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다시
사랑에 빠지다
바쁜 세상에서 재발견하는 선물, 안식일
재림교인은 안식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안식일은 창조 당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일곱째 날이 일요일 전날이라는 것도 안다. 세상의 여러 언어에서 이 점이 드러난다. 예언 해석에 입각하여 안식일 계명과 박해, 혹은 안식일과 마지막 때에 관하여 열심히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문화적 현실과 관습이 제각각인 전 세계 교회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준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 가족은 2005~2009년에 필리핀 재림교회 국제대학원(AIIAS) 캠퍼스에서 살았다. 다문화가 공존하는 이 캠퍼스에 몇 년간 거하면서 경험한 잊지 못할 추억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가 도드라진다.
캠퍼스에서 보낸 안식일은 늘 특별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학생과 교수들로 조성된 국제적인 분위기 때문에 AIIAS의 안식일은 무엇보다 흥미를 유발하는 날이었다. 사택 밖에서 그룹별로 안식일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교내 기도의 동산에서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인근의 작은 교회를 섬기기 위해 아침에 캠퍼스를 나서는 이들, 바깥에서 아이들과 뛰놀며 오후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색다르고 낯설기까지 한 당신의 안식일 준수 방식에 대해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다.’고 서로들 생각하며 지내는 분위기였다.
이런 괜찮은 물음을 전제로 성경에 나타난 안식일의 근본적인 5가지 원칙을 재조명해 보려고 한다.1
1. 창조의 메아리
“태초에”라는 말은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시작부터 성경에서는 시간이 하나님의 창조 중 일부임을 상기시킨다. 그분께서는 시간에 맞춰 말씀하시며 시간에 맞춰 창조가 이루어진다. 저녁과 아침으로 이루어진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이 지나고 여섯째 날이 이른다(창 1:5, 8, 13, 19, 23, 31). 하나님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마음이 흐뭇했다. 여섯째 날 인간을 지으신 뒤 그분이 보시니 “참 좋았다”(31절)고 성경 기자는 진술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 다 끝내신 게 아니다. 자신이 지은 사람을 보고 기뻐하는 그때에도 창조가 완성되기까지는 하루가 더 남았다. 일곱째 날은 독특하다. 표현에 사용된 동사 형태와 초점만 봐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마치시고, 쉬시고, 쉬는 가운데서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다(창 2:2~3).
안식일은 창조의 절정이자 창조주와 함께 쉬라는 초청을 뜻한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다 이루었다’는 의미다. 그분의 완전한 창조가 마무리됐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마련됐다는 뜻이다.
타락 이전 창조의 주 특징인 완전함은 모든 관계를 망라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셨다는 것은 그분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피조물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오로지 사람에게만 일곱째 날을 허락하신다. 시내산으로 넘어가 보자. 출애굽기 20장 8~11절의 안식일 계명은 가장 긴 계명이며 문장 구조가 독특하다. “기억하라”는 첫 요청을 통해 창세기 1~2장을 떠올리고 창조주와 교제하는 가운데 이르는 거룩함을 상기하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로 안식일이 거룩해진다. 창조에서 우리는 거룩하게 하시는 그분의 활동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우리의 열망을 떠올린다. 이것은 문화와 시대를 뛰어넘는 진리이다.
2. 마침내 자유
안식일은 창조와 시작하지만 거기에는 창조 이상의 무엇이 있다. 더 큰 차원을 이해하도록 하시는 분은 신명기 5장 12~15절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이다. 모압 광야 어딘가에서 모세는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면하고 있다(신 1:1~5). 그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들려준 것은 새로운 세대가 이를 기억하고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학습 도구인 셈이다.
흥미롭게도 신명기 5장 15절에서는 안식일 준수의 근거를 창조에 두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신 일에 초점을 맞춘다.
구원은 성경의 안식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사실 신명기 5장 15절은 새로운 세대의 상황에 맥락을 맞춘 진술이며 암시적이었던 것을 구체화한 것이다.2 창조 당시에는 주인도 노예도 없었다. 피조물은 똑같이 창조주를 의지했고 그분에게 생명을 얻었다.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창 1:27), 타락한 후에는 남자와 여자(그리고 나머지 피조물) 모두에게 구원이 필요했다.
안식일은 뛰어난 평등 장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련된 테이블에 둘러앉아 구원받은 사람들과 친교를 나눈다. 사회적 지위, 성별, 인종의 차이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손과 편 팔로” 우리 모두를 “애굽”에서 인도하셨다(신 5:15).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는 애굽, 노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들을 기억할 것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우리가 중독, 증오, 자기 본위, 독선의 애굽과 바벨론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매 안식일 기억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해 보라. 가장 좋아하는 찬양은 ‘나 속죄함 받았네’가 될 것이다.
안식일은 내 속에서 의와 거룩함을 생산해 내려는 그릇된 시도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분 안에서 참다운 쉼을 얻을 수 있다고 귓가에 속삭이는 성경의 기쁜 소식이 들리는가?
3. 나그네에 대하여
창조와 해방은 성서적 안식일 신학의 기본 원칙이다. 그렇다면 나그네는 어떤가? 도움이 될 만한 대답을 출애굽기 23장 12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의 더 큰 배경을 학자들은 ‘언약의 책’이라고 부른다. 인간관계를 다루는 수많은 법률이 여기에 상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법들은 제단, 노예, 사람 사이의 폭력, 재산, 보상, 법 앞의 평등, 안식년, 절기에 관한 것들이다(출 20:19~23:33).
출애굽기 23장 12절에서는 안식일을 구체적으로 말하면서 ‘나그네(히브리어로 ‘게르’)’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향을 끼치는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왜 하나님은 특별히 ‘나그네’와 연관된 안식일 이야기를 다시 꺼내실까? 출애굽기 23장 12절에 묘사된 안식일의 유익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사람과 동물은 “숨을 돌리기 위해” 쉬어야 한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쉬는 동안 숨을 고르면서 기운을 차린다는 뜻이다. 사실 같은 어근을 사용하여 ‘생명’ 혹은 ‘살아 있는 존재’를 뜻하는 명사가 이미 출애굽기 23장 9절에 나타난다. 우리는 모두 숨을 고르고 다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안식일의 쉼은 스트레스로 지치고, 혹사당하고, 걱정이 많은 일 중독자를 위한 하나님의 치료법이다. 그러나 사실 출애굽기 23장 12절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이 성경절에서 초점은 동물, ‘계집종의 자식’, ‘나그네’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짓밟히는 사람,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는 사람, 나그네를 돌보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난민과 ‘나그네’가 늘 존재한다. 하나님이 특별히 그들을 돌보시며 그들이 안식일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4. 남을 섬기는 법
안식일 그리고 남을 돕는 헌신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안식일 신학에서 이처럼 중요한 부분을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처럼 잊을 때가 많다. 아모스 선지자는 안식일 준수 그리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학대하는 관행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 격한 어조로 진술했다. 하나님의 정의는 모두를 포함하는 그분의 창조와 구속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잊고 말았다.
이사야 58장은 성경에서 이러한 안식일의 중요한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거짓 예배와 참예배를 나란히 배열한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다가가려고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를 멸시하고 사회의 주변인을 억압하는 모순에 대해 선지자는 놀라워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거듭 되풀이한다(사 58:2~3). 금식과 기도는 겸손한 예배와 사심 없는 기부를 대신할 수 없다. 안식일 예배는 자기중심적인 행복 추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이 땅을 위한 하나님의 꿈과 그분의 뜻에 초점이 맞아야 한다.
13절에서 “오락”을 행하는 것은 “안식일을 짓밟는 것”(NRSV)과 같다. 인간의 예식은 하나님의 안식일에서 이상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몸부림치는 사람, 억류된 사람,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 어둠 속을 걷는 사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이름을 찾도록 초청받았다.
사실 솔직한 마음으로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며 눈멀고 벌거벗은 모습이 우리의 실제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은혜에 굶주리고 있으며 자기 힘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안식일에 내포된 초청의 의미가 타인을 돌보는 것임을 깨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사야 58장에서는 ‘기쁨’이라는 개념을 두 번 언급하고 있다. ‘기쁨’의 히브리어 어근은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 이사야 58장 13절은 인간의 기쁨과 하나님 중심의 기쁨을 대조하고 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을 섬기는 가운데 우리를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기를 그분은 바라신다.
5. 표지판이 보이는가?
스마트폰 앱이나 GPS를 사용하는 이 시대에는 표지판이나 지도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나 표지판은 항상 중요하다. 표지판은 위치를 확인해 주며 중요한 사건들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후에 나타날 것도 알려 준다. 출애굽기 31장 12~17절은 성서적 안식일 신학에서도 독특하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13절).
안식일 준수는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여가 활동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안식일 준수는 인류가 진정한 성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표징이다. 오래전부터 학자들은 안식일과 성화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인정해 왔다. 안식일과 성화는 모두 시공간적으로 하나님과 인류 간의 연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다(출 25:8). 둘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출애굽기 31장 12~17절에는 안식일 표징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 나타난다. 안식일은 창조부터 시작된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다(16~17절). 성경은 구약에서 세 가지 언약의 표징을 언급하고 있다. 무지개(창 9:12, 13, 17), 할례(창 17:11), 안식일(출 31:13, 17; 겔 20:12, 20)이다. 이 세 가지 중 물리적으로는 가장 와 닿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끊임없는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 안식일이다. 안식일 표징을 통해 우리는 창조주, 구세주,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을 알게 된다(출 31:13). 잊어버리지 않도록 7일마다 올리는 깃발과도 같다.
재림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 14장 6~7절의 첫째 천사 기별이 안식일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본문의 언어는 넷째 계명의 언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출 20:11). 어떤 의미에서 안식일은 요한계시록에서 용의 이야기와 대조되는 하나님 이야기의 배경 주제이다. 사랑의 창조주께서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 의심을 부추기는 성난 고발자에 맞서신다. 재림교인 학자 시그베 톤스타드에 따르면 첫째 천사의 기별에서 “안식일”은 “인간의 현실에 끈기 있고 성실하게 참여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이다.3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계시며 매주 안식일은 그분의 임재와 은혜 그리고 미래에 대한 표징이다.
회고와 전망
이제 안식일을 탐색하는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창조와 구원이 안식일의 토대라면 선교, 봉사, 공식적인 선언은 입법자의 완벽한 품성을 나타내는 추가적인 빛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에 대한 연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올바른 안식일 준수를 위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착잡하게 따지다가 곁길로 빠져서 ‘그분 안에서 쉬라’는 안식일의 근본 원칙을 놓쳐 버릴 때가 허다하다. 하루하루 매 순간 안식일의 원칙을 구현하며 살지는 못하면서 안식일에 합당한 행동을 규정하는 전문가로만 행세할 때가 많은 것이다.
단순한 안식일 준수를 뛰어넘어 그 원칙들이 우리 삶에 영향력으로 작용한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는 또 다른 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안식일은 바로 인간 자신의 의(義)로부터 쉬는 것이다. 참된 경건을 이루겠다는 우리의 어설픈 시도를 그치는 것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멈추는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막 2:28)이신 그분을 더욱더 분명히 바라보기 시작하면, 갈 곳을 잃은 사람, 지치고 피곤한 사람, 마음이 상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오신 그분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바야흐로 처음부터 다시 사랑을 시작해야 할 때다.
1이 기사를 작성하면서 다음의 저술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Mathilde Frey, “The Sabbath in the Pentateuch: An Exegetical and Theological Study”(Ph. D.diss., Seventh-day Adventist Theological Seminary, Andrews University, 2011) 그리고 Sigve K. Tonstad,
2다음을 참고할 것. Gerald A. Klingbeil, “The Sabbath Law in the Decalogue(s): Creation and Liberation as a Paradigm for Community,”
3Tonstad, 479~480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부편집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일의 궁극적인 쉼을 갈망하고 있다.
발문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계시며 매주 안식일은 그분의 임재와 은혜 그리고 미래에 대한 표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