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묵상
어린이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존재하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
제럴드 A. 클링바일
성경에서 어린이의 역할은 중요하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을 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것은 작게나마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반사한 것이다. 성서에서 아이들은 하나님의 복으로 간주되었다(시 127:3~4; 128:3~4). 아이들은 심지어 예배와 예식에도 참석했다(출 13:8, 14).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았고 또 그분께서 약속한 대로 복 주실 것을 부모들은 아이의 탄생을 통해 상기했다(창 12:1~3). 이삭이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아이는 단연코 아기 예수이다. 그분의 임재는 예언된 때의 성취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장 심오하게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선지자 이사야는 약 700년 전에 이 사실을 기록했다. 마태는 그 아기를 이 예언의 성취로서 인식하고 있다(마 1:23). 이 땅의 구주이신 예수께서는 아기로 오셔서 그의 전후에 존재하는 아이들처럼 성장하신다. 주의 깊은 사람들은 그분이 창세기 3장 15절과 구약의 다른 모든 구세주에 관한 예언의 성취임을 인지했다.
도전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하지만, 30세가 되자 그분은 역사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눅 3:23). 그분은 치유하고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들으신다. 또한 그분은 설교하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면서 하나님이 아이들을 남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분의 제자들이 그것을 항상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부모들이 데려온 아이들을 끌어안고 축복하는 데 선생님이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신단 말인가? 향후 계획을 세우고 설교 내용도 준비하고 교회 지도자들도 설득해야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이들을 사랑하신다. “우리에게 이 모습은 감동적이지만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는 자들에게 그분의 행동은 충격적이었고 그분의 말씀은 뜻밖이었다.”고 성경학자 로이 주크는 설명한다.1
예수께서는 전통적인 상식을 완전히 뒤집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주변의 어른들에게 배워야 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계획을 부모들은 알고 있고 철없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정말 그런가?
다음은 전통적인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도전이다.
천국에 가고 싶은가? 좋다. 그러면 어린아이처럼 되라(마 18:3).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해지고 싶은가? 좋다. 그러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어라(4절).
나를 영접하고 싶은가? 좋다. 그러면 이 어린아이 중 하나를 영접하라(막 9:37).
하나님의 선한 편에 서고 싶은가? 좋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 중 하나라도 죄짓게 하지 말라(42절).
왜 어린아이들인가?
왜 예수께서는 그분의 천국의 확장과 원칙을 소개하면서 여러 차례 아이들을 가리키신 걸까? 그분께서는 분명 인간에게, 즉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구원과 거룩한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우리 모두는 나이와 상관없이 의가 한참 부족한 죄인이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실물 교훈으로 삼아 돋보이게 하신 것은 어느 문화에서나 볼 수 있는 어린이의 특징이었다. 아이들은 자기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다치면 엄마 아빠에게 울면서 달려간다. 배가 고프면 울면서 문제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린다.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걷기 시작하고 어미 젖 먹는 법을 아는 새끼 당나귀나 송아지와 달리 인간의 아기는 아무도 돌보지 않으면 곧 죽고 만다. ‘나는 할 수 있어’라는 승자 의식을 격찬하는 자기 정신 위주의 문화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 자신의 무력함과 종속 상태를 깨닫도록 가르치고 싶으신 게 아니었을까?
계급 조직과 사탕발림은 또 어떤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라는 말에서 참된 위대함은 겸손과 온유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두 가지는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고 있는 소셜미디어 세상에서 한참 부족한 덕목이다.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들어가면서 ‘누가 크냐’고 논쟁을 벌인 이야기가 마가복음에 재차 언급된다(막 9:33~35). 하나님의 왕국에서 위대함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면서 자신을 잊는 것을 의미한다. 주크가 말한 것처럼 “궁극적으로 위대함은 가장 낮은 자에게서 발견되므로 결국은 모두가 위대하며 서열을 다툴 필요가 없다.”2 서열과 지위에 집착한 세상에서 정신이 번쩍 드는 생각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날의 교회에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아버지 하나님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서술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탕자의 비유로 알려져 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 자신의 몫을 요구하여 챙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재물을 다 탕진한다. 삶이 바닥을 치고 굶주림에 허덕이자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 자기가 전부 망쳐 버렸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읍소할 내용도 준비해 놓았지만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는 준비되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목, 불가능을 기대하며 누군가가 자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매일 아들의 귀향을 기다렸다.
자신의 집으로 누더기를 걸치고 천천히 그리고 처량하게 걸어오는 한 사람을 보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아버지는 금세 알아차렸다. 긴가민가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기 옷을 집어 들고 전속력으로 달려나간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용서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연장되고 새로 시작된 은혜다.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실 때 청중이 많았다. 바리새인과 교사들도 거기 있었다.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그들은 좋아하지 않았다(눅 15:1~2). 그들은 비유 속의 첫째 아들처럼 은혜는 제한적이고 조건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조건 없이 은혜를 베푸신다. 한때 잃어버렸지만 현재 되찾은 이 사람은 그분에게 아들이고 딸이다.
은혜가 충분하다
어린아이는 받을 자격이 없는 호의를 받을 수 있다. 아이들의 믿음은 신학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문자 그대로이다. 본능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에게 끌린다. 나의 세 아이가 어릴 적에 녀석들과 함께 ‘예수님은 아이들을 사랑하시죠’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 그들은 항상 주저하지 않고 큰 소리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불렀다. 아이들은 가사의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그분 주위에 있던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과 맺은 상호 관계는 하나님 왕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겸손과 봉사, 수용과 믿음 그리고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에 대한 의존성은 모두 그분 나라의 핵심 가치들이다. 자기 결정과 자기 주장에 가치를 두는 세상에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은 힘든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며 단순히 아이들 놀이가 아니다.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세 딸을 통해 값진 교훈을 숱하게 얻었다.
1 Roy B. Zuck,
2 앞의 책, 209
발문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는 준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