어 사는 존재임을 잊은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 지속적인 보살핌을 느낄 때 우리 마음에 희망이 샘솟는다.
희망의 책, 성경
성경은 희망으로 가득한 책이다. 거기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들은 강력한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싸워 승리하기도 하며 약한 모습으로 비참하게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든지 그들과 함께하셔서 내일을 위한 희망을 주셨다. 성경에는 ‘소망’이라는 단어가 125차례 이상 나온다. 숱한 도전에 직면했었던 사도 바울도 40번 이상 ‘소망’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두들겨 맞고, 돌에 맞고, 배가 난파하고, 옥에 갇혔어도, 그의 마음에는 소망이 가득했다. 로마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며 그는 선언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우리가 마주할 그 어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히 경험한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확신 가운데 우리는 희망이 넘친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께서 다루시지 못할 상황은 없다.
흥미로운 실험
희망이 고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오래전에 연구원들이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용 쥐 두 그룹을 물이 담긴 통에 각각 넣었다. 한쪽에 있던 쥐들은 물에 넣은 뒤 한 시간 이내 모두 익사했다. 다른 그룹도 비슷한 물통에 넣었는데 한 가지 차이를 두었다. 쥐들을 주기적으로 물에서 건져 올렸다가 다시 같은 물통에 넣었던 것이다. 이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쥐들은 계속 헤엄쳤고, 연구원들은 쥐들을 건졌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이런 식으로 이 쥐들은 24시간 이상 계속 헤엄치고 있었다. 왜일까?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였을까? 그게 아니라 그 쥐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조금만 더 버티면 누군가 손을 뻗어 구해 줄 것이라는 희망이 있던 것이다.
사고력이 없는 설치류에게도 희망이 이러한 힘을 부여한다면, 우리 삶에는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까? 우리는 절망의 바다에 떠 있으려고 기를 쓰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막 빠지려고 하는 순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베드로는 성난 파도에서 자신을 구해 주실 예수님을 발견했다.
폭풍우 치는 밤에 갈릴리에서 작은 배를 몰던 제자들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배에서 내려와 자기에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더욱 놀랐다. 얼마 동안은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때 성난 파도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놓쳤다. 베드로는 물속으로 빠지면서 소리쳤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 14:30). 예수님은 즉시 강한 손을 내밀어 절망의 상황에서 제자를 건져 올리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없다면 도전할 문제도 없다. 옛 찬미가 가사를 생각해 보라. “주께서 나와 함께하네. …꼭 필요할 때에.”
두 번이나 그분의 것
우리를 창조하시고 돌보시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우리는 두 번이나 그분의 것이 되었다. 그분께서 완벽하게 창조하셨던 피조물들이 사랑으로 가득했던 에덴동산에서 그분의 뜻에 반역했다. 아담의 혈통에게는 소망이 있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시다(계 13:8). 하늘에서 마련된 구속의 계획이 온 우주에 메아리쳤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떠나 반역의 땅에 오시어 하나님의 사랑을 온 우주에 드러내고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아담이 실패한 지점에서 예수님은 성공하셨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명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분께서는 율법의 요구에 응하셨으며 사탄의 가장 사악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살아야 할 완벽한 삶을 사셨고, 죽어야 할 우리 대신 죽으셨다. 비록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 쉬운성경). 그분의 은혜, 용서, 자비가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빌리 그레이엄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내게 희망을 주신다.” 이런 찬미도 있지 않은가. “이 몸의 소망 무엔가 내 주의 보혈뿐일세.”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다. 유혹을 충분히 이겨 낼 것이라는 희망, 이겨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도전은 없을 것이라는 희망, 우리의 내일이 오늘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미국의 유명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전 대통령은 인생 철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희망, 신념, 확신을 늘 간직한다면, 수평선 너머로 더 나은 삶, 더 나은 세계가 있을 것이다.”
내일을 넘어선 희망
성경은 우리에게 더 나은 내일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또 언젠가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악은 멸망할 것이나 의는 영원히 통치할 것이다. 죄와 질병, 고통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질병, 재난 그리고 죽음이 물러날 것이다. 악의, 전쟁, 걱정이 사라질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영광의 사건을 “복스러운 소망”이라 말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 16~17).
얼마나 멋진 소망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다. 최후의 단어는 ‘죽음’이 아니라 ‘예수’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며 죽음을 맞이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머지않아 무덤에서 부활하여 서로 얼굴을 맞대고 그분을 볼 것이다. 잠시 후면 모든 희망이 실현될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며 살아서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사건을 경험하는 자들은 구름 속으로 올라가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우주에서 가장 놀라운 곳으로 특별한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며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 것이다.
이 희망은 한낱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헛된 꿈은 더더욱 아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걱정 많은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우리는 미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쁨을 빼앗길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돌보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키시며 다시 오셔서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다.
마크 핀리
40년간 목사, 전도회 강사, 미디어 사역의 지도자로 일했고 대총회 부회장으로 2010년에 은퇴했다. 현재 <애드벤티스트 월드>와 <애드벤티스트 리뷰>의 고문 편집인 및 대총회장 보좌로 봉사하고 있다.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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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없다면 도전할 문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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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단어는 ‘죽음’이 아니라 ‘예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