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연구
생(生)과 사(死)에 관한 문제
마크 A. 핀리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에서 부자는 바로 지옥에 갔고 나사로는 하늘(아브라함의 품)에 갔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죽은 사람이 무의식 상태에서 쉰다면 이 비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 비유가 잃은 양, 잃은 동전, 잃은 아들(눅 15장)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눅 16:1~11)로 이어지는 비유 중에서 다섯 번째 비유라는 게 중요하다. 비유들은 중대한 도덕적 원칙을 가르치기 위해 고안되었다. 따라서 비유는 모든 부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목자가 우리를 찾는다고 했는데 우리는 양처럼 털이나 네 발이 없다. 우리는 은전 같은 금속이 아니다. 각 비유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이 중요한 도덕적 교훈이냐?’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교훈을 파악하기보다는 비유의 세부 사항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려 한다면 큰 난관에 부딪힌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겠다고 해 보자. 하늘과 지옥 사이에서 대화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늘에 있는 사람이 지옥에서 불타는 사람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고통 받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아브라함은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 있을 만큼 큰 가슴을 지녔단 말인가?
그 비유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친구가 끊임없이 고통 당하는 모습을 우리가 보고 있다면 하늘은 아주 끔찍한 곳일 수밖에 없다.
1. 예수님은 왜 이 비유를 사용하셨는가? 어떤 교훈을 가르치고자 하셨는가?
유대인에게는 죽음을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 영원한 상실과 멸망을 감수하면서 아브라함의 안전한 품으로 가는 것으로 묘사하는 전통이 있었다.
2.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전하시려는 세 가지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유대에서 부(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난함은 하나님의 불쾌히 여김으로 인식됐다. 비유를 보면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여겨지는 부자는 지옥에, 가난한 사람은 하늘에 갔다. 예수께서는 예상되는 결과를 뒤집으셨다. 탐심, 부정직, 압제로 얻은 부유함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표가 아님을 보여 주셨다.
둘째, 그 비유에서 거대한 구렁텅이가 언급되다. 예수께서는 죽음 이후에 또 다른 기회가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삶에서 내린 결정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셋째, 바리새인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거절한다면 누군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초자연적인 기적도 그들은 거절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지적하신다.
3. 유대인은 예수님에게 언제나 표적을 구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잠시 후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는 어떤 표적을 주셨는가? 요한복음 11장 11~14, 43~44절을 읽으라.
결과적으로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나사로를 죽이려고 했다(요 12:10).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며 예수까지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눈에 수건을 쓰고 성경을 읽었다(고후 3:14~16). 성경이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한다는 말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요 5:39).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그들은 믿지 않았다.
예수의 말씀은 예언이기도 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했다 하시니라”(눅 16:31).
얼마나 놀라운 호소인가! 얼마나 절박한 경고인가! 성경은 우리의 최종 권위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강력한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 널리 알려진 유대 전통을 사용하셨다. 이것은 성경 전체와 멋지게 조화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