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이슈
죽음에 관한 새로운 것?
죽음은 여전히 죽음인가?
메를링 알로미아
우리는 매일 질병, 고통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비극인 죽음을 견뎌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고통과 슬픔으로 흘리는 눈물의 홍수는 노아 당시의 파괴적인 홍수만큼이나 엄청나다. 세상은 고통과 슬픔, 통곡과 장례로 가득하며 이것들은 인생 마지막에 우리를 기다리는 죽음의 운명을 상기시킨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것은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가? 과연 죽음이라는 골칫덩어리가 우리를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일까?
악마의 오래된 거짓말
우리가 처한 현재의 불행은 첫 부모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공개적으로 그분의 권위를 거절하고, 그 대신 거짓의 아비를 믿고 따르기로 선택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그들에게 확신시켰던 “살인자”요 “거짓의 아비”(요 8:44)의 거짓말을 믿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먹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눈이 밝아져 그들의 불순종을 따라 들어온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을 보았다. 창조주와 매일 만나는 일이 슬픔과 비극으로 바뀌었다. 죄의 새롭고 무서운 실체와 결과를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수치, 공포, 거짓, 자기변호라는 새로운 감정과 반응이 그들의 행동과 느낌을 지배했다. 하나님의 영생이라는 처음의 복을 거절함으로, 그들은 유혹자가 선사한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다.
그들은 이제 그저 죽을 죄인이 되어 에덴 집을 떠나야만 했고 다음과 같은 형벌의 선고를 들어야만 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 이후 영원히 이 땅에서의 삶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비극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 오래된 거짓말
그 저주는 수세기 동안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사탄의 속임수도 마찬가지다. 사탄은 모든 지역에 영혼 불멸 사상을 주입했다. 지성인들의 철학뿐 아니라, 문명화되지 않은 이들도 하나님의 계시를 배척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거짓말은 다시 수용되었다.
새 천년 시대에도 이런 비뚤어진 성향은 그대로이다. 현대성이라는 세련된 변장에 속아 인간은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속임수에 매달리고 있다. 놀랍게도 뉴에이지 운동은 에덴동산에서 처음 소개된 강신술을 정교하게 재가공한 것에 불과하다.
19세기 중반 이래로, 그 거짓말은 숱한 신, 약속, 이미지를 통해 나타났다. 뉴에이지주의자들은 새 천년이 물병자리 시대라고 선언했다. 1960년대 이래로 뉴에이지 사도들은 강신술 교리를 퍼뜨리기 위해 소위 과학적 발견과 함께 영화, 텔레비전, 인쇄 매체 그리고 수많은 서적과 잡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왔다. 영화 산업은 뉴에이지의 거짓말을 전하는 최고의 대변인이 되었다. 허다한 영화, 세미나, 기술, 운동, 음악, 신비 생태계, 회합, 기적, 비밀 관광, 초월 명상, 치유 에너지, 마법 등이 그 운동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신비 체험, 초월적인 기도라는 구실로 그런 주술에 문을 개방하는 교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갈보리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주적 그리스도’이다.
거짓말을 폭로하다
사탄이 자신의 속임수를 퍼뜨릴수록 바울의 경고에 유의해야만 한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 4:1). 사탄의 세력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 반역을 일으켜 자신의 미혹하는 활동을 확장할 것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재림 직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가능하다면 “택한 자들”(마 24:24)까지도 속이려고 함께 활동한다고 경고하셨다. 계시자 요한은 바벨론이라고 하는 사탄의 집단이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계 18:2)이 된다고 예언했다. 요한은 심령주의가 국가 지도자들과 함께 음모를 꾸며 세상을 속임수와 최종적인 고통으로 무너뜨리는 것을 보았다.
때의 마지막에 사탄은 자신의 사악한 올무로 인류를 꼼짝하지 못하게 붙들기 위해서 첫 번째 속임수 즉 ‘영혼 불멸’이라는 거짓을 이용할 것이다(쟁투, 588). 사탄은 절정에 이르러서는 세상을 종국적인 혼란으로 묻어 버리려고 심령주의를 짐승인 로마 가톨릭, 거짓 선지자인 미국과 함께 삼중 세력으로 사용하며 활동할 것이다(쟁투, 588).
영혼에 대한 뉴에이지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반대할 것이다. 아래 표에 나오는 양측의 대조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잘 요약해 준다.
영원한 안전
영원한 복음은 세 천사의 삼중 기별 즉 남은 교회가 선포하는 중요한 기별 중 하나이다. 성소가 제공하는 자유와 자비로운 은혜를 즐기는 동안 우리가 선포해야만 하는 기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요일 3:8)며 미혹에 사로잡힌 자들을 죽음의 감옥에서 해방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분의 말씀을 늘 상기하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메를링 알로미아
재림교회의 은퇴 교사, 행정가. 페루 리마 인근 페루 유니언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성경과 복음
뉴에이지와 심령주의
인간, 즉 영혼은 불멸이 아니다.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지닌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의 적
죽음은 우리의 친구
죽으면 산 사람과 모든 접촉이 끊어진다.
죽은 자는 산 사람과 교통할 수 있다.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활을 통해서뿐이다. 부활을 통해 불멸성과 동시에 현재와 동일한 우리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우리는 죽으면 스스로 환생하여 다른 몸이나 정체(심지어 곤충, 네발짐승, 새)로 계속 삶을 유지한다.
부활은 독특한 일회적 사건이다. 부활하면 우리는 도덕적·신체적 흠이 없게 되고 썩지 않는 완전성과 영원한 불멸성을 부여받는다.
환생은 반복된다. 죽은 사람은 수없이 환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실패와 도덕적 결함은 되풀이된다.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며 자기를 믿는 사람을 재림 때에 모두 부활시킬 것이라고 확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가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다.
사탄이 고안한 속임수인 영혼 불멸을 믿고 모두 멸망당하는 것이 목적이다. 예수님은 그를 “살인자”와 “거짓의 아비”(요 8:44)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