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 생활
살인자 용서하기
내 가족을 죽인 살인마들을 용서해야 하나요?
아이작 응돠니예(정리 : 지나 왈렌)
살인마들이 안식일에 재림교회 구역으로 몰려왔다. 인솔자는 다름 아닌 대회장 자신 그리고 교회가 운영하는 무고네로 병원의 진료부장인 그의 아들이었다.
1994년 4월 7일, 르완다 대학살이 시작되면서 남르완다 선교 지역의 교회 부지로 피신하는 사람이 많았다. 목회자와 가족들도 교우들과 함께 무리 지어 모였고 특별히 교회 건물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그곳으로 피했다.
나는 남르완다 선교 지역의 출판부장이었다. 사무실, 교회, 학교, 사택, 무고네로 병원 모두가 키부예라는 지역 한 군데에 모여 있었다.
르완다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기 시작하기 전날, 나는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 있는 르완다연합회 사무실에서 출판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날 밤 르완다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격추되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열네 살 된 나의 아들 폴이 살해당했고 아내와 남은 자녀들은 교회 부지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무고네로 병원의 직원 한 명이 전화로 알려 주었다.
4월 16일 안식일, 학살자들은 대회장과 그 아들의 도움을 받아 교회 구역으로 쳐들어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목사였던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그 대회장과 함께 일했다. 나도 함께 일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나의 아내,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숨어 있었던 목사들이 그 대회장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오고 있습니다. 콩고로 도망해야 하겠습니다. 호수에 띄울 배를 구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교회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던 군인이 구내에 있는 대회장의 집에 그 편지를 전달했다. 그런데 대회장은 이제 하나님이라도 그들을 도울 수 없다고 답변했다.
르완다 전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재림교인을 죽이려고 구내를 습격했다. 그들 중에는 재림교인도 있었다. 학살자들은 수류탄, 벌목용 칼 그리고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들고 왔다.
목회자 한 사람이 설교하고 있을 때 학살자들이 교회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목사를 총으로 쏴 죽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대회장의 집으로 달려가 도움을 구했지만 그는 외면했다. 병원으로 피하려고 달려간 사람들은 벌목용 칼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구내에서 살인이 여러 날 자행되었다. 학살자들은 도망한 사람들을 밤낮으로 찾아다녔다. 개까지 동원해서 수풀을 뒤졌다.
학살이 끝나 갈 7월 무렵, 나는 아내와 자녀 9명,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 셋, 형제 하나, 매부 하나 이렇게 모든 가족을 잃었다.
난민을 위한 교회
대학살 때문에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군인들에게 이끌려 간 곳은 북쪽 지역의 이산가족 캠프였다. 캠프에서 나는 유일한 목사였다. 캠프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좋은 일을 하느라 바쁠 때는 자신에게 일어난 나쁜 일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강하게 하셨다.
금요일 저녁, 캠프 주변의 도시를 걷다가 버려진 가톨릭 성당을 보았다. 나는 성당에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허락을 받았다. 캠프로 돌아와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초청하여 성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매 안식일에 회중이 모이기 시작했다. 집이 없었지만, 돈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집에 있을 때처럼 신실하게 십일조과 헌금을 드렸다. 때때로 우간다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를 방문하여 돈을 주었고 우리는 십일조를 구별하고 헌금을 드렸다. 르완다 교회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십일금을 따로 보관했고 헌금은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사용했다.
신앙이 다르지만 매 안식일 예배에 재림교인과 함께하는 사람이 많았다. 넉 달 후 캠프를 떠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300명이 침례 받기 위해 준비되었다.
7월에 학살이 끝나고 키갈리로 돌아갔다. 운영되고 있는 교회가 한 곳도 없었다. 나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다시 교회로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서서히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왔다. 2년 동안 르완다 교회 지도자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후 르완다연합회 출판부장에 선출됐다.
5년이 흘렀고 여태까지 받았던 초청 중에 가장 도전적인 요청을 받았다. 내 가족이 살해당한 무고네로 지역이 포함된 곳에서 대회장으로 일해 달라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나는 그 일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가기로 결심했다. 학살 이후 처음 그곳 땅을 밟는 것이었다. 나의 가족을 죽인 사람들과 일하러 가는 것이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그 사람들에게 전할 말을 주십시오.”
첫 안식일, 나는 지역 회의를 소집하여 이렇게 말했다.
“르완다연합회는 저를 이곳에 보내어 복음을 전하고 대회를 이끌게 했습니다. 여러분 중 누가 나의 가족을 죽였는지 아무도 저에게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저의 친구라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저의 친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정신으로 함께 일합시다.”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그 후 키갈리로 가서 동중앙르완다합회를 이끌었다. 2004년에 6만 5,000명이었던 신자가 현재 11만 명이 넘게 성장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1,200만의 르완다 인구 중에 재림교인은 64만 명이다. 현재 전도회에서 10만 명에게 침례 베풀기를 기대하며 성경 공부를 진행하고 있다.
사랑과 용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만약 하나님이 세상 전부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가서 그 살인자들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신다.
그 당시의 대회장과 그의 아들은 재판을 받고 반인륜적인 학살죄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현재 아버지는 죽었고, 아들은 수감 중이다.
내가 이산가족 캠프에 있을 때 한 기자가 내게 인터뷰를 청했다. 나의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복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성경을 꺼내 히브리서 10장 30~31절을 읽어 주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잘못을 행하는 자들을 벌하고 그 죄대로 갚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쉬운성경).
기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람들이 학살자들에 대해 나쁘게 말할 때, 나는 모두에 대하여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 사실이야말로 나처럼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언제든 누구라도 하나님께 가서 용서를 구하면 그분은 용서하신다. 하나님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란 없다.
나는 언젠가 나의 가족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힘을 얻고 주어진 삶을 계속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나님을 위해 산다.
아이작 응돠니예
동중앙르완다합회장이다.
지나 왈렌
대총회 선교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