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전망
안식과 기쁨의 날
지금과 영원을 위해
테드 N. C. 윌슨
얼마 전 내가 운영하는 페이스북의 ‘질의응답’ 코너에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지켜야만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은 독자들이 이미 들었거나 자문해 보았을 다음의 질문들과 유사하다. “안식일에 수영을 해도 되는가?”, “안식일에 요리를 해도 되는가?”, “안식일에 외식하는 것은 괜찮은가?”, “안식일에 _____________을/를(빈칸을 채워 보라.) 해도 되는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는지에 관하여 세세한 규정집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우리의 기본교리 모두가 그렇듯, 우리는 신조와 행실의 기초인 성경으로 돌아간다.
태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엿새 동안 창조하신 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절).
그런데 한 가지, 즉 쉼은 여전히 빠져 있다. 참되고 거룩한 쉼은 오로지 창조주에게서 온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1~3).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뚜렷하게 강조하는 점에 주목하라. “그가 하시던 일”을 우리에게 세 번 상기시키면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복되고 거룩하게 한 제칠일 안식일을 그 일과 관련짓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출 20:8)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 즉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신 분으로 인정한다.
시편 기자는 이와 같이 창조와 경배를 아름답게 함께 연관시킨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3~6).
바울은 이 구절을 히브리서 3~4장에서 안식일과 연관시킨다. 3장에서 그는 시편 95편 8~11절을 직접 인용한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7~11절).
히브리서 4장에서 이 안식은 믿음, 구원 그리고 안식일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1, 3, 4, 9~10절).
가나안의 경계 가데스바네아에서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그 땅의 거민을 이기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그들이 결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들의 불신으로 인해 광야에서 죽게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또다시 거스르고 자신들의 힘으로 가나안 사람을 이겨 보려고 시도했다.
다른 곳에도 언급되어 있듯(고전 10:1~13; 갈 4:22~31을 보라), 바울은 구약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관련된 교훈을 발견했다. 안식일은 자기 혼자서 죄를 이기겠다는 노력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의와 성령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한 안식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여전히 유용하다.
예수 그리고 안식일
예수께서는 회복과 치유의 날, 재창조의 날에 초점을 맞춤으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되살렸다. 경이로운 책 <시대의 소망>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안식일을 복이 아니라 저주거리로 전락시킨 짐스런 규정들로부터 안식일을 구해 내기 위해 그분이 오셨다”(206쪽).
그리스도가 베푸신 치유 이적의 대부분이 안식일에 일어났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요한복음 5장의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고통 당하며 낫기를 갈망했지만 사실 희망은 없었다. 사랑이 넘치는 예수의 마음이 감동되었다. 잠시 간의 대화 후에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고 말씀하셨다. 그 무력한 사람이 순종하자 그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고 그는 치유되었다.
그 사람이 크게 기뻐했지만, 모든 사람이 기뻐한 것은 아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그 이적을 인정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그가 안식일에 자기 자리를 들고 갔다고 정죄했다.
엘렌 화잇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예수께서는 고통 당하는 자들을 구하는 사업이 안식일 법과 일치한다고 그들[종교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고통 당하는 인류를 섬기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항상 오르내리고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수행하는 일과도 일치했다”(206쪽).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시는 동안에 안식일을 존중하셨을 뿐 아니라 죽음의 시간에도 그렇게 하셨다. 여섯째 날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분은, 계명에 따라 안식일에 쉬었던 제자들처럼(눅 23:56), 제칠일에 무덤에서 쉬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0)고 가르치심으로 안식일의 신성성이 신약 성경의 시대와 그 너머를 넘어 영원하다고 말씀하셨다.
영원의 경계에서
영원의 경계가 가까워짐에 따라 우리 주님의 거룩한 제칠일 안식일은 마지막 시대의 사건들 가운데서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다. 100년 이상 동안, 창조주 하나님은 대부분의 세상에서 경멸당하고 언저리로 밀려났다. 그분이 말씀하신 진리인 성경은 가차 없이 공격받았다. 1,000년이 넘도록 그분의 거룩하고 성결한 안식일은 죽은 상처가 거의 나은 듯한 종교 세력에 의해 짓밟혔다(계 13장 참조).
이 마지막 때의 전쟁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을 훨씬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의 충성, 우리의 믿음, 우리의 순종에 대한 전쟁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라고 우리는 정말 믿고 있는가? 그분의 말씀이 진리라고 우리는 실제로 신뢰하는가? 그분이 구별하시고 성결하게 하신 그날에 하나님을 기꺼이 따르고 경배하고자 하는가?
지금은 안식일의 주인에게 가까이 나갈 시간이다(막 2:28 참조). 지금은 그분과 관계를 누리는 기쁨을 발견할 시간이며, 우리의 창조주, 구주, 친구이신 그분 안에 있는 안식의 복을 경험할 시간이다. 그분을 그렇게 경험할 때, 그분의 거룩하고 구별된 날에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칠 것이다. 이 땅에서뿐 아니라 영원한 시간 동안에도(사 66:23 참조).
발문
그리스도가 베푸신 치유 이적의 대부분이 안식일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