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교리
모두를 위한 정의
스테판 회셸레
나는 재림교회 가정에서 성장했고 어떻게 십계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늘 의아했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도둑질하고, 다른 신을 섬기고, 결혼을 파괴하고, 우상을 만들고, 일주일에 7일 동안 일하고, 거짓말하는 것의 좋은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어쩌면 내가 사물을 약간은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십계명은 더 이상 행동의 준거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요지를 모르겠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20장에 적힌 말씀을 마냥 따른다고 해서 하나님께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오늘날 성경의 어떤 규정을 이행하는 일에 관하여 자신이 유일하고 최종적인 해석자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나는 싫어한다.
그러나 두 돌비에 쓰인 표준의 정당성과 권위에 대해 따진다면 기꺼이 응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창조주를 믿는 자들에게 이와 같은 기본적 의무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떤 반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들은 너무 기본적이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최소한의 요구로만 여겨질 정도이다. 그래서 부자 청년도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20)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좀 분석해 보아라. 실제로는 네가 잘못했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나의 고조할머니가 동네에서 첫 번째 재림 신자가 중 한 명이 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라는 구절을 숙고하셨다. 십계명이 정의를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표준임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결정은 너무나 당연했다.
모두를 위해서
내가 사는 나라에서, 법은 아주 중요하다. 법을 회피하기 위해 공무원에게 뇌물을 쓰려고 했다가는 경을 치고 말 것이다. 그 법은 모두에게 유효하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정의는 모두를 위한 정의일 때만 정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따라야만 하는 숱한 국법을 모두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심각한 다툼이 일어날 때, 강력한 원칙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고 시민들의 의무를 명문화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명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공정함이 일부에게만 적용된다면 그게 무슨 정의란 말인가? 그래서 십계명 한가운데 있는 안식일 계명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외국인, 심지어 동물까지 제칠일에 일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출 20:10).
단지 출애굽기 20장에 나타난 도덕 조항의 기본 원칙을 준수하여 세상일이 다 잘 풀린다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회는 시민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서 유래한 규범이 없었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지역 사회 구성원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최악의 불의를 예방하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 가지 예증
지금 서구 유럽에서 우리가 당면한 상황이 이것을 예증한다. 2015년 독일에만 난민 약 1백만 명이 도착했다. 이들 대부분이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다른 계파, 정당, 가족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조국에서 박해와 협박을 당했다.
공정한 대우를 희망하며 우리에게 찾아온 난민들을 공정하게 받아들이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하는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는 무엇일까? 안식일의 정의로운 원칙을 인도주의적 위기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십계명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백성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도 이집트에서 난민이었다. 유명한 심판의 말씀 가운데 그분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영접하였고”(마 25:35)라고 말씀하셨다.
올바른 정신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란 단순히 살인, 도둑질, 간음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예수님은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인은 도둑질보다 자발적인 소박함을 더 좋아한다. 탐욕을 품는 대신 나누어준다. 심지어 지금 유럽에 도착한 허다한 이슬람 난민처럼 신앙이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준다. 살인하는 대신에 원수를 위해서도 자기 목숨을 버린다.
이웃 사랑이 늘 쉬운 것은 아니다. 모두를 이웃으로 선택할 수도 없다. 그러나 최소한의 표준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이곳 독일에서 몇 사람은 이것을 망각한다. 그들은 이 나라에 외국인이 전혀 없었던 몇 세대 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들은 사회 네트워크를 증오의 언어로 가득 채우고 난민 센터를 불태운다. 국경에서 이주민들에게 발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서방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의 논리는 정반대이다. 그분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금지법을 희생으로 바꾸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지 말라. 국가는 어떠해야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옹호할 때도 그분의 이름을 악용하지 말라. 차라리 예수를 따르기 위해 저주받는 길을 택하라.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 모든 이에게 하루의 안식을 제공하라. 그리고 엿새 동안은 일하면서 하나님의 왕국을 드러내라. 거짓 증언을 넘겨 버리지 말라. 복된 말을 하고 모두에게 희망을 말을 하라. 특별히 자신의 인생이 폐허가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
법과 사랑 둘 다 우리에게 필요하다. 법이 필요한 이유는 아무도 벗어나서는 안 되는 표준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율법의 참된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에.
스테판 회셸레(Ph.D.)
알제리와 탄자니아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독일 프리덴사우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과 선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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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율법
*2015년 대총회에서 수정된 기본교리 문구는 <교회지남> 편집실에서 자체 번역한 것이며 한국어로는 아직 공식적으로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위대한 원칙들은 십계명을 통해 구체화되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예시되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인간의 행위와 관계들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의 표현이며 각 시대의 모든 인류가 지킬 의무가 있다. 이 교훈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의 기초가 되며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표준이 된다.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것들은 죄를 지적하며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것이요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다. 이 같은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계발시켜 주며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증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은 생애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전도를 힘 있게 해 준다(출 20:1~17; 신 28:1~14; 시 19:7~14; 40:7~8; 마 5:17~20; 22:36~40; 요 14:15; 15:7~10; 롬 8:3~4; 엡 2:8~10; 히 8:8~10; 요일 2:3; 5:3; 계 12:17; 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