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교우들과 나누는
안식일에 관한 추억
안식일의 ‘모범 답안’이 특별히 존재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안식일은 값진 보석과 같이 수많은 단면을 통해 하나님과 동료 간의 사랑, 기쁨, 친교를 영롱하게 반사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신자들이 경험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 편집진
남태평양지회
구원을 경축하는 날
2011년 4월 29일은 나에게 항상 가장 특별한 안식일 중에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구원을 경축하는 날’이라고 아예 이름까지 지었다. 내가 침례를 받은 날인 것이다. 그 금요일 저녁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삶을 공개적으로 드렸다.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절친한 이들에게 구세주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이기도 했다. 또 앞으로 전적으로 사역에 종사하겠다는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함께 기뻐했다.
안식일 경험에는 기복이 있었지만 그 거룩한 쉼의 날을 경축했고 거기에 깃든 하나님의 뜻에 감사했다. 친구 목사가 안식일을 제한과 규제의 날로 보지 말고 안식일 속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을 찾아보라고 제안한 덕분이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와 연결되기를 갈망하신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분의 공동체를 성장시키도록 우리를 격려하신다는 것도 깨달았다.
현재 나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거기서 하나님은 매 안식일 끊임없이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가 한 가족으로 그의 사랑 안에서 자라게 돕고 계신다.
버나드 (비즈) 데오지
호주 시드니에 거주한다. 최근 자급 사역을 시작하여 아내 케어린과 가정 교회를 개척했고 기존 신자 및 새 신자, 가족들과 어울리고 있다.
남아시아태평양지회
빛과 열매를 나누다
안식일은 쉼의 날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모두에게 나누는 날이기도 하다. 대학생 시절 안식일에 교수님, 친구들과 태국 롭부리에 있는 에이즈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날은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안식일이 되었다.
안식일 예배 후 2시간을 이동하여 에이즈 병원에 갔다. 병원 복도에 들어섰을 때, 칙칙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많은 환자의 눈에 슬픔과 고통이 엿보였다. 희망은 없었다.
환자 모두에게 과일을 드렸다. 마사지도 해 드리고 성경절도 읽어 주고 태국어와 영어로 이야기해 보려고 노력했다. 둘 다 나의 모국어가 아니라 대화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한 것이 그들에게 빛, 위로,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의미 있게 될 것이다. 삶은 참으로 연약하다. 우리는 매일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에 감사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문제에 직면한다 해도 하나님 안에서 그 문제들에 직면할 용기와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새 안식일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이것이 생각난다.
린 응우옌 띠 풍
태국 무악렉에 있는 아시아태평양 국제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회계학과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북아시아태평양지회
믿음이 가져다준 자유
“조금 있으면 돌아가세요. 이제 더 이상 해 드릴 것이 없네요.” 아버지를 진찰한 의사 선생님이 엄마에게 말했다. 내가 17살 때였다. 인간 한계에 대하여 그때처럼 절감했던 때는 없다. 미치도록 외롭고 황량했던 그 시절,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확실한 소망과 힘이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진실한 기쁨이 어둠을 내밀고 마음을 채웠다. 나를 괴롭히던 죄책감, 증오심, 악한 욕망은 이제 더 이상 내 숨통을 조이지 못하게 되었다. 회복과 용서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이 경험을 밑거름을 삼아 군대에서 겪은 불 같은 시험들을 견뎌 낼 수 있었다. 군대에서 맞게 된 금요일에 나는 인간의 전통과 엄숙한 하나님의 명령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내가 당연히 총기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훈련을 거부한 결과가 영창이나 교도소일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내 양심은 치열하게 싸우며 고민했고 결국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굴복하기로 했다. 그렇게 1년 2개월간의 교도소 생활이 시작됐다.
마음이 변화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 예수님께 이끌려 올 수 있도록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일에서 나는 수감 생활의 의미를 찾았다. 남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내 마음에 찾아오는 자유를 자유로운 시민이 된 오늘도 나는 여전히 누리고 있다.
심재화
JAERIM(미 재림 청년 신앙 부흥 운동인 GYC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전 교인이 주도하는 지역 교회 선교 활성화를 도모하는 한국 재림 청년들의 운동) 회장이다.
유로-아시아지회
러시아에서 보낸 안식일
모든 것이 눈과 얼음으로 덮인 안식일이었다. 유로-아시아지회의 어느 연합회에서 청소년/커뮤니케이션/국제선교부장으로 일하는 아빠가 먼 곳으로 출장 중이라 나는 엄마, 여동생과 버스를 타고 교회에 갔다. 예배를 마친 뒤 우리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 가려면 철로 여럿을 건너야 했다.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뛰었다. 기차가 돌진해 오는 걸 몰랐다. 엄마의 고함 소리가 들렸지만 얼어붙은 철길이 미끄러워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 있던 여동생이 내가 멘 가방을 잡고 나를 끌어당겼다. 간발의 차이로 기차가 지나갔다.
여동생이 내 생명을 구했다. 하나님께서 수호천사를 보내어 보호해 주신 것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그때의 경험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한 감사로 가득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사 41:10). 나는 그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은혜로운 주님의 자비, 보살핌, 사랑을 새삼 확신한다.
라리사 리베란스카야
5대째 재림교인이며 유로-아시아지회 출판전도부에서 비서와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남아시아지회
안식일의 주님을 기다리며
12살쯤 되었을 때 일주일에 두 번 특별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그런 수업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다니엘서 2장의 금 신상에서부터 2300주야, 십자가의 경이, 요한계시록 14장의 세 천사의 기별 등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진리를 통해 내 마음에는 놀라움의 불길이 일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생명의 기원에 관한 이 질문은 항상 신비에 싸인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서른여섯 교과 중 두 과를 배우면서 갑자기 그 신비로운 수수께끼가 풀렸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했느니라”(출 20:8~11). 주님께서 나를 만드셨다. 안식일은 내가 오랜 진화 과정의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간과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 비슷한 깨달음을 얻은 여섯 명과 함께 인도 콜라르 골드 필드에 임대한 작은 건물에서 첫 안식일을 보냈다. 65년 전의 그 안식일은 놀라우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날이며 내 삶의 가장 잊지 못할 안식일로 남아 있다.
존 파울러
안식일의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며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
동중앙아프리카지회
친교의 안식일
음악! 웃음! 이야기! 장미와 십자가. 케냐의 나이로비에 있는 브레이큰허스트 강당에 들어서니 성찬떡과 포도즙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드웨인 에스먼드 목사님을 초빙하여 맥스웰 재림교회 학교에서 진행한 기도주일이 끝나 가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 기억에 남을 예배를 위해 모두 모였다. 천상의 음악이 강당을 가득 채웠다.
하얀 장미를 큰 십자가에 놓으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시는 분.’ 십자가에 놓인 장미를 보면서 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이 떠올랐다. 또 흰 장미는 평화를 상징한다. 안식일마다 나는 평화를 간절히 바란다. 안식일 아침에는 최고의 교제가, 오후에는 다양한 선교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나는 어느 그룹에 합류하여 여성 쉼터를 방문했다. 우리를 반기는 여자와 어린이가 많았다. 여자들은 우리와 함께 노래했다. 간혹 스와힐리어도 들렸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껑충껑충 뛰었다.
환상적인 일몰 예배와 아름다운 침례식으로 안식일을 마쳤다. 순종, 찬양, 예배, 사랑이 깃든 안식일은 언제나 나에게 최고의 날이다.
달리네 밥티스테
케냐 나이로비 맥스웰 초등학교 교장이다.
남아프리카-인도양지회
남쪽 지역에서 지키는 안식일
몬테비스타 교회는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 있는 작은 교회다. 얼마 전 추운 겨울 아침, 안식일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적은 수로도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 특별한 안식일 활동을 계획했다. 교회에서 기도를 마친 후 노숙자들이 있을 만한 도심의 입체교차로 밑으로 차를 몰고 갔다.
차가운 아침 하늘 아래 원을 그리고 서서 우리는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친숙한 가락이 울려 퍼지자 사람들이 의심을 버리고 마음을 열었다. 그들은 다가와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멀리 서서 듣는 이도 있었다. 아이들이 밝게 웃으며 ‘벽에 난 구멍’ 속에서 그리고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음습한 구석에서 나왔다. 찬양, 말씀, 기도로 모두의 마음이 감격에 젖었다. 나는 평소에 차를 몰고 여기를 자주 지나다녔다. 그래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거리에 숨어 있는 가련한 이들을 그동안 한 번도 쳐다보거나 돌아본 적이 없었다니.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친구들에게 음식과 옷을 전했다. 맛있는 야채 수프와 빵을 점심으로 대접했다. 누구나 살면서 겪는 공통적인 문제에 대해 그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길을 찾고자 애쓰는 동질감 속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겨울 해가 저물고 찬 기운이 몰려왔다. 서로 다른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 안식일에 절실히 깨달았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예외 없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주님, 용서하소서. 당신의 말씀에 대해 떳떳하다고 여겼던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를 가르쳐 당신이 주신 안식일의 기쁨을 큰 자와 작은 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모두와 나누면서 우리 모두 당신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게 하소서.”
응코빌레 니콜라스 다마네
케이프타운 시 당국 책임자이다. 아내 켐비와 두 딸 리노, 카냐와 살고 있다.
서중앙아프리카지회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위한 안식일
가족과 함께 미국 메릴랜드 주 랜험에 있는 시브룩 재림교회를 방문하여 내 생의 최고의 몇 안식일을 보냈다. 라이베리아 재림교회 책임자였던 우리는 주말마다 여러 곳을 다녔는데 어린 두 자녀가 즐겁게 예배드릴 만한 장소를 항상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브룩 교회의 안식일예배는 정말 달랐다.
아이들이 노래하고 양을 갖고 놀면서 다윗 왕에 관하여 배우는 대화식 안식일학교가 끝난 뒤 우리는 어린이교회로 이동했다. 사려 깊은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강당에 들어가기 전에 이름 배지를 달고 손등에는 출석 도장을 받았다.
갖가지 재미있는 활동이 있었고 초빙 강사가 맹인들의 어려움에 관하여 설명했다. 우리는 점자 읽기, 지팡이로 더듬어 횡단보도 건너기와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네 가지 감각으로만 생활하기 등에 관하여 배웠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아이들은 ‘내 하나님은 크고 힘 있고’라는 노래 등 그날 배웠던 것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조만간 다시 가 보고 싶은 교회다.
조네타 플로모
서아프리카 국가인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의 몬트세라도에 산다.
인터-유럽지회
색다른 예배
대부분의 목회자 가족에게 안식일은 매우 정신없는 날이다. 교인들의 기대치는 높고, 아이들은 뒷전이 밀리기 일쑤다. 유럽 미디어센터 ‘희망의 소리’ 담당자인 남편은 주말마다 멀리 떨어진 교회에서 설교하며 교인들을 훈련해야 했다. 가족은 좀처럼 남편과 함께 안식일을 보낼 수가 없었다.
어느 금요일 밤, 남편이 특별 계획을 발표했다. “내일은 모험적인 안식일이 될 거야. 색다른 예배를 경험해 보려고.” 아침을 근사하게 마친 뒤 우리는 차를 타고 멋진 언덕으로 올라가 풀밭을 산책했다. 하나님의 자연 속에서는 새롭게 깨닫는 것이 참 많았다! 그런 다음 나무 벤치에 앉아 찬미를 불렀다. 기도할 때도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신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고 나는 확신한다!
하나님과 그리고 가족끼리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떠나기 전에 아이들은 갖가지 연장이 달린 스위스 군용 주머니칼을 받았다. “성경도 이 칼과 비슷한 도구야. 거기에는 우리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이 담겨 있단다.” 남편이 말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칼 위의 흰 십자가를 보면 하늘에 친구가 계신다는 사실이 생각나야 하겠지. 그분을 믿고 친하게 지내렴. 살아가면서 이 칼을 사용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야.” 그 특별한 안식일에 함께한 경험을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실비아 렌츠
저술가, 어머니, 목회자 사모이며 알스바흐-핸라인에 거주한다. 최근까지 독일 희망의 소리 성경통신학교에서 일했고 어린 손자와 시간 보내기를 즐긴다.
트랜스-유럽지회
아일랜드의 추억
남편과 함께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 주 위마 대학에서 연구를 맡았다. 인생의 새로운 도전과 함께 새로운 장이 열리리라 기대하면서. 시차에 지친 우리는 짐도 풀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졌다. 갑자기 남편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핸드폰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기분 나쁜 정적이 흘렀다. 나쁜 소식이 틀림없었다. 남편의 첫 충격이 가신 후 아일랜드의 시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가 2011년 8월 6일, 캘리포니아에서 맞는 첫 안식일이었다. 학교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고 근처에도 우리를 위로해 줄 친구나 친척이 없었다. 남편은 구내에 있는 숲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은퇴 교사 한 분을 보내셔서 남편을 위로했다. 그 교사는 새크라멘토에서 개최된 평신도실업인협회의 안식일예배에 우리를 초대했다.
“아일랜드에 갈 여건이 마련될 때까지 이번 안식일은 저희 가족과 함께 보내시죠.”라고 그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울 새로운 가족을 보내 주셨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세계 교회의 가족 같은 사랑, 낯선 이들의 사랑 그리고 낯선 땅이지만 친숙하게 위로하고 보살피시는 하나님과 함께한 특별한 안식일을 경험했다.
베티 오 루아르크
간호 관리자로 은퇴했고 장성한 자녀 넷을 둔 어머니이자 할머니, 아일랜드 서부 세 지역을 담당한 목회자의 사모이다. 최근 아일랜드대회 건강 담당자가 되었다.
남아메리카지회
나는 여호와를 섬기리라
미래의 좋은 시점에서 현재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그 따뜻한 봄날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안식일로 기억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시골 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재림교회로 매 안식일 성실하게 나를 데리고 다녔다. 더는 침례를 미루지 않기로 결심했다. 엄마가 내게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 지가 벌써 2년이 지났다. 수줍은 14살 소녀에게는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 가족에게는 자녀들이 아버지의 신앙을 따르는 것이 전통이다. 루터교인인 아빠는 활동적인 교인은 아니었지만 내가 루터교인이 되기를 바랐다. 11월의 어느 날(아르헨티나에서는 늦은 봄이다.) 내 침례식에 아빠를 초청했다. 평상시 차분하던 아빠가 폭발하듯 화를 쏟아 내는 바람에 가슴 아픈 마음으로 나는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아빠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는 예수님을 힘입어 당당하게 서 있었다. 나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배웠다. 할머니는 더 화가 나 있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어느 안식일에 나는 마침내 침례를 받았다.
내 인생의 중대한 기로를 넘어선 것이다. 영원이 걸려 있는 그때의 결심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어디에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클라우디아 블라트
목사 사모이자 어린 두 자녀의 어머니, 프리랜서 번역가이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글을 보냈다.
북미지회
아버지의 세 번째 안식일
1942년, 나의 아버지 맥스 토레스는 평생 모은 돈과 아버지의 삼촌에게 빌린 2,000달러를 들고 뉴멕시코 주 매그덜리나에 식품점을 열었다. 사업은 순조로웠고 시작부터 이익을 남겼다.
1년 후 아버지는 재림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안식일에 가게 문을 닫았다. 사실 아버지에게는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손님의 절반을 차지하는 목장주들이 토요일 아침 일찍 식료품을 사러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파산을 염려했다.
다음 안식일,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인근 마을의 교회에 가서 해가 진 다음 매그덜리나로 돌아왔다. 토요일 저녁에 가게를 열 생각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하루 종일 가게 문을 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다음 안식일도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또 가게 문을 열었다.
세 번째 안식일에는 하루 종일 가게 문이 닫혔다. 그때 나는 겨우 5살이었지만 아직도 그 토요일 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갈 때 목장주 약 12명이 자신들의 픽업트럭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하나님 저 목장주들에게 복을 주소서. 이제 망할 일은 없겠네요.”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서둘러 가게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최소한 12명은 되어 보이는 목장주들이 소 떼처럼 우르르 아버지를 따라 들어갔다. 그들은 신념에 충실한 아버지를 존경한다며 앞으로 가게가 문 닫을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이듬해, 수입은 두 배로 늘었고 아버지는 삼촌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았다.
루디 토레스
은퇴할 때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워싱턴, 메릴랜드 주에서 목회했다.
인터-아메리카지회
안식일은 가족과 함께
내게 최고의 안식일은 할아버지 댁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다. 생각해 내려고 했지만 가장 두드러지게 기억나는 특별한 안식일은 없었다. 하지만 사촌들, 고모들, 삼촌들, 친구들 그리고 가까운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안식일 점심을 나누며 대화와 웃음을 나누었던 매 안식일이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각자가 나누는 다른 견해를 듣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 경험이 나의 지성을 자극했고 따뜻한 말을 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 주었다. 할머니의 맛난 요리와 함께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내게는 진정한 안식일이었다.
마르게리테 사무엘
전업주부이며 합창단 ‘조니 미니스트리’의 지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