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우리의 믿음대로 아니면 그분의 뜻대로?
프랭크 A. 캠벨
스무 살인 딸아이는 캐나다 몬트리올 맥길 대학에서 과학 학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사람과 동물을 사랑했고 의사나 수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의 딸 아다피 캠벨은 학교가 아니라 병상에서 수개월을 보내고 있었다. 뇌종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성경 구절 이야기
여러 나라에 있는 친구, 가족들이 기도해 주었다. 아이가 병원 또는 아파트에 누워 있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 어느 교회의 자매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그날 당장 내 딸이 제 발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듯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 자매는 크게 실망했다. 몇 년 후에 자신이 암으로 죽어 갈 때까지도 믿음을 되찾지 못하여 몸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지 못할 정도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해 상반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마태복음 6장 10절에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프로그램에 복종하라고 가르치신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지만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는 응답도 받기 전부터 떼어 놓은 당상인 양 믿으라고 하신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둘 중 어느 쪽이 하나님의 뜻인가? 복종은 믿음의 반대인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복종, 즉 내가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그녀가 병이 낫지 않을 경우를 감안하는 태도, 만약 하나님의 뜻이라면 낫게 해 달라는, 지혜로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달라는 조심스런 간청은 어느 정도까지여야 하는가? 이렇게 여지를 남기는 간구는 어디까지가 진짜 믿음인가?
환자를 위해 장로들이 하나같이 ‘만약’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에 불편을 느낀 어느 설교자를 나는 알고 있다. 결국 그가 끼어들어 기도를 마무리했다. 사춘기 소년이나 할 수 있을 법한 거룩한 용기를 발휘하여 그는 야고보서 5장 15절에 언급된 “믿음의 기도”라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 환자는 여러 해를 더 살았다.
그 설교자가 옳았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팔을 움직인 것은 조심스런 장로들이었을까?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들으신 것일까?
하나님의 실종
췌장암에 걸린 찰스 D. 브룩스 목사에게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진단을 내리자 유명한 재림교회 복음전도자였던 그는 그보다 앞선 유명한 복음전도자가 고백했던 다음의 성경절을 읊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딤후 4:7).
브룩스 목사는 히스기야처럼 몇 년 더, 심지어 며칠 더 살게 해 달라고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 허다한 사람이 그를 위해 기도했다. 육대주를 종횡무진하며 2만 명을 침례 받게 한 그는 85세 나이로 결국 사망했다.
차이 없는 구분
이 질문에 관하여 성경을 탐구해 보면 사실 믿음과 복종이라는 이분법은 그릇된 이분법임을 알 수 있다. 차이가 없는 구분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다스리는 분이심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믿음과 복종은 양자택일적인 접근이 아니라 둘 다 합당한 과정의 한 부분이다. 복종할 만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믿을 만한 하나님일 수도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믿음과 복종이 하나임을 보여 주셨다. 아버지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면서 그분 또한 자신의 복종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도 기도할 때는 믿음과 복종 둘 다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보다 이것을 더 잘 이해하고 말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느부갓네살 왕의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믿음과 복종의 접점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활활 타는 풀무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능히 건져 내실 수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다(단 3:16~17).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대답한 것처럼 이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절).
새로운 기도
‘세 히브리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알게 된 후 나는 ‘다니엘서 3장의 정신’으로 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나의 딸을 낫게 하실 수 있음을 믿으며 그러실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언젠가는, 어떻게든, 내 아이가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맥길 대학에서 공부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또 똑같은 신념으로 그분께서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여전히 가짜 신에게 절하거나 그 신상 앞에 엎드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의 믿음과 충성, 확신과 복종은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발전했다.
아다피와 함께 안식일을 그리고 그 너머를
어느 안식일, 나는 식구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온종일 아다피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병이 진행되면서 딸아이의 언어 능력이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오타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며칠 동안 아이와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신앙적 관심이 그다지 깊지 않은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름 아닌 나 자신이 30년 이상 영적 광야에서 방황하다 방금 돌아와 다시 신생아 그리스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구약의 한 구절을 읽어 주었을 때였다. 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었다 싶을 정도로 확실하게 딸아이가 말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을 만나고 싶어요.” 아이의 고백을 들으면서 나는 기쁨과 경이를 동시에 느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오타와에 없는 동안 아이가 그리스도께 마음을 드린 것이다. 그 안식일 아침, 그 안식일 아침의 선언은 이 세상에 내가 딸에게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오타와로 돌아온 뒤 아이의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아다피가 숨을 거뒀어요.” 나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내 기도의 나머지 부분처럼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구했다. 그때까지는 그분께서 아이를 낫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고 기대한 대로 아니하실지라도 그분의 은혜 안에서 그분의 주권을 존중하기로 나는 결심했다.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믿음과 복종을 연결해 주는 올바른 접속사는 ‘혹은’이 아니라 ‘그리고’라는 것을. 그러니 아무도 믿음을 발휘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고 또 너무 자신만만하다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질 필요도 없다.
프랭크 A. 캠벨
ARISE!의 회장이다.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하여 재림교회와 기타 간행물 여러 곳에 글을 기고했다.
발문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