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교리
나는 누구인가?
‘나’와 ‘우리’ 간의 미묘한 균형을 찾아서
제럴드 A. 클링바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십 대들만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롤모델에 의심이 생기거나 지속적으로 변하는 시대정신에 직면할 때, 우리는 인생의 가장 심오하면서도 기본적인 질문들의 답을 알고자 힘쓴다.
성경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자비의 손길로 창조하였다고 말한다(창 1:27~28). 창조되었다고? 그러나 세상에서는 우리가 진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이게 무슨 뜻일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계 곳곳에서 희생자들을 많이 보았다. 회사들이 ‘시장 안정’을 위해 완벽하게 좋은 음식 수백만 톤을 폐기하는 데 반해 왜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창조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묘사하신 것처럼 “심히 좋았”던 행성이 수천 년간 죄로 인해 파멸된 이후인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반영하고 있을까?
의미심장한 ‘우리’
이러한 어려운 질문에 대해 창조에서 그 답변을 몇 가지 얻을 수 있다. 사회 대부분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를 오가는 연속선상의 어딘가에 처해 있다는 걸 사회학자들은 깨달았다. 어떤 문화에서는 공동체를 더 강조한다. 이런 문화에서는 서로를 경청하고 공통점을 찾아내면서 집단이 결정을 내린다. 이들에게 의견 일치는 나쁜 말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개인의 의무와 책임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문화도 있다. 여기서는 모두 자신의 현실 이해에 기초하여 자신이 결정을 내리며 그 결정에 따른 결과를 감수한다. 흥미롭게도 사고방식은 지리적 위치와 관계 있을 때가 많다. 서구적 사고와 동양적 사고, 북반구와 남반구로 갈라지는 식이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공동체를 강조한다. 아담과 하와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됐다. 그들은 함께 “번성하여”(복수형 동사) “땅에 충만하라”는 명을 받는다(창 1:28). 그들은 함께 동물계를 다스리라고 명령받는다. 그들은 함께 풍성한 음식을 공급받았고 매 안식일 창조주와 함께하는 특별한 복을 누린다.
성경에서 ‘우리’는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개인적으로 구원하기에 앞서 이집트에서 한 백성으로 구원하신다. 공동체를 이룬 그들에게 그분은 시내산에서 말씀하신다. 그분의 율법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예를 들어 출애굽기 20장 8~11절 안식일 명령의 어법이 그렇다). 복과 저주가 지파, 가족, 친척에 영향을 미친다.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에 갈렙과 여호수아는 40년간 고통을 당한다. 그들은 ‘우리’의 힘을 인정했고 개인 삶에서 그것을 체감했다. 자기에게 잘못이 없다고 여길 때 ‘우리’는 힘든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를 위한 하나님 계획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신성 안에 존재하는 공동체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나’
우리 모두는 신념의 힘을 알고 있다. 루터는 오직 성경의 권위에만 의지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굳게 붙잡고 도전적인 태도로 보름스 의회 앞에 섰다. 사방에서 압박을 받으면서도 이 독일인 수도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그때 이래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포함한 개신교회는 하나님 앞에서의 각 개인의 책임을 강조해 왔다. 우리는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동에 응답하여 하나님 앞에 서기로 결심한다. 예수께서 사역하시면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나를 따라오라”고 개별적으로 요청하셨다.
사실 개인적 책임과 선택은 신약의 작품이 아니다. 그 뿌리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분은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고 그들에게 자유로운 공동체를 갈망하게 하는 분이시다. 구약의 두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메시아가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이것에 대해 진술하였다. 예레미야 31장 29절에서는 당대의 공통된 정서를 반향하는 친숙한 속담을 인용하는 듯하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사람들은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부모가 신실하지 않아서 우리가 고통 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30절은 이런 주장을 일축해 버린다.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우리는 예레미야의 말을 꼭 올바르게 경청하도록 하자.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자신과 창조주 하나님의 관계를 결정한다고 그는 말한다. 부모의 죄 뒤에 숨지 말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라.
‘우리’와 ‘나’ 사이
분명 성경은 인간 본질과 관련하여 ‘우리’와 ‘나’ 사이의 미묘한 선을 인식하고 있다. 반역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해 삼위 하나님은 조화롭게 일하셨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라는 말은 그 순간의 장엄함을 표현한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이 공동체를 매우 값지게 여기신다는 암시인 것이다. 심지어 창조에서도 말이다. 함께하는 공동체와 마음을 나누는 친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성경의 주요 지점마다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우르를 혼자 떠나지 않았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도 그는 대가족의 일원이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를 모세는 혼자 짓지 않았다. 은혜와 정의는 공유되어야 한다. 구원은 세상 전체에 미치도록 되어 있다.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각 개인, 형제자매, 가족, 온 동네에 영향을 끼친다. 베드로의 설교로 크고 다양한 그룹이 변화되었고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로 구성된 성장일로의 그룹에 합세했다. 그들은 빵을 나누었고 성령을 구했다. 복음을 선포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꿈이 너무 작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하기 위해 애써야 할 때도 있었고 선입견의 한계를 깨뜨리기도 했고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워했다. 하나님은 결국 자기 세상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한계를 뛰어넘는다.
분명 아무도 섬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베드로, 바울, 라합, 다윗(그리고 마르틴 루터)과 함께 우리도 자신의 개인적인 선택이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고 있다.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다(롬 5:12~15). 그러나 바울은 계속하여 말한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절). 이것은 내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껏 전할 만큼 좋은 소식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나’와 ‘우리’ 사이의 긴장을 조율하시는 모습에 매료되어 살고 있다.
인간의 본질
남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개성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부여받았다. 비록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각 사람은 육체, 정신, 혼의 불가분적인 통일체로서 생명과 호흡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우리의 시조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그분께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했으며, 그들의 고귀한 지위에서 타락했다. 그들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그들은 사망에 예속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이런 타락한 본성과 그 결과를 물려받았다. 그들은 연약성과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통회할 때 그들 안에 조물주의 형상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간에 사랑하며 자신의 환경을 돌보도록 소명되었다(창 1:26~28; 2:7, 15; 3; 시 8:4~8; 51:5, 10; 58:3; 렘 17:9; 행 17:24~28; 롬 5:12~17; 고후 5:19~20; 엡 2:3; 살전 5:23; 요일 3:4; 4:7~8, 11, 20).
*기본교리 중 2015년 대총회에서 수정된 부분은 <교회지남> 편집실에서 자체 번역한 것이며 한국어로는 아직 공식적으로 번역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