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혔다고?
자유와 결박에 대한 역설
레이얼 시저
예레미야는 곤경에 처했다. 그는 유다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시설인 진흙 구덩이에 갇혔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인 곳이었다.
모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치리라는 것을 예레미야는 알고 있었다. 주님이 미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름 받았을 때 주님께서는 앞으로 그가 왕, 성직자, 일반인들과 문제를 겪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러나 그는 이겨 낼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렘 1:19)이라고 주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마침내 시련이 찾아왔다. 그런데 구원은? 그는 컴컴한 진흙에 갇혔고 구원받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가 갇혔다는 말에 한 가지 어폐가 있긴 하다. 예레미야를 가둔 사람은 그를 고립시키기 위해 충분히 먼 곳에 가둘 수는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임하니라”(렘 33:1).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죄수 예레미야가 어떻게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가? 그는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투옥됐다. 거기에는 전화기가 없었다. 자기 몸에 휴대폰을 감춰 놓은 것도 아니다. 위성 통신을 차단하고 신호를 변환하여 이 첨단 보안 시설에 있는 사람이 누구도 말썽을 일으키기 못하게 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와 여전히 꾸준히 연락하고 있었다.
자명한 역설이 나타난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가둔 사람들보다 더 자유로웠다. 그들이 접속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통신 수단과 통신 레벨이 그에게 있었다. 예레미야와 소통하시는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으신다. 그분에게는 개방된 위성 통신 따위가 필요 없다. 그분에게는 애플의 암호를 풀어 줄 해커가 필요하지 않다. 그분 자신이 통신이자 말씀이며, 자신이 선택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하신다. 그분은 비바람 속에서도 빌립보 감옥으로 들어가 차꼬와 쇠사슬을 모두 풀어 버리신다. 깨우기 전까지 베드로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을 정도로 헤롯의 지하 감옥에 아주 조용히 잠입하신다. 죄악만이 그분과 우리가 대화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그분의 얼굴을 가린다(사 59:1~2). 문제는 하나님에게 소통하는 능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듣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진정한 자유는 그 옛날 유다 땅의 진흙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롬 6:17, 20).
예레미야는 왜 감옥에 있었나?
그래도 예레미야가 왜 감옥에 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렇게 책망하면서 예레미야를 가두었던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야훼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 도읍이 바빌론 왕의 손에 넘어가 점령당하리라고 하였느냐?’”(렘 32:3). 예레미야는 파멸과 어둠을 예언한 대가로 감옥에 갇혔다.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조언자, 평민들은 예루살렘의 종말과 그들 왕국의 종말과 그들 세상의 종말을 언급하는 반대론자의 이야기를 믿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종말에 관해 선포하면 당사자들에게 푸대접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투옥됐다. 하나냐처럼 그들의 거짓말을 옹호하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렘 28). 예레미야는 감성적으로 부드러웠지만, 진리에 관해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거짓을 믿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점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가장 충격적인 거짓이다. 눈앞에 펼쳐진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을 믿었고 매우 분명한 것을 부인했다. 세상의 종말에 관해 경고하기를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의 열셋째 해부터”(렘 25:3) 자신이 진흙 구덩이에 빠지는 순간까지 예레미야는 부흥과 개혁에 반기를 드는 왕과 제사장과 백성 앞에서 기도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대가는 죽음과 칼과 기근과 사로잡힘이라고 그는 경고했다(렘 15:2).
예레미야가 진실을 말한 대가로 바스훌은 그를 때리고 차꼬를 채웠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스훌(‘자유’를 뜻할 것이다.)에서 마골밋사빕(사면초가, 렘 20:3 참조)로 바꾸셨다고 선언했다. 게다가 바스홀은 친구들이 칼에 죽는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약속하셨다.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렘 20:4~5).
말씀이 이루어지다
수년이 흐르고 예레미야의 경고가 입증됐다. 느부갓네살은 거듭 다시 쳐들어왔고 약탈, 파괴, 노예화가 심해졌다. 영적 거인인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그 이름을 결코 알 수 없을 비열한 타협자들과 함께 거의 20년 전에 끌려갔다. 바벨론의 또 다른 파괴적인 공격으로 유다 왕 여호야긴과 선지자 에스겔이 10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유다 왕 요시야의 뒤를 이은 왕 4명은 형편없었다. 그중 네 번째는 가장 처참했다. 우유부단과 잘못된 조언으로 망가진 유다 왕 시드기야는 다윗의 보좌에 앉아 진실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린다. 통치 제십 년(렘 32:1) 때의 그런 모습은 1년도 가지 않는다. 소심함 그리고 백성과 조언자들에 대한 두려움의 감옥에 갇힌 그는 죄수 예레미야를 불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상담받는다(렘 38:14~18).
누가 자유로운가?
거짓을 믿고 따르는 인간의 수용력은 그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이다. 히스기야의 인격과 통치에 나타난 갈팡질팡하는 행태가 그에 대한 증거다. 그와 그의 모사들은 증거가 부족해서 예레미야를 거짓말쟁이 혹은 미치광이나 위험한 사람 취급한 것이 아니다. 결국 때가 이르렀고 성벽은 무너졌다. 선지자의 말은 실현됐다. 여전히 시드기야는 선지자의 말을 따르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는 왕이었음에도 늘 속박되어 있었다. 유약한 성품의 굴레에, 소심함의 굴레에, 진리 편에 서지 못하는 무능력의 굴레에 갇혔다. 왕이었지만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바벨론은 그의 아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 죽였고 그의 눈알을 도려낸 뒤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렘 39:6~7).
죄수 예레미야는 그 땅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느부갓네살의 시위대장이 그에게 말했다.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렘 40:4). 투옥되고 갇혔을 때도 그는 늘 자유로웠다. 진리가 그를 언제나 자유롭게 했기 때문이다(요 8:32).
레이얼 시저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부편집인이며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사랑한다.
발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