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교리
주시는 분, 하나님
그분은 줌으로써
자신이 주인임을 입증하신다
레이얼 시저
그대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대의 말과 행동 가운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해 주는 무언가가 있는가?
사마리아 여인은 그 무언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음에도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유대인은 예배의 전모를 알고 있는 반면에 그녀와 동족은 거기에 아무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논쟁을 종결지었다(요 4:22).
동시에 유대인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아주 가혹한 말씀을 하셨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전도 사업, 지역 사회 봉사, 교회 행정을 열심히 한 그대나 나에게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떻겠는가? 우리는 선한 일만 했고 도둑, 사기꾼, 불의한 사람, 음란한 자, 세금 착취자와는 다르다(눅 18:10~14 참조).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의 신앙 고백을 연구하여 간파하였듯, 똑똑했던 아테네 사람들도 그분을 알지 못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도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바울이 볼 때 그들은 참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보낸 바울의 메시지에는 오늘날의 예배자들이 주목할 만한 좋은 교훈이 담겨 있다. 알지는 못하지만 경배받아 마땅한 분일 거라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분을 바울이 알려 주었다. 분명 경배자들은 자신들이 참으로 알지 못하는 어떤 하나님께 예배드렸을 수도 있었다. 신실한 청지기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지식도 모른 채 자신의 시간, 생각, 몸, 재정을 표면적으로 드렸을 수도 있다.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아테네 사람에게 바울은 우리의 청지기 직분을 요구하는 하나님, 모든 사람이 알아야만 하는 하나님에 대해 최소한 네 가지 지시 혹은 설명을 제공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묶여 있다.
첫째, 바울은 자신이 말하는 대상을 중성으로 언급한다. 이는 적절하지 않는 듯하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 한 구절에 두 번이 중성명사 ‘그것’을 사용해서, 이 신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저 하나의 개념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아테네는 수많은 철학 사상으로 유명하다. 이것도 그 많은 사상 중에 하나였다. 그 존재를 규명할 이름이나 특징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신을 포함하는 것은 좋아 보였다. 다른 모든 것과 함께 그분도 포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그들은 생각한 것 같다. 오늘날의 청지기 직분에 비추어 본다면 그들은 도르가회 소속으로 그분을 섬기면서 헌금은 거의 드리지 않고 청산유수처럼 기도문만 읊조리는 격이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은 좋다. 책임을 실천하는 것도 좋다. 청지기들은 자기 의무에 대해 할 말이 있어야 한다(눅 16:2). 그래야 예수님이 오실 때 자신이 실천한 것들, 즉 선행의 목록을 나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하는 것, 또 정성껏 십일조를 드리고 지역 사회 봉사를 실천하는 것은 분명 수치스러운 일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러 가지 선행과 그에 대한 훈장과 증서를 들고 예수님의 잔치에 나타난 사람에게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지 내게서 떠나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어리둥절하겠는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이런 대답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예수님, 저는 교회 재무였고 십일조도 성실하게 드렸습니다. 찬양대를 지휘하고 청소년 부회장도 맡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에게 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여러분에게 “떠나가라,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요구하신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다가올 조우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다고 확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질문 제기
자신의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그분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그분은 그대에게 하나의 철학적 개념 이상인가?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알려 준 하나님은 헌금 봉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창세기 1장에서도 물질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행 17:24)은 갑부 삼촌에게 용돈을 받을 필요가 없다. 만물이 이미 그분의 것이다. 헌금 바구니가 지나갈 때 내가 고개만 숙이고 있든 가진 것 전부를 쏟아붓든 그분의 재정 상태는 변함이 없다. 우리 때문에 그분이 부자가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지닌 전부, 생명, 호흡, 모든 것이 다 그분에게서 말미암는다. 때로 물질이 일그러진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온다. 수중에 들어오자마자 탕진해버릴 때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원천이시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자신이 아레오바고에서 소개한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적 발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게 바울의 첫 번째 진리이다.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그분은 실제로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이나 우리가 사는 생명은 그분의 실재를 타당성 있게 입증하며 두 번째인 진리를 확증해 준다. 즉 그분은 창조주라는 사실이다. 그분이 창조하신 작품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변명이 통하지 않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한편, 창조주인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세 번째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분은 소유자이시고 우리를 포함하여 생명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선물과 경배를 포함한 모든 것이 이미 그분의 소유임을 일제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고 만들어 낸 분이므로 우리를 소유하신다. 태초에 식물, 동물, 광물을 만드셨을 때 그분의 특허권을 수용할 기관이나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그분을 산업 스파이 혹은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할 만한 잠재적 경쟁자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시 100:3).
네 번째 진리
바울의 네 번째 진리는 우리 창조주와 소유자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권을 기념하는 방식에서 부각된다. 그 방식이란 ‘기부’이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
우리는 우연하게 얻거나 강요를 통해서 받지 않는다. 인간이나 천사가 그분의 등에 칼을 들이밀거나 성천에 무기를 들고 쳐들어오기 때문에 주시는 게 아니다. 주는 것은 그분의 본성이다.
우리가 맡은 청지기 직분 그리고 십일조로 측정될 수도 있고 헌금이나 감사 예배로는 계산될 수 없는 신실한 반응은 일종의 통로이다.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방법은 그분의 무한한 베푸심으로 확장된다. 시여자인 그분은 끊임없이 세상에 복을 주신다.
레이얼 시저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 시여자 하나님을 좋아한다.
사이드바
청지기 직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간과 기회와 재능과 재산과 세상의 축복들과 그 자원들을 위탁받은 그분의 청지기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정당하게 사용해야 할 책임을 그분께 지고 있다. 우리는 그분과 우리의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성실하게 봉사하며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분의 교회를 유지하며 발전시키기 위하여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청지기 직분은 자애로운 품성을 계발하고 이기심과 탐욕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다. 청지기는 자신의 충성됨의 결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르러 오는 축복들을 즐거워한다(창 1:26~28; 2:15; 대상 29:14; 학 1:3~11; 말 3:8~12; 마 23:23; 롬 15:26~27; 고전 9:9~14; 고후 8:1~15;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