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리포트
앤드루 맥체스니
소 새뮤얼
남아시아태평양지회장에 선출
3월 22일, 소 새뮤얼 목사가 남아시아태평양지회장으로 선출됐다. 새뮤얼 목사는 취임 인사를 통해 하나님께 끊임없이 지혜를 구하면서 남아태지회 내의 불교도와 회교도 선교를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대총회 행정위원회는 무기명 투표를 통해, 지난 1월 골수암으로 잠든 레오나르도 R. 아소이 목사의 후임으로 새뮤얼 목사를 선출했다.
남아태지회 총무로 봉사했던 새뮤얼은 해당 지회 내의 미전도 지역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남아태지회에는 14개 나라에 10억 명이 거주하며 그중 재림교인은 130만 명뿐이다.
“저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의 젊은이들과 평신도들을 훈련하고 후원하여 미개척 지역에 속한 중국인, 불교도, 힌두교도, 회교도 그리고 세속화된 도시 지역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 출석을 중단했거나, 낙심하여 교회를 떠난 영혼을 되찾는 사역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뮤얼 목사가 작년 7월 샌안토니오 대총회에서 선출되었던 전임 지회장 아소이 목사의 선교 전략을 이어 나가려고 한다는 것을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아소이 목사는 작년 인터뷰에서 불교도와 회교도 선교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아소이 목사는 지난 1월 12일, 골수가 건강한 혈구를 생성할 수 없는 골수이형성증후군으로 사망했다. 아소이는 작년 대총회에서 56세 나이로 남아태지회장에 선출되었고 전임 지회장은 알베르토 C. 굴판 주니어 목사였다. 굴판 목사는 12년간 지회장으로 봉사했고 암이 발병하여 작년 9월 26일에 64세로 잠들었다.
미얀마 사람 최초로 지회장에 선출된 새뮤얼 목사는 남아태지회를 향한 자신의 비전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인 청년, 평신도, 미디어와 방송 사역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새뮤얼 목사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절은 시편 90편 12절의 말씀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인생은 짧고도 소중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로 우리의 시간, 건강, 힘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지 판단해야 합니다.”
올해 1월부터 지회장 대행으로 봉사한 새뮤얼 목사는 2010년에 남아태지회 총무로 선출됐다. 그전에는, 싱가포르의 동남아시아연합회에서 2년 동안 목회부장으로 봉사했다. 새뮤얼 목사는 올해 3월 필리핀의 AIIAS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부인 오라타이 추레슨 사모는 남아태지회 어린이부장 겸 가정사역부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새뮤얼 목사 부부에게는 두 자녀 아만다(12세)와 소라윈(10세)이 있다.
“새뮤얼 목사님은 매우 영적이고, 존경스럽고, 겸손하고, 선교 열정이 가득한, 섬기는 지도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능력 있는 종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남아태지회 직원들과 지회의 교인 모두가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한다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테드 N. C. 윌슨 대총회장이 말했다.
새뮤얼 목사가 맡겨진 임무를 겸손히 수행하면서 주님 안에서 담대하게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윌슨 목사는 격려했다.
“새뮤얼 목사님은 매일 그리스도께 의지하고, 제가 그러는 것처럼 매일 야고보서 1장 5절의 약속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있을 때에만 우리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예란 한센
난민에게 무료 스키 강습
스웨덴 재림교회, 난민 100명 감싸 안다
스웨덴의 작은 시골 마을인 뉘휘탄의 재림교인들은 마을에 난민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들을 환영하는 마음으로 스키 레슨을 계획했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자동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뉘휘탄 재림교회 교인들은 뉘휘탄 지역의 다른 봉사 단체와 함께 난민들이 잘 정착하도록 돕기로 계획했다.
스웨덴어 강의, 스웨덴 문화 강의, 숲길 산책, 지역 사회에서 기부받은 옷 나눔 행사 등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9월,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에리트레아 출신 난민 약 100명이 정부 운영 난민 거주 센터에 도착했고, 그동안 준비해 온 난민 지원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난민들에게 스웨덴 생활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특별히 추운 겨울 날씨는 처음 경험했다. 난민 대부분이 난생 처음으로 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고 지역 사회에서 스키, 부츠, 스케이트, 겨울옷 등을 마련하여 무료 스키 강습을 시작했다.
“처음 겪는 겨울 추위이기 때문에 난민들은 낯설어하고 추워했지만, 점차적으로 스키와 스케이트를 즐기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특별히, 햇살에 비친 눈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재림교회 은퇴 목사이자 난민 프로그램의 기획을 맡은 라르스 일 목사가 말했다.
눈이 녹아 스키를 탈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자전거와 축구 강습이 이어졌다. 자전거 또한 무료로 대여할 수 있도록 후원받았고, 축구 경기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스포츠가 되었다. 뉘휘탄 교회 패스파인더 클럽의 어린이 회원 수는 25명으로 늘어났고, 교회에는 유치원을 신설했다.
맨 처음 행사를 시작했을 때, 난민 중에는 마음을 열고 참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교회 건물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을 열었다. 교회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콘서트에는 난민 약 40명이 참석했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에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교인들 또한 난민을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스웨덴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난민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일 목사에게 직업이 무엇인지 묻기도 한다. 목사라고 대답하면 놀라는 모습을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 목사의 봉사와 사역에 존경을 표하는 난민들이 늘고 있다.
빅터 헐버트
영국으로 향하는 난민들을 돕다
프랑스 됭케르크 캠프로 매일 8시간 출근하는 자원봉사자들
사샤 베세야크는 남부 잉글랜드에 위치한 뉴볼드 재림교회의 지도자 4명 중 한 사람이다. 베세야크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차를 운전하고, 다시 배를 타는 수고를 감수하며 난민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베세야크는 됭케르크 재림교회의 교인들과 팀을 이뤄 함께 활동하며 점심 식사를 제공하고, 난민들을 사랑으로 돌보면서 절박한 상황에 놓인 난민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고 있다. 난민들은 영국 해협을 건너 망명을 신청할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
음식 준비를 맡은 봉사자들이 음식과 과일을 준비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정서적인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베세야크는 애타게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난민들에게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잉글랜드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위로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민들의 반응은 어떨까?
“난민 대부분이 회교도이고, 기독교인은 소수예요. 하지만 쥐가 득실거리는 습한 곳에서 여러 달 살다 보면, 종교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져요. 지금 내 곁에서 나를 돌봐 주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요.”라고 베세야크가 말했다.
정식 절차를 거쳐 망명을 신청하는 난민보다 불법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난민이 더 많은 상황에서 재림교회가 난민 캠프 사역을 벌이는 데 의문을 제기한 사람도 있다. 한술 더 떠난민을 도우면 밀입국과 불법 행위를 돕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베세야크는 그런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오는 자원봉사자가 많아요. 충분한 답을 얻지 못한 채 떠나는 사람도 있지요. 난민들이 외부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자체적인 조직을 통해 캠프가 운영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더 깨끗해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누군가의 의견을 제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저보다 더 말쑥하게 지내는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하면서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돼요. 그들은 단지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원하는 것뿐이에요.”
모하메드(15세)는 흙먼지로 둘러싸인 자신의 텐트 앞에 서 있었다. 북이라크에서 이슬람 군인들이 부모님을 어떻게 죽였는지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미래에 대해 희망이 있다고 했다. 그는 재림교인 자원봉사자를 생명 줄과 같은 존재로 여긴다.
오마르는 4개월간 됭케르크 난민 캠프에서 생활했다. 45세인 그는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인다. 오마르의 고향인 말라 압둘라에서 폭탄이 터졌고, 오마르는 그 현장 가까이에 있었다. 오마르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베세야크는 오마르를 비롯한 난민 캠프 거주자들의 사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해 4명의 뉴볼드 지역 지도자들(팀 덴 헤르토그, 제프 머클, 뉴볼드 교회 부목사 빌리 코스테스쿠)이 계속 이곳 난민 캠프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 있는 난민을 도와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껴요. 이분들도 우리처럼 더 나은 미래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루벤 그리코
어느 난민의 재림교인 친구
에리트레아 사람이 독일로 피난한 이유 그리고 독일인 자원봉사자가 그를 돕는 이유
독일 정부에 망명을 신청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이들을 돕는 재림교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에서 망명한 20세의 에르미아스와 재림교회 남부독일연합회의 망명자 돕기 사업에 참여한 자원봉사자 실비아 콘투스크가 나눈 대화에서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인터뷰는 매주 망명자를 위한 독일어 교실이 열리는 재림교회에서 진행되었다.
망명자 에르미아스를 만나다
에르미아스, 어떤 일이 있었기에 조국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에리트레아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됐나요?
저는 에리트레아에서 직업 군인이었습니다. 제가 원해서 직업 군인이 된 것은 아니었지요. 기계 기술자가 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군인이 된 거예요. 2000년에 아버지가 전사하셔서 제가 가족을 부양해야 했거든요. 어머니와 여자 형제 넷을 위해 일해야 했지요.
한 사건으로 제 인생이 완전히 변했답니다. 무기를 운반하던 트럭이 폭발했고, 군인 동료 4명이 즉사했지요. 살아남은 동료는 발목을 잃었고요. 저 또한 머리와 다리에 파편이 박힌 채 1년간 병원에 입원했어요. 한 쪽 귀는 거의 청력을 잃은 상태였죠.
그러던 중 결혼식을 올렸고 휴가를 받았는데 어머니를 위해 돈을 벌려고 5일 동안 부대에 복귀하지 않았어요. 이것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었어요. 컨테이너 다섯 개로 만든 건물인데, 한 컨테이너마다 38명이 머물렀죠. 거기에는 창문도, 물도, 화장실도 없었어요.
감옥에서 첫 한 달 동안 수갑을 찼어요. 군인들이 저를 세 번 불러내서 때리고, 차가운 물을 끼얹고, 젖은 채로 다시 컨테이너에 가뒀지요.
감옥에 갇혀 있던 8개월 동안, 저는 매일 아침 빵 두 조각과 차 한 잔을 받았습니다. 저녁에는 이것을 9명과 나눠 먹었어요. 화장실은 매일 아침 6시 30분에 딱 한 번 갈 수 있었고요.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감옥에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라리 탈출하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거죠. 걸려서 죽더라도 탈출하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삶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정말 다시 살고 싶었어요.
어떻게 탈출에 성공했나요?
무장한 군인들이 컨테이너 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어요. 어느 날 아침, 다른 동료 한 명과 저는 탈출을 결심했어요. 우리는 동시에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어요. 군인들이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총을 쏘기 어려운 지점을 향해 달렸어요. 군인들이 우리의 다리를 조준하고 총을 쐈지만, 우리는 맞지 않았죠. 저는 도망에 성공했고, 친구들을 만나 옷과 차비를 얻어 에티오피아 국경까지 갈 수 있었답니다. 거기서 국경을 넘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까지 3일 동안 걸었어요. 제가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한 날, 에리트레아에 남아 있던 어머니는 체포되어 2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어요.
아디스아바바에서 군인들이 저를 난민 캠프로 보냈고, 그곳에서 6개월을 지냈어요. 저는 다시 아디스아바바로 갔고, 일자리를 얻어서 수단으로 갈 여비를 벌었어요.
독일까지는 어떻게 왔나요?
독일에 살았던 사람을 수단에서 만났어요. 그 사람은 독일에서 자신이 평화롭게 살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독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저는 7개월 동안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여비를 마련했어요. 미화 1,600달러를 내고 수단에서 사하라 사막을 통과하는 트럭에 탔어요. 어린이와 어른 148명이 타고 있는 트럭은 7일간 달렸어요. 리비아에서 군인들이 검문했고, 트럭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돈, 휴대폰, 서류, 신분증을 빼앗았어요. 다른 에리트레아 사람 400명과 함께 다시 5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야 했어요. 갇혀 있던 사람들은 강제로 폭탄과 무기를 차에 실어야 했어요. 어떤 사람은 폭탄을 나르다가 폭탄이 터져 사망했어요.
어느 날 저녁, 저는 그곳을 탈출했고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 해안가에서 배를 탔어요. 329명이 탄 작은 배가 이틀간 항해했고, 이탈리아 해군이 우리 배를 발견하고 수속을 위해 이탈리아로 우리를 데려갔습니다. 3일 후에, 저는 독일 뮌헨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를 수 있었어요. 뮌헨에 도착한 이후 메스슈테텐으로 옮겨졌고, 지금 살고 있는 특별 주택까지 오게 된 거예요.
교회에서 열리는 난민 지원 프로그램에는 어떻게 참석하게 됐습니까?
교회에서 독일어 회화 수업이 있다고 사람들이 알려 주었어요. 거기서 실비아를 만났어요. 실비아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어를 배울 수 없었을 거예요. 아마 다시 이탈리아로 보내졌을 테고 이탈리아에서는 살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돼요. 실비아가 저를 의사에게 데려갔어요. 이제 저는 교회 예배에 매주 참석하고 있어요. 독일에서 거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지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까?
사실 저는 본국으로 송환되어 끔찍한 경험을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이곳에 남아서 거주하면서 일자리를 찾고 싶어요. 아내도 이곳에 올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감옥에 있는 동안 딸아이가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못 봤는데, 올해 4살이 된 제 딸아이도 보고 싶어요.
감사한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밤마다 하나님께 기도드렸어요. 오랜 고난의 여정 동안 저를 지켜 주시고 동행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자원봉사자 실비아 콘투스크를 만나다
난민 봉사에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되었습니까?
저는 항상 예레미야 29장 7절의 부르심을 제 마음속에 품고 있었어요.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난민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되었고, 부르심을 느꼈어요. 시청에 가서 사회 통합 분야 사무관을 만났고 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이 사역은 저의 신앙과도 조화되는 사역이에요.
이곳에서 난민들을 위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저의 난민 봉사 사역은 시간제 근무와 비슷해요. 월요일과 화요일 아침에 난민 거주소에서 사회복지사의 업무를 도와요. 수요일 오후에는 독일어반 소그룹에서 회화와 번역을 가르치지요. 가끔씩은 요리를 하고 옷을 나눠 주기도 해요. 난민들이 새로운 집을 찾는 일도 돕고 있어요. 난민들이 의사나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러 갈 때에도 동행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십니까?
제가 하는 일로 도움을 받은 난민들이 미소를 지을 때 큰 보람을 느껴요. 난민들이 의사를 만나서 도움을 받거나, 난민 신청이 승인되거나, 직업을 찾을 때는 제가 성공한 것 같은 기분이지요. 저의 도움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 순간을 볼 때 정말 행복해요.
봉사하시면서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제 가족도 돌보고 저의 진짜 일도 해야 한다는 거요(웃음).
봉사를 계획하고 있는 다른 분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나요?
혼자서 봉사하려고 하면 분명히 실패할 거라고 봐요. 봉사하려는 지역의 사정을 먼저 파악하고 이미 봉사 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기관에서 함께 일할 것을 추천합니다. 우리 재림교회는 봉사 활동을 하는 데 있어 큰 장점이 있어요. 이미 탄탄한 조직과 인적 자원이 있다는 거예요. 또 재림교회는 오랜 경험을 통해 지역 사회 봉사에 관한 올바른 원칙과 철학을 정립하고 있어요. 이것은 정말 값진 자산이지요. 우리 지역 난민들은 대부분이 젊은이에요. 그들을 가깝게 이끌고 친교를 나누세요.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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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목사와 오라타이 추레슨 사모, 두 자녀 아만다(12세)와 소라윈(10세)
04 왼쪽 : 난민들이 스웨덴에서 스키를 배우고 있다. 오른쪽 : 스웨덴 재림교회 행사 캠프파이어에서 빵을 굽고 있는 난민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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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이라크 출신의 오마르(45세)는 더 나은 삶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왼쪽 : 이라크 출신의 모하메드(15세)가 흙먼지로 둘러싸인 자신의 텐트 앞에 서 있다.
위 : 팀 덴 헤르토크(오른쪽)가 덩케르크 난민 캠프에서 과일을 나눠 주고 있다. 아래 : 됭케르크 난민 캠프에서 재림교인 봉사자들이 진흙탕을 걸으며 방문길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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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 난민 봉사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실비아 콘투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