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묵상
십자가 너머
부활절을 의미 있게
재러드 토머스
호수 효과로 생긴 강한 눈보라 속을 헤치며 수요일 저녁 기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모는데 도로변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검은색 외투 속에 전례복을 껴입었고 손에는 하얀 커피잔을 들고 서 있었다.
재의 수요일 의식
옆에 놓인 입간판을 보고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날은 사순절 첫째 날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었던 것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 탐식 후의 사순절 의식에 간단하게 참여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지역 사제들이 거리에서 재를 나눠 주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콜레스테롤 높고 젤리를 듬뿍 바른 과자에 관한 수많은 광고를 ‘뚱뚱한 화요일’1과 사순절의 시작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마 재림 신앙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재림교인에게 부활절을 기념하는 일은 주요 행사가 아니다.
우리 신앙의 초점
재림 신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중점을 둔다는 사실에는 질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또한 죄의 삯과 우리를 지배하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흘린 속죄의 피를 가치 있게 여긴다(히 2:14~15). 십자가에서 나타난 자기 희생적 사랑은 오래전 사탄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시작한 논쟁에 대한 우주적인 대응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롬 5:8).
부활과 승천에서 우리는 죽음을 정복하고 하늘 성소로 올라가 우리 대제사장이 되신 구세주, 인간을 위한 유일한 중재자이자 중보자이신 분을 발견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기 피로 사신 권리를 발견한다(롬 5:9; 갈 1:4; 딤전 2:6; 딛 2:14). 바로 그 예수님이 약속대로 권세와 영광 속에서 곧 오시리라고 우리는 믿는다(요 14:1~3).
이 엄숙한 성서적 강조에 익숙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보다 이교도와 더 공통점이 많은 토끼와 부활절 달걀에 대해 다소 불편을 느낀다. 게다가 춘분 이후 월삭에 맞춰 날짜는 늘 바뀐다. 부활절 일출 예배 또한 재림교인의 예배 관행의 표준 사양이 아니다. 에스겔이 태양 숭배에 관하여 따끔하게 지적한 내용을 부활절 의식에 차용하는 사람도 있다(겔 8:15~16).
현재 그리스도인의 부활절 관행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본래 주어진 역사적, 예언적 맥락으로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분리하는 것이다.
말씀의 초점
부활 후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고 있는 낙담한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늦은 오후의 빛이 비치는 길을 걷고 있었지만, 태양이 그들에게 희망을 밝혀 주지는 못했다. 메시아가 죽었다는 현실에 그들은 슬퍼했고 예수께서는 자비롭게 그들의 길을 밝히셨다. 그분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성경에서 전하고 있다(눅 24:27).
최근에 일어난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 다시 말해 유월절 집회, 무교병, 첫 열매 등에 관한 예언적 의미를 정리하시면서 예수님은 다시 모세오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구약 시대 봉사의 복잡한 내용을 정립하셨다. 이 봉사에는 죽임 당하러 오실 어린양, 그분이 무덤에서 쉬실 안식일, 재림 시 일어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그분의 부활 등이 담겨 있다(고전 15:20; 계 14:4).
십자가와 부활을 그런 관점으로 보면 일곱 절기의 시작인 첫 주말의 예식들은 연중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이 사건들은 어린양의 대속하는 피를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깨끗하게 회복된 사람들의 축하로 끝난다.
현대의 부활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예언의 시간표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서로 떼어 놓았다. 유월절을 시작으로 삼지 않고 부활절을 끝으로 삼는다. 뚱뚱한 화요일의 탐식과 재의 수요일에 시작하는 금식을 포함하여 한 달 이전부터 축하 예식을 시작한다.
부활절이 다가오면 종려 주일과 성 금요일을 지킨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쉬신 안식일은 보란듯이 외면하고 부활절 일요일은 거나하게 잔치를 벌인다. 그렇게 부활절은 끝난다.
애석하게도 그리스도께서 부활 이후 하셔야 할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모세 오경의 중요성을 간과하므로 오늘날 이 사건들을 해석하는 데 혼란을 겪는 사람이 많다. 저술가 필립 얀시는 이렇게 진술한다. “나의 결론에 따르면…승천은 내 신앙에서 가장 큰 난제이다.” 그는 단적으로 질문을 제기한다. “승천이 아예 없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2 분명 예수님에게는 더 좋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우리들에게도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위해, 자신이 구원하러 오셨던 우리를 중재하시기 위해, “손으로 짓지 아니한…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 들어가셨기 때문이다(히 9:11). 자신이 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그분 스스로가 말씀하셨다(요 16:7).
예수님의 승천은 난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거처를 준비 중이시며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이라는 용기를 준다. 모세의 성소를 이해하면 그분이 약속하신 재림 전 하늘 성소 봉사에 관한 비밀이 풀린다. 그날 일요일 오후에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셨고, 낙담에 빠져 길을 걷던 제자들의 슬픈 마음은 들뜨기 시작했다.
결론
모세의 연중 절기를 재현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전이나 제사장도 없다. 이런 것이 있다 해도 제사 제도를 재건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이루신 완전한 희생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실 때 성전의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졌고 그 순간 성소 봉사는 성취된 것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우리는 복음 전도 주간을 통해 이것을 기념할 수 있다. 승리의 입성으로 시작하여, 메시아의 사역을 묘사하고, 그분이 당한 배신, 수난, 십자가, 부활의 궤적을 따라가 보고, 낙심한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길에서, 다락방에서 하셨던 일을 기념하면서 일요일 일몰 예배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십자가 너머 하늘 성소까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그분이 이 땅에서 그리고 지금은 하늘에서 수행하시는 사역에 대해 우리는 더 깊이 깨닫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영광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다시 오시는 머지않은 재림의 절정과 함께 더 완전하고 풍성한 복음 기별을 제공할 것이다. 부활절을 완전히 무시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더 명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또 그분처럼 모세의 글에 나타난 지혜를 활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1재의 수요일 전날인 참회 화요일을 뜻한다. 서양에서는 이날 팬케이크를 먹는 전통이 있다.
2 Philip Yancey,
재러드 토머스
재림교회 성경 교사, 기관 목사, 담임목사로 봉사했고 현재 대총회 목회부 커뮤니케이션 담당이다.
발문
재림 신앙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중점을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