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교리
아이케 뮐러
복음과 건강
닿음의 기적과 말씀의 경이
허다한 사람이 치료받기 위해 예수께 왔다. 예수는 나병, 열병, 오그라든 손, 중풍, 귀신들 림, 심지어는 죽음까지 온갖 질병을 치유하셨다.
그중에서 예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 싶었던 여인의 이야기가 도드라진다. 예수께 간청한 사람이 많았지만 이 여인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그녀는 예수에게 몰래 다가가려고 했다. “무리 가운데 끼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막 5:27~28).
어떻게 이토록 남다른 전략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남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미신에 빠져서?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에? 아니면 그 정도로 믿음이 깊었기 때문에? 그 이유는 뚜렷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수가 고통을 끝내다
그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25절)으로 고통 당했고, “많은 괴로움”(26절)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의사라고 하는 자들이 사용한 희한한 치료법도 분명 그 괴로움에 한몫했다. 거기에는 “가진 것도 다 허비”(26절)한 일 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치욕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부정(不淨)한 여인이었다. 가족과 사회의 눈에 비치는 그녀는 전염병을 옮기는 존재였다. 그녀에게나 그녀의 집에 접근하는 사람은 누구나 더러워지고 전염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여인은 고립감을 느꼈다. 안식일 예배도 참석할 수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마가는 이 여인에게 예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기록한다. 그분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다가 멈추셨다. 그리고 누가 자기에게 손을 대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끌며 대화하신다. 심지어 제자들과 약간 티격태격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30~32절).
예수의 말에 제자들은 어리둥절해한다. 무리가 밀려와 의도하지 않게 예수를 만지게 된다는 걸 제자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여인을 찾는다. 그리스어 본문에 의하면 누가 자기를 만졌는지를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자기를 만진 그 여인 외에 아무도 찾지 않았다(32절).
왜 예수님은 그렇게 끈덕지게 행동하셨는가? 그 여인은 예수를 만진 순간 치유되었다. 거기에 개의치 않고 예수님은 야이로의 죽어 가는 딸을 치료하러 계속 걸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적인 치료 그 이상을 염두에 두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34절).
예수의 선언은 ‘네 믿음이 너를 치유했다.’에 그치지 않는다. 그분은 포괄적 의미의 ‘안녕’을 언급하신 것이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는 ‘치유(therapeuo, 영어 ‘therapy’의 어원)’가 아니라 ‘구원’(sozo)이다. 예수께서는 여인을 육체적 고통에서 구원하셨다. 더 중요하게는 사회 내의 비인간적인 현장에서 그녀를 구원하신 것이다. 그분은 그녀를 정서적, 정신적, 영적으로 구원하셨다. 두 번째 선물이 첫 번째보다 훨씬 더 크다.
예수께서 평안을 주시다
예수께서는 “평안히 가라”(34절)는 말을 덧붙이셔서 그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당시에 이 평안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 게 아니다. 로마인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었고, 드러나거나 감추어진 갈등과 군사 활동이 계속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평안 혹은 살롬의 의미는 다양하다. 그것은 개인적,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으로 온전한 안녕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의 복음만이 가져올 수 있는 화해의 결과이다(행 10:36). 그것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화해시킨다. 그 여인이 예수와 만나서 얻은 화해는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예수를 만짐으로 신체적으로 치유받았지만 예수와 대화함으로 온전하게 회복됐다.
이러한 온전한 ‘안녕(well-being)’이야말로 여인이 은밀하게 갈망했던 것이다. 예수께 손을 대려는 계획을 처음 마음에 두고 있었을 때,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막 5:28). 그녀가 처음 품었던 소망은 ‘안녕’이었다. 단순한 닿음이 안녕을 가져올 수 있다는 그녀의 생각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그분과의 개인적인 만남 없이는 이런 회복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신다. 그것은 은밀하게 챙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경험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회복이란 추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차원 높은 관계적 사건이다. 그 여인은 은밀한 행동이 드러남으로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직면해야 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두려워 떨며 예수께 다가갔다(33절). 어쩌면 예수께서 자신의 치유를 철회하거나 비싼 치료비를 내라고 하거나 사람들 면전에서 수치를 주지 않을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일을 전혀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녀의 간증을 들으시고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완전하게 회복시키신다. 그 여인은 이제 소외된 낙오자가 아니라 사회에서 칭송받는 일원이 되었다. 이전에는 배척받는 불가촉천민이었지만 이제 회복된 여인이 되었다.
예수가 재창조하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다름 아닌 인류 회복을 위해서다. 환상 중에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이미 마리아에게 전해들은 말을 확인시켜 주는 장면을 기억해 보라.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예수의 목적이었다.
복음서에서 귀신들은 협박하고 큰 두려움을 일으켰다. 종교 지도자들은 무가치해 보이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멀리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킴으로 이런 두려움과 거절에 대응하셨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재창조하여 본래의 창조 목적대로 안녕을 얻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심으로(마 5~7장), 수많은 치료 봉사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죽음으로 이 사명을 성취하셨다.
예수와 함께하는 여정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지점에 있다. 정서적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신체적 치유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영적 화해를 구하는 이도 있다. 이 익명의 여인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회복이 필요하다. 그녀의 이야기에서는 말한다. 오직 예수만이 진짜로 회복시킬 수 있다고.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구원’을 받기만 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맡긴 사명의 대사로 부름 받았다. 우리 모두가 신체를 회복시켜 주라고 부름 받은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예수의 정서적, 정신적, 영적 치유를 제공할 수 있다.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치유하도록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신 것처럼(마 10:1, 7~8), 우리도 이 세대를 위한 회복의 대리자가 되라고 부름 받았다.
아이케 뮐러
필리핀 실랑에 소재한 재림교회 국제대학원(AIIAS)의 신약학 조교수이다. 루비카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고 있다.
사이드바
그리스도인의 품행
우리는 개인 생활,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서 성서의 원칙과 조화되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경건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우리 주님의 품성을 재창조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생애에 그리스도와 같은 순결과 건강과 기쁨을 낳게 될 일들에만 관계한다. 이것은 우리의 오락과 여흥이 그리스도인의 취향과 아름다움의 최고 표준에 맞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문화적인 차이점들은 인정할지라도, 우리의 의복은 단순하고 정숙하고 산뜻해야 하며, 그들의 참된 미가 외양을 꾸미는 데 있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부드럽고 유순한 정신을 가꾸는 데 있는 자들에게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육체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것을 현명하게 돌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적절한 운동 및 휴식과 더불어 가능한 한 건강에 가장 유익한 음식을 취해야 하며 성경에 명시된 부정한 식품들을 삼가야 한다. 주정 음료, 담배 및 마약과 마취제의 무책임한 사용은 신체에 해가 되므로, 우리는 그것들도 삼가야 한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육체가 우리의 건강과 기쁨과 선량함을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훈육에 부합되게 하는 일에는 무슨 일에나 참여해야 한다(창 7:2; 출 20:15; 레 11:1~47; 시 106:3; 롬 12:1~2; 고전 6:19~20; 10:31; 고후 6:14~7:1; 10:5; 엡 5:1~21; 빌 2:4; 4:8; 딤전 2:9~10; 딛 2:11~12; 벧전 3:1~4; 요일 2:6; 요삼 1:2).
*기본교리 중 2015년 대총회에서 수정된 부분(밑줄)은 <교회지남> 편집실에서 자체 번역한 것이며 한국어로는 아직 공식적으로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발문
회복이란 추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차원 높은 관계적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