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교리
프랑크 M. 하젤
“다시는 사망이 없고”
부활의 아침에 드러날 능력과 영광을 고대하라
어떤 사람도 이 경험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모두에게 엄습한다. 일찍 맞이하거나 늦게 맞이하는 차이만 있을 뿐 오는 것은 확실하다. 처음부터 이것은 인간 역사의 한 부분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가 그것을 대면한다.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그 영향 아래 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상관없다.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죽음의 그늘
우리 모두는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것은 너무나 무섭다.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삶의 정반대이며 절대적으로 영원하고 돌이킬 수 없다. 현대의 모든 의료 지식과 과학의 진보에도 우리는 그것을 피하거나 되돌릴 수 없다. 죽음이 발생하면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우리는 무력하고, 연약하고 절망적으로 외로움을 느낀다.
죽음의 한 가지 슬픈 결과는 분리이다. 죽음은 모든 관계를 파괴할 만큼 난폭하다. 그래서 죽음이란 우리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무서운 경험이다! 젊은이에게 죽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늘 지척에 있다. 언제 인생의 마지막을 대면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사랑 외에 죽음의 슬픈 경험만큼 아주 강렬한 다른 감정은 없다. 따라서 죽음 그리고 그에 따른 고통, 슬픔, 상실은 문학, 영화, 음악에서 단골 주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죽음으로 인해 생이 중단되고 우리 인체가 무감각해지고 차가워지며 결국 분해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맨 처음 창조하실 때 사용했던 재료로 돌아가는 것이다(창 2:7). 무생명 상태에서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고 지혜의 왕 솔로몬은 말한다.
하나님의 품성과 죽음
죽음은 생명을 나타내고 규명하는 모든 것을 헛되게 한다. 죽음은 생명의 파괴이며 따라서 모든 사랑 관계의 파국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종결시킨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인간이 그리고 인간과 창조주가 교류하며 삶을 즐기게 하셨다. 생명과 관계의 주인이신 그분에게 죽음은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이다(고전 15:26, 한글킹제임스).
죽음은 결코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포함된 게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상반된다. 하나님에게 죽음은 신성한 원칙이 아니다. 개체마다 소멸을 통해 생명이 전개되게 하는 ‘죽음’이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와 같이 잔인한 과정은 온화하고 동정심이 넘치는 그분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으며 그분의 사랑의 품성을 완전히 곡해시킨다.
죽음이 소름 끼치는 경험임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그분은 죽음으로 야기된 슬픔과 비탄을 이해하신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실 때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고통을 몸소 경험하셨다. 우리는 살려고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려고 태어나셨다. 십자가 죽음이 없다면, 예수님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가 될 수 없고(고전 15:3) 성경은 거짓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자원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이 우리의 구원에 중요한 핵심이지만 그분의 죽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전 15:4). 부활의 광채와 영광으로 사망의 세력을 정복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고 바울은 기록했다(17~18절).
시계는 움직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패배와 죽음이 가져오는 모든 부정적인 결과를 뒤엎어 버린다. 죽음이 가장 두려운 인간 경험이라면 부활은 가장 즐거운 경험이다. 죄로 인해 죽음이 분리시킨 것을 하나님의 부활은 다시 연합시킨다. 죽음은 우리의 관계를 막아서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제를 회복시킨다. 죽음은 생을 종결시키고 절망을 가져오지만 부활은 새 생명을 창조하고 희망을 회복시킨다.
죽음은 우리 몸의 존재를 끝내는 반면, 하나님의 부활은 권세와 영광 가운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주어질 새 몸을 회복시킨다(고전 15:42, 44; 살전 4:14~18).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 하나님은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이기신다.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전 15:54, 한글킹제임스). 부활에 담긴 하나님 사랑의 권세는 사망의 권세보다 훨씬 더 강하다.
부활은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요일 4:8, 16)은 또한 불멸하는 분이시다(딤전 6:16).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신다. 그분은 결코 죽지 않으신다. 그런 까닭에 부활에 나타난 그분의 사랑은 무궁한 유산을 남기며 죽음보다도 더 영원하다. 그것은 영생을 가져온다.
죄로 부패하거나 죄의 치명적인 결과로 인해 무너지는 삶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눈물, 슬픔, 고통이 없다. 부활의 삶에서는 그분이 행하신 일 그리고 그분만이 하실 수 있던 일로 인해 기쁨이 가득할 것이다. 부활로 인해 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깊이 감사할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에 머물지 않고 셋째 날 무덤에서 일어나셨기 때문에 감격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한다. 부활은 하나님 자신만큼이나 영광스럽고 아름답다.
프랑크 M. 하젤.
대총회 성경연구소 부소장으로 최근 선출되었다. 그전에는 오스트리아 보겐호펜 신학대학원에서 목사, 교사, 신학과장으로 일했다
사이드바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유일한 불멸의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받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날이 되기까지는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무의식 상태가 된다. 우리의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 있는 의인들은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공중으로 끌어 올려져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둘째 부활, 즉 불의한 자들의 부활은 1,000년 후에 있게 될 것이다(욥 19:25~27; 시 146:3~4; 전 9:5~6, 10; 단 12:2, 13; 사 25:8; 요 5:28~29; 11:11~14; 롬 6:23; 16; 고전 15:51~54; 골 3:4; 살전 4:13~17; 딤전 6:15; 계 2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