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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얼 시저
은혜 안에서 발견하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은혜란 무엇일까? 언뜻 생각하기에 은혜란 매우 추상적인 말처럼 들린다. 구원을 얻게 하는 은혜란 믿어야 할 어떤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은혜는 경험이기도 하다.
‘척 콜슨 교도소 선교회’ 교육 담당자 덕분에 작은 감자 한 알이 은혜로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녀에게 교훈을 받기 전부터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분의 은혜 없이는 존재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다는 사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것 또한 잘 알았다. 그러나 감방에 갇혀 있는 형제자매에게 그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수업을 들어 본 적은 없다. 그러다가 척 콜슨 교도소 선교회의 ‘감자 교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다.
강사는 감자 여러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우리에게 하나씩 집으라고 했다. 잠시 후에는 집었던 감자를 탁자 위에 도로 올려놓으라고 했다. 그런 다음 흥미롭게도 우리를 다시 탁자로 보내어 아까 집었던 감자를 들고 오라고 했다.
우리는 각자가 집었던 감자를 알고 있었다. 눈이 예리한 덕분일 수도 있고 확신이 넘쳐서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감자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란 우리 사회의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섬기는 데 필요한 아낌없는 보살핌이다.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민한 사랑이다. 늘 형제자매를 그 모습 그대로 대하게 하는 사랑이다. 시끄러운 고함이 오가는 야단법석 속에서도 자신의 아기 울음소리를 구별해 낼 수 있는 엄마 같은 사랑이다. 차분하게 자녀의 수를 다 세고 나서 누가 없어졌는지 알아내는, 그 자녀가 어디서 헤매고 있을지를 알고 있는, 광야에서 그 자녀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쉴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다(눅 15:3~7).
은혜는 어떻게 나타날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각 상황에 맞는 방식으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는 데 ‘감자를 통한 교육’은 꼭 필요한 실물 교훈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적어도 두 가지 대조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딛 2:11). 먼저 우리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차이점에 아랑곳하지 않고 은혜는 모두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자랑스럽든지 부끄럽든지, 위대하든지 하찮든지 상관이 없다.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세상 모두를 한꺼번에 사랑하신다(요 3:16).
대조적인 또 하나의 의미를 찾자면, 하나님은 각자의 차이가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개인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일일이 사랑하시고 일일이 은혜를 주신다. 우쭐한 사람이든, 기가 꺾인 사람이든, 우리가 죄인이라 그분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든 못 깨달았든 말이다. 죄인이 단 한 명이라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을 것이다”(실물, 187). 독립적인 한 사람에게도, 인류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기적이다.
이 기적은 대기 중인 게 아니다. 우리가 울부짖기도 전에 이 기적은 이미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이미 온 인류에게 “비추셨다”는 것이 그리스어 ‘에피파이노’에 암시된 메시지다. 그분께서는 눈부신 섬광처럼 빛났다. 영광 중에 주의 천사 한 명이 나타나는 바람에 가축을 돌보던 목자들이 갑자기 “크게 무서워” 하게 되었던 어느 조용한 밤처럼 말이다. 천사 하나가 나타난 이유는 우리를 진멸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자신의 풍성한 은혜를 보증하려는 그분의 무한한 긍휼 때문이다.
은혜는 결코 쩨쩨하지 않다. 항상 차고 넘친다(롬 5:20). 어둠 속에 나타난 은혜의 광채에 목자들의 눈이 적응됐을 때 그 사실이 입증된 것처럼 말이다. “수많은 천군”(눅 2:13)이 찬양을 부르며 더 큰 영광으로 하늘을 가득 채우며 놀랍도록 풍성한 은혜를 소개하고 알려 주었다.
그분은 한결같이 변함없는 겸손으로 순간순간의 섭리 속에서 자신을 비추신다. 자신에게 먹을 것을 의지하는 모든 피조물을 섬기신다(시 145:15). 악인과 의인을 비추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내려 주신다(마 5:45). 어리석은 자가 그분께 생명, 사고력, 양식, 비, 햇빛을 받아 사는 것인데도 자기 삶의 근원이신 분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떠들 수 있는 것 또한 그분 덕분이다.
다시 말하건대 그것은 풍성한 은혜이다. 외모를 숭상하는 멍청이(삼상 16:7), 옷차림과 가식적인 위엄에 목숨 거는 인간이 만약 한밤중 베들레헴 들판의 겸손한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의 섬광을 대면했다면 그것을 어찌 감당해 낼 수 있었겠는가. 그날 밤 베들레헴에 기별꾼이 전해 준 두말할 나위 없는 복음 그리고 타락한 인간이 숨 쉬며 존재하는 동안 밤낮으로 들려오는 섭리의 음성, 이 모두가 순전히 은혜이다. 모두를 위한 은혜인 동시에 한 알의 감자처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독특하고 분에 넘치게 다가오는 은혜이다.
더 잘 보살피려면
나는 이제 깨달았다. 감자를 더 잘 아는 것은 감자에 더 많이 관심을 갖는 것과 관계 있다는 것을. 감자를 애지중지할수록 그만큼 관심도 많아진다. 눈이 몇 개인지 세어 보고, 어디가 오목한지, 윤곽과 모양이 어떤지, 얼마나 큰지, 손에 쥐면 어떤 느낌인지, 탁자에 놓으면 어떻게 보이는지, 다른 감자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자루 속에 들어 있는 20개 중 하나가 아니라 나에게 특별한 감자가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나와 여러분을 돌보시는 방식이자 이유이다.
그분께서는 어떻게 돌보시는가? 속속들이 돌보신다.
내 발밑에 떨어져 죽은 참새도 그분은 알고 계신다. 그러나 내가 공중의 새보다 더 중요한 존재임을 깨닫기를 그분은 바라신다(마 6:26). 내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나만의 특별한 상황을 그분은 꿰고 계신다.
왜 그렇게 특별하게 돌보실까?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보살핌은 사랑의 표현이다(요일 4:8). 그분은 세상을 사랑하시지만(요 3:16), 모든 인류가 그분의 관심 대상이지만(행 17:28),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 은혜를 베푸시지만(롬 8:19~23), 한편으로 그분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각 사람을 하나하나 사랑하신다.
나는 ‘감자 수업’을 통해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내가 내 감자를 더욱 사랑했다면 다른 감자들과 내 감자를 구별하기가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별하시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분의 까다로움은 심판의 속성을 증명해 주는 증거가 아니다. 그분의 은혜로 내 상황을 완벽하게 처리해 주실 것임을 보장하는 것이다.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으로 그분께서는 내 안에 들어오셔서 속 깊은 곳에 있는 모든 미묘한 문제에 관여하신다. 그분께서는 내 체질을 아시기에, 내 머리카락의 숫자도 알고 계시기에,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나를 괴롭히는 특정한 문제들을 아시기에 그리고 여러분과 구별된 나만의 평화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 계획들을 아시기에 적당한 때에 나를 구하실 수 있다.
은혜와 노아
약할 때와 강할 때, 의욕이 넘칠 때와 늘어질 때, 즉흥적일 때와 주도면밀할 때가 뒤섞여 진행되는 삶의 실제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담긴 감화력과 에너지를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을까? 무엇을 하든 우리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결코 잠들지 않는 “인간의 이해관계와 권력, 욕망 등 일체의 승부”(교육, 173)에서 ‘하나님’, ‘구원’,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대답은 모호하면서도 틀림없다.
은혜, 즉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왠지 모호해 보인다. “주 예수께서 자기의 긍휼과 풍성한 은총을 드러내심으로 인간의 심령에 관하여 실험”을 진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목사, 18). 이런 실험은 혼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사탄과 그의 일꾼들이 여전히 내 안에 나타나는 결함을 모조리 지적하면서 하나님을 비난하고 그분의 은혜에 도전장을 내미는 순간에도,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는 나를 자라게 하고 전진하게 하기 때문이다(요 12:10; 슥 3:1~5). 그들은 늘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은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계신다. 죄와 의가 혼란스럽게 섞여 있어도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결국 내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을 그분은 알고 계신다(약 1:4).
그러면서도 구원하는 은혜는 의심 많은 기드온의 선함이 칭송받는 것처럼, 자녀를 제물로 바친 입다처럼 그리고 여자를 밝히는 삼손처럼 애매하면서도 분명하다. 잇따라 거짓말하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처럼 은혜는 아리송하면서도 선명하다(창 12:10~20; 20:1~2; 히 11:8~12; 롬 4:11). 자신의 미덕에 일관성이 없었지만 경이로운 은혜를 받아들인 최초의 사람으로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노아처럼, 은혜는 모호하면서도 확실하다.
은혜는 적어도 객관적인 분석으로 볼 때는 분명 알쏭달쏭하다. 은혜의 예증으로 가장 처음 소개되는 인간이 노아이기 때문이다(창 6:8~9).
노아는 100년 동안 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노아가 지은 구원의 방주에 올라탄 건 자기 가족과 짐승 얼마밖에 없다. 더군다나 홍수 이후에 노아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그가 술에 취해 창피를 당한 사건이다(창 9:20~25). 그럼에도 그는 자기 시대에 돋보이는 의인이었고 그래서 “당대에 완전한 자”(창 6:9)라는 평을 받을 만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어떤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 역시 확실히 알고 싶은 부분이다. 만약 성실했으나 비생산적이고 무절제했던 노아가 어떤 이유에서건 은혜를 받을 수 있었다면, 나 또한 노아에게 꿀릴 게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 역시 자신만의 부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면, 역시 노아에게 꿀릴 게 없을지도 모른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서는 노아의 그런 평판에 대한 근거를 알려 준다. 그 근거란 “믿음을 따르는 의”이다. 이는 노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선량함이다. 두렵도록 영광스러운 기별꾼의 말을 믿는 것이다. 겁을 낸다는 것은 이해는 되더라도 결국 불필요하고 부당하며 우주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별꾼을 환영해야 한다. 그가 다음과 같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기 때문이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놀라운 소식이다. 모두를 위한 소식, 구원하는 은혜가 나타난다는 소식이다.
모두를 위한 은혜
구원하는 은혜가 모두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콧구멍과 신경계의 전류를 통해 느껴지는 생명의 호흡처럼 모호하면서도 분명하게 말이다.
처녀의 순결, 잉태라는 연약함, 마구간이라는 어색함, 33년 6개월의 인생, 갈보리 십자가의 적나라한 희생, 부활이라는 명백한 기적, 요한복음 14장 1~3절의 선명한 약속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은혜는 인류에게 하나님이 선사한 지원책의 결정체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우리의 부족함, 공허를 우리 자신이 인정할 때에만 그 은혜가 작동한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공허를 채울 수 있다. 우리가 가난하고 겸손하게 된다면, 무한한 지원책을 즐겨 받을 만큼 빈털터리가 된다면, 은혜는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덕을 끼칠 것이다.
레이얼 시저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며 한없이 놀라운 은혜에 끝없이 놀라고 있다.
발문
“대부분이 자신의 감자를 알아보았다. 하나님은 절대 자기 자녀를 뒤섞지 않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