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 생활
희생자에서 승리자로
놀라운 믿음의 여정
앨버트 카자코
내 인생의 처음 34년은 아프리카의 빈곤한 나라 말라위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아내 유니스와 결혼하고 두 아들, 앨버트 주니어와 데이비스를 낳았다. 충격적인 사건이 가족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기 전까지 작은 진료소를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불행 속에서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이 충격적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와 가족을 위한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하셨음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공포의 불법 칩입자들
2001년 3월, 가족과 나는 여러 지역 교회들이 공원과 경기장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는 ‘연합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커지는 소음에 놀라 잠에서 깨었다. 도둑들이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올 때는 총소리로 바뀌었다.
침대에서 뛰쳐나와 부엌에서 그들을 대면했다. 8명이 총, 도끼,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면서 나는 침착하려고 애썼다. 가진 게 별로 없지만 해치지 않는다면 가능한 한 뭐든지 주겠다고 했다.
그들은 돈을 요구했는데 솔직하게 나는 돈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한 남자가 총을 내 이마에 대고 “이게 장난감처럼 보여?”라고 위협적으로 물었다. 그들은 나를 때리며 돈을 요구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자 나의 손을 묶고 침실로 향했다. 2주 후면 둘째를 낳게 될 아내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내 생애 최악의 순간이었다. 그만 때리라고 애원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가라고 했다. 마침내 그들은 구타를 멈추고 진료소 도구들을 포함하여 챙길 수 있는 것은 몽땅 챙겨 갔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우리의 목숨을 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2주 후에 아들 데이비스가 건강하게 태어났을 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다.
새로운 길
강도 사건을 통해 가족과 내가 말라위에서는 안전하지 않으며 여기서는 미래가 어둡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미국 이민을 위해 해결해야 할 걸림돌들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항공권을 마련할 돈도 없었다. 대출을 받아 항공권을 구입했을 때 미국으로 향하는 기적과 같은 여행이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차는 심하게 흔들렸고 시속 30킬로미터로 달리기도 힘들었다. 결국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비행기 시간을 다시 조정했다.
암스테르담에서 디트로이트로 가는 구간이 경로에 포함되어 있었다. 비행기 옆자리 승객이 읽고 있는 책 페이지의 제목을 유심히 살폈다. 안식일에 관한 것이었다. 재림교인에게로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자신을 소개했고 그도 재림교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케빈 혼이었고 사업차 영국에 갔다가 미시간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디트로이트에서 헤어질 때 그는 명함을 건네주며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나는 조지아 애틀랜타에 있는 목적지를 향해 계속 여행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도움
간호사 프로그램에 등록할 때까지 친척 집에 머물 생각으로 애틀랜타에 도착했다. 말라위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미국에 있는 간호학교에 등록하기가 쉽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정반대였다. 3주가 지나도 등록을 못하여 친척 집에 더 머물 수가 없었다. 갈 데가 없었으므로 나는 비행기에서 만난 친구를 떠올렸다. 그가 내가 미국에서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케빈에게 사정을 말하고 말라위로 돌아가기 전에 일주일 정도 머물 수 있는지 물었다. 한 시간 뒤 케빈은 미시간 새기노로 가는 버스를 타라고 알려 주었다. 거의 24시간을 여행한 후, 케빈과 그의 아내 디가 늦은 밤 나를 마중하러 왔다. 케빈의 집에 도착하자 자정이 다 되었는데 그 집의 네 아이, 제프, 크리스티, 케이티, 조시가 나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니 막내 조시가 밖에서 꺾은 꽃을 갖다 주었다. 진심으로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그날 오후 디는 이틀 동안 휴가를 갈 예정이라며 자신들이 없는 동안 집에 있으면 된다고 했다. “혼자 이곳에 있으라고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저희가 없는 동안 동물들을 돌봐 줄 수 있나요?”라는 게 그녀의 대답이었다. 짧은 만남으로 어떻게 나를 그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내 여권을 가져가라고 했지만 디는 “아니에요, 앨버트. 사람을 믿지 못하면 삶은 의미를 잃어요.”라며 거절했다. 내게 미니밴 열쇠를 주며 미들랜드 재림교회를 찾아가는 길을 알려 주고 성도 몇이 나를 돌봐 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앞을 향하여
케빈의 가족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내가 미국에 온 목적에 대해 함께 의논했다. 간호학을 공부하고 가족도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케빈과 디는 나의 첫 번째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주었다. 나의 후원자로 나서 학생비자를 얻게 해 주었고 나는 곧 지역에 있는 학교에 등록할 수 있었다. 디의 아버지 래리 버처가 자신의 농장에 나를 채용하여 생활비를 얻었고 가족을 데려올 돈도 모았다. 미들랜드 교회 성도들은 가족의 항공권 비용을 마련해 주었다. 마침내 아내 유니스와 두 아들이 말라위를 떠나 미국으로 왔다!
가족과 함께 래리의 농장에 있는 집에 살았다. 래리는 우리에게 최소한의 월세만 받았고 교회 성도들은 음식과 기타 물품들을 계속 후원했다. 감사한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간호학교는 어려웠지만 나는 하나님께 성공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했고 2005년, 드디어 간호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은 메릴랜드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아내와 함께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이 놀라운 여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무엇보다 중요한 교훈은 이것이다.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희망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방금 너를 위한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
앨버트 카자코
가족과 함께 2007년부터 메릴랜드에 거주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늘 찬양하며 지낸다.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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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친구 : 앨버트 카자코(가운데)가 케빈 혼, 디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내외를 통해 앨버트와 그의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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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코 가족 : (왼쪽부터) 앨버트 카자코, 아들 앨버트 주니어, 아내 유니스, 아들 데이비스가 2015년 앨버트 주니어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