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묵상
그분도 함께 아파하신다
죽음은 하나님 마음속에 머물 곳이 없다
제럴드 A. 클링바일
소리꾼의 구슬픈 노래와 피리 부는 사람의 타는 듯한 소리가 그날의 침묵을 깨웠다. 예수님이 나인 마을로 들어서셨을 때 그곳에는 죽음의 기운이 감돌았다. 의사 누가는 그곳을 ‘성읍’(눅 7:11)이라고 불렀지만, 실상은 거친 돌에 평평한 나무 지붕을 얹은 초라한 건물이 모여 있는 갈릴리인의 주거지였을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약 32킬로미터,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나인에 살았던 사람들은 유대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아니었다. 서기 1세기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숱한 사람처럼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사악한 로마 지배자에게 짓눌리는 일이 많았다. 나인에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특별한 아침에 가장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이 그것에 찾아왔다. 희망은 한 장례식 행렬에 나타났다.
만질 수 있는 하나님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우주와 은하계를 존재하도록 하신 살아 있는 말씀인 하나님께서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30여 년이 지난 후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이 매일 겪는 고통을 이해했다. 그분은 나사렛 목수의 집에서 일하면서 그런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이제 자신이 구원할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고 계셨다.
예수님이 나인에 홀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누가는 말한다. 병자를 치유하고 전에 없던 방식으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을 목격한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그분을 따랐다. 그들은 그 마을을 떠나 나인의 묘지로 가는 꽤 큰 장례 행렬을 만났다(눅 7:11~12). 죽은 사람은 당일에 묻히는 것이 당시 유대 장례식의 관례였다. 시신에 향유를 붓고 수의로 싸서 판자 위에 얹은 다음 성읍 외곽에 있는 굴이나 묘지로 옮겼다. 보통 가족 구성원은 30일 동안 곡을 했다.
그러나 죽음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지구 행성 통치를 주장하는 사탄의 방식이다. 죽음에 직면할 때마다, 벗어나고 싶을 만큼 악하고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의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마지막으로 감길 때 느끼는 고통과 상실을 보여 준다.
나인에 오기 전에 예수님은 죽음의 황망함과 슬픔을 이미 경험하신 게 분명하다. 애굽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복음서에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요셉은 일찍 죽었을지도 모른다.1 나인이 나사렛과 가깝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예수님이 고인과 그의 가족을 아셨을 수도 있다. 죽음과 상실에 익숙했더라도 예수님은 그러한 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자들의 슬픔에 매정하지 않으셨다. 창조주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이 겪는 고통에 무감각할 수가 없다.
장례 행렬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세 단계로 응했다고 누가는 기록한다. 예수님은 보셨고, 불쌍히 여기셨고, 말씀하셨다(13절). 우리도 슬피 울고 있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은 쉽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슬피 운다(예수님도 그랬다. 요 11:35 참조). 하지만 예수님은 말뿐 아니라 행동하시는 분이다.
행동하시는 하나님
시체가 옮겨질 예수님이 관으로 다가가시자 사람들은 숨을 멈춘다. 그분이 “그 어미의 독자”인 그 청년을 만지자 모든 것이 중단된다(눅 7:12). 모세의 법에서는 시체 만지는 것을 금했다. 부정하기 때문이다(신 19:11, 16). 시체를 만진 자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었다.
만진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권세와 확신으로 말씀하신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순간 누구도 감히 숨을 쉬거나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의 명령 후에 감도는 침묵을 나는 상상해 본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다. 처음에는 잘 모르게 그러나 곧 분명하게. 예수님의 음악 같은 목소리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준다. “빛이 있으라”고 말한 음성은 장례 행렬을 뒤덮고 있던 짙은 어둠 속으로 빛이 파고들게 한다. 그 청년은 몸을 일으켜 앉아서 말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그를 관에서 내려 주고 울고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로 이끄신다. 기쁨의 포옹이나 큰 찬양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누가의 짧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상세한 내용을 알려 주진 않지만 철저한 불가능이 분명하게 성취된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 죽음을 대면하실 때 죽음은 언제나 물러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상실과 고통을 보시고 우리의 마음에 ‘울지 말라’고 속삭이신다. 무리는 이 기적을 목격하고 놀란다.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에 경외심과 두려움이 가득 찬다. 이 경외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위대한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일어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모두 느낀다(16절). 여기서 위대한 선지자란 사랑하는 자녀를 어머니에게 돌려준 구약의 두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가리킨다(왕상 17:21~23; 왕하 4:31~35). 두 번째 깨달음은 진리에 가깝다. 비록 하나님이 잠깐 들른 게 아니라 영원히 헌신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온전히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고통을 느끼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이 땅에서 짧은 사역 기간 동안 죽은 사람을 한 명 이상 살리셨다. 이 기적은 어둠을 이긴 그분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예증이다. 그 기적들은 말씀이 곧 생명인 창조주를 소개한다. 그 사건들 속에서는 중요한 신학적 진술뿐 아니라 승리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고통을 느끼시는 하나님이 드러난다.
이 이야기에 대한 엘렌 화잇의 주석을 나는 좋아한다. “나인 성문에서 슬퍼하는 어머니 곁에 서 계시던 그분께서는 관 곁에서 슬퍼하는 모든 애곡하는 자를 주목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슬픔에 동정을 느끼신다. 지난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던 그분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 온유한 마음이다. 죽은 자를 살리신 그분의 말씀은 나인성의 청년에게 말씀하실 때와 같이 오늘날에도 효험이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 능력은 세월의 흐름으로 감소되지도, 넘치는 은혜의 끊임없는 활동으로 고갈되지도 않았다.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그분은 여전히 살아 계신 구주이시다”(소망, 319).
모든 슬퍼하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하나님은 슬퍼하신다. 그분은 슬피 우는 모든 남편 혹은 아내와 함께 우신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경험하고 있는 모든 형제자매와 삼촌, 고모,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의 아픈 마음을 하나님은 잘 아신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을 준비하신다. 부활의 아침에 태어난 영원한 생명이 그분께는 그렇게 큰일이 아니다. 나인의 입구에서 큰 소리로 찬양하는 그 어머니에게 물어보라.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사로를 끌어안으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라. 부활의 날이 오고 있다. 그 날이 목전에 와 있다. “다시 사망이 없고”(계 21:4) 눈물과 슬픔이 그저 희미한 기억으로 남을 때를 마음에 그려 보라.
1 요셉은 예수님에게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인간으로 오신 예수를 보호하도록 하늘 아버지께 부름 받았다.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부편집인이며 부활의 아침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발문
창조주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이 겪는 고통에 무감각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