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 유산
KGB 제복을 입은 천사 1부
하나님은 숱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다
파벨 리베란스키
나는 형제 네 명과 함께 어린이와 청소년이 넘치는 친절하고 활동적인 교회에서 성장했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멸시를 당하는 가운데 재림교회 서적의 도움도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에 관하여 학교의 토론에 참여하기도 했다.
몰도바에 있는 재림교회 어린이들이 안식일에 학교에 출석하지 않자 분노 박해의 폭풍이 몰려왔다. 매 안식일 경찰과 학교 대표자 공산당 관리가 교회에 나타났다. 예배를 방해하고 부모들에게 벌금을 매기고 투옥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가 도리어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했다.
교회에서 우리는 음악을 배우고, 성경을 연구하고 규칙적으로 엘렌 화잇의 저술을 읽었다. 거센 무신론 체제의 박해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그리스도를 전하는지도 배웠다. 우리를 교회에 데려왔다는 이유로 종종 경찰이 부모들에게 벌금형을 선고하려고 모든 문을 막을 때마다 우리 어린이들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정원으로 줄행랑쳤다.
아이들은 나이에 맞는 공산당원 청년 단체에 가입했다. 7~11살은 10월당, 십 대들은 공산소년단, 더 나이 많은 청년들은 레닌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공산소년단 깃발에 입을 맞추며 당에 서약을 맹세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부모님을 사랑했으며 언젠가 자유롭게 되어 선교사가 되기를 꿈꿨다.
교회에 입교하고 몰도바 군인이 되다
17세 때 나는 20킬로미터 떨어진 교회에 걸어가서 어느 금요일 저녁 침례를 받았다. 음악은 나의 선교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몰도바에서는 교육적인 향상이 거의 불가능했다. 토요일 수업은 의무였다. 우리가 믿음을 부인하고 안식일을 범하도록 무신론자들은 갖은 애를 썼다. 거절하면 퇴학이었다. 공부를 할 수가 없게 되자 나는 스스로 유용한 기술을 많이 배웠다. 그리고 목사님 한 분이 소개해 준 <신화와 현실>을 읽고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신빙성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과 토론할 때 큰 도움을 얻었다.
1979년 11월 12일, 영장이 나왔다. 교회에서는 송별회를 마련하고 내가 믿음 안에 굳게 서도록 격려해 주었다.
어느 가을 아침,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술에 취해 떠들어 대는 징병자들 대열에 끼여 있었다. 거기서 첫 번째 시험을 만났다. 검사관이 내게 “2루블을 내세요.”라며 공산청년동맹 카드를 내민 것이다.
“저는 이 카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단체의 무신론적 사고방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녀는 빨리 받고 지나가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내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재림교인이고 공산청년동맹 카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카드를 받아.”그녀가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종교라는 허튼 생각을 네 머리에서 완전히 뽑아 버려!”
줄 서 있던 사람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 카드가 필요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완강했다. 누군가가 내 서류에 이미 서명해 버린 걸 알게 되었다. 속이 상했다.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공산당이 되기를 끊임없이 거부해 왔다. 그런데 그 카드가 내 주머니에 있게 되다니!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첫 번째 임무
우리는 북몰도바 벨치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했다. 그곳에서 마지막 조사와 신체검사를 받았다. 공산청년동맹 회원으로 나는 미사일 부대에 배속되었고 곧 자대 배치를 받게 된다고 들었다.
집과 교회, 가족을 멀리 떠나서 보내는 첫날 밤, 나는 앞으로의 군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수없이 기도했다. 막사 안의 판자 침대로 가면서 공산청년동맹 카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다. 그때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재림교회 드미트리 우나크 목사님이 생각났다. 목사님의 조언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막사에서 살짝 빠져나와 캄캄한 밤 하나님의 천사를 따라 목사님의 집을 발견했다. 주무시는 목사님과 사모님을 깨워 어떻게 목사님을 찾아오게 되었는지 설명드렸다. 두 분은 나의 공산청년동맹 카드에 대하여 흥미로워 하면서도 의구심을 가졌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 두 분은 내게 유익한 조언을 해 주었고 나의 공산청년동맹 카드와 개인 신상 카드를 보관해 주기로 했다. 목사님은 국가의 종교사무국장을 만나서 공산청년동맹 지도자들이 재림교인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고하기로 약속했다.
자대 배치를 받은 아브하즈의 구다우타에서 첫 번째 심각한 도전은 음식이었다. 거의 모든 음식이 돼지고기나 돼지기름으로 요리된 것이었다. 빵, 차, 절인 양배추와 오트밀밖에 먹을 수 없었다.
훈련이 시작되기 전, 지휘관의 사무실에 불려 가서 공산청년동맹 카드와 개인 신상 카드를 보여 달라고 요구받았다. “저는 공산청년동맹의 회원이 아닙니다.”
공산청년동맹 회원만이 비밀 미사일 부대에 배치되기 때문에 그들은 믿지 못했다. 침착하게 나의 믿음에 관하여 설명하고 국가법이라도 따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격분했다.
성경에 따라서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무기도 지니지 않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이 전쟁 중이었으므로 그들은 내게 국가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대답했다. 선임 장교는 내게 소련 군대 규정에 관한 책을 한 무더기 내밀면서 법을 어기면 얼마나 오래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나는 대답했다. “저는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몰아붙이고 사형을 선고한다 해도 제가 믿는 하나님께 신실할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들은 다시 생각해 보라며 나를 내보냈다. 군대에 있는 2년 동안은 믿음을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함께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소령
빈약한 식사와 혹독한 달리기, 체력 단련, 청소, 훈련, 6~7시간 수면, 장교들과 병사들의 눈총 속에 드디어 훈련이 시작되었다. 나의 신앙에 관한 소문이 금세 퍼졌다. 병사들 중 특히 모슬렘들은 종교적인 원칙에 굳게 선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나는 육상 시합에서 늘 우승했고 기술 수업도 완전히 익혔다. 사람들이 어디에서 그런 기술들을 배웠냐고 물으면 ‘배운 적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곧 모두에게 존경받게 되었다.
소련 비밀경찰의 최고 지휘자인 세르뒤코프 소령이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고등 교육을 받고 예모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나의 삶과 종교적인 신념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령은 내게 어떤 재림교인들이 뿌린 책자를 보여 주었다. 어느 날 밤 그들이 흑해 주변 지역에 반정부 책자를 뿌렸고 소령의 사무실 우편함에도 그 책자가 있었다. 소령은 그 책자를 뿌린 장본인을 찾고 싶어 했다.
그 내용은 우리 교회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것이라고 나는 소령에게 확신시켰다. 이른바 재림교회 개혁파가 저지른 일일지도 몰랐다. 소령은 비밀 부대 안에 재림교인이 있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1980년 올림픽 개최를 준비하고 있는 소치 근처의 부대로 옮겨 달라고 제안했다. 소령은 내게 바쿠 지역 지휘관 시니킨에게 편지하라고 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적어라.”
나는 진술서를 작성하며 이송을 요구했다. 양심의 자유에 관한 소련법 52항을 언급하며 군대에 있는 동안 나의 신앙적인 신념을 실행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소령은 나의 진술서를 받고 며칠 안에 답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호에 계속)
파벨 리베란스키
유로-아시아지회 출판전도•청지기•신탁부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부모님을 사랑했으며 언젠가 자유롭게 되어 선교사가 되기를 꿈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