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쿠츠슈바흐
하나님의 과거는 우리의 현재다
세계 곳곳에서 이야기의 능력을 재발견하다
나는 동유럽에서 무늬만 재림교인으로 자랐다. 하나님과 마지막 때의 재림운동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책 한 권을 읽고 삶이 바뀌었다. <각 시대의 대쟁투>는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그분의 능력을 신뢰했던 사람들의 삶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책이다. 이들은 믿음대로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증언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셨다.
개신교 종교개혁가들, 윌리엄 밀러와 대각성 운동, 하나님께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러한 사람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에 관하여 읽었다. 그들은 실망과 여러 도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갔다. 거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다음으로 읽은 책은 <엘렌 할머니와 나>라는 책이었다. 어린이를 위한 책이지만 감동적이었다. 읽을수록 이 운동의 역사에 대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나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사랑과 신앙을 갈구했다. 그래서 성경 연구를 시작했고 마침내 오스트리아 보겐호펜 신학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 미국의 재림교회 역사 유적지를 방문하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졌다. 그야말로 여기에 꽂혔다.
이야기의 힘
이야기의 힘은 막강하다. 초기 재림교인들에 관한 이야기들 덕에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꺼이 따르기만 한다면 어떤 일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맞닥뜨린 도전들은 우리와 비슷했다. 우리에게 격려가 필요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격려가 필요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시간에 맞춰 완수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로 채워진 이유이다. 우리는 모두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배운다. 실제로 이야기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알려 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 중 하나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나 초기 재림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 주면, 아이들은 친구, 이웃과 그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 역시 모두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하나님은 이야기의 힘을 알고 계신다. 여호수아 4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단에서 가져온 돌 12개로 기념비를 세우라고 명령하셨다. 이 돌무더기들은 이야기의 증거였다. 미래 세대가 이 돌을 본다면 아마 “이 돌들은 무슨 의미입니까?”(7절)라고 물을 것이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그분의 은혜와 능력의 증거를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을 것이다.
재림교회 이야기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재림운동을 이끄시는 이야기를 전하도록 초청받았다. 아이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태어난다. 역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 주는 중요한 부분이기에 아이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고 자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자녀와 함께 하나님의 인도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라고 명하셨다. 어른들 역시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내 경험이 말해 주고 있다.
재림교회 유산 사역의 사명은 시간을 초월하여 다리를 잇는 것이다. 그러면 전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과도 교육적이고 복음적인 방법으로 접촉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마지막 때 운동이 시작된 매우 특별한 역사적 장소들을 보존하여 역사 현장에서 실감나게 그분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이곳을 방문한 재림교인들은 영성 회복을 경험할 것이다. 비재림교인도 매년 수천 명씩 우리 역사 유적지를 방문한다. 지역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왔다가 영원에 관한 역사도 배우는 것이다. 유적지를 방문하여 믿음을 새롭게 하고 예수님과 그분의 마지막 사명을 위해 헌신을 재다짐하는 모습, 비재림신자들이 깊이 감동받고 다시 생각하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런데 재림교회 역사가 북미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1874년 이후로 J. N. 앤드루스가 첫 공식적인 해외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세계 곳곳에 재림교회 역사가 기록되었다. 수천여 교회와 병원, 학교, 출판사 및 기타 활동에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희생과 고통과 상실의 이야기가 있는 한편 기적과 도전을 극복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위한 기념비가 된다. 우리가 이 이야기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영화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과거이자 우리의 현재가 이 이야기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마르쿠스 쿠츠슈바흐 재림교회 유산 사역 부장이다.
아프리카
마이클 소쿠파
남에서 북까지
아프리카 재림교회 주요 거점의 시작은 미약했다.
식민지 세력, 지역 관리 그리고 종종 경쟁적이던 선교사의 세계 속에서 방향을 찾던 초기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도 복음을 전했다. 이 글에서는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 초점을 두고 재림기별이 처음 전파된 남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세 곳을 집중 조명할 것이다. 이곳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세대들이 복음 전도 사명에 충실히 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얻기 바란다.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도시 킴벌리에 위치하고 있는 비콘필드 교회는 남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재림교회이다. 킴벌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3곳의 주요 대도시 사이에 있는 내륙도시이다. 1889년에 지어진 이 교회는 본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교회 건물의 구조 및 외관이 유적지로 구분되어 남아프리카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킴벌리는 더 이상 다이아몬드 채굴 도시가 아니지만, 역사적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때 재림교회의 중심지이자 명소였던 이 도시가 현재는 비교적 작은 지역이 됐다. 킴벌리에는 여러 곳에 재림교회가 있다.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않는 첫 재림교회 건물은 본 교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당시의 가구와 집기들을 전시하여 방문객에게 남아프리카에서의 초기 재림교회에 대해 알리고 있다.
왼쪽 : 1888년 가나 아팜에 재림기별이 전해졌다. 질병과 여러 선교사 가족의 사망 등으로 선교센터를 세우려는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결국 1905년 8월, 데이비드 C. 배브콕의 도착과 함께 서아프리카의 선교 본부가 시에라리온으로 옮겨 왔다. 배브콕은 시에라리온에서 처음으로 콘크리트 벽돌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사람이다. 제작된 벽돌은 서아프리카에서 첫 교회 건물을 세우는 데 사용됐다. 현재 시에라리온 프리타운의 순환도로에 세워진 세 천사 재림교회는 그 당시 역사를 상기시켜 주며 변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오른쪽 : 1903년 탄자니아의 파레 지역에 처음 복음이 들어갔지만 겐디아, 케냐에서 복음 전파가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케냐에서는 오간고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졌다. 해안을 따라 몸바사에서 나이로비를 거쳐 온 선교사들이 마침내 키수무에 도착함으로 해안에서 해안까지 이어진 전도여행이 마쳐졌다. 1906년 이후로 켄두 베이는 키수무에서 재림교회의 중심지로 그 명성을 이어 갔다. 겐디아 힐에는 흙벽돌로 지은 옛 교회가 철거되고 현재는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다. 유산 관리 사무실을 포함한 합회 사무실, 병원, 학교, 출판사 역시 같은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이클 소쿠파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대총회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소 부소장이다.
아시아
마이클 W. 캠벨
아시아를 변화시키신 하나님
아시아에서 재림교회 초기 선교는 계획적인 선교 패턴에 따라 실행됐다. 자급 선교사들이 먼저 도착하면 공식 파송된 선교사들이 뒤따라와 건강·의료·출판 기관을 세우는 식이었다. 기독교는 중국의 고대 종교였다. 초기 재림교회 선교사들은 네스토리안 비(Nestorian Stele, 시안 비림 박물관 소장)가 발견되면서 가슴이 들떴다. 이 발견을 통해 당나라(서기 618~907년) 당시 일찍이 도마로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교 활동의 의도적인 노력이 있었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초기 재림교회 선교사들은 중국에 기반을 마련하면서 빠른 속도로 다른 나라에도 재림기별을 전할 수 있게 됐다.
위 : 아브람 라루의 묘 :
아브람 라루(1822~1903)는 최초의 자급 선교사였다. 교회 지도자들의 만류에도 그는 자비를 들여 선교사 활동을 위해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는 선원들에게 재림기별을 전하며 소책자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그의 묘는 해피밸리에 있는 홍콩 공동묘지 2구역에 있으며 당시 활동했던 군인들 및 해외 주재원들의 묘로 둘러싸여 있다.
가운데 :
재림교회가 중국 선교를 위해 파송한 첫 선교사 가족은 제이컵 넬슨 앤더슨과 그의 아내 엠마 앤더슨 톰슨이었다. 이들에게는 4살 된 아들 스탠리와 아이다 톰슨이 있었다. 그들은 에릭 필퀴스트 등과 협력하여 초기 교인들에게 침례를 주고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현재 휴양지인 샤먼 섬(꼭대기 부근)에는 벤저민과 줄리아 앤더슨이 세운 구랑위 메이 후아 학교와 구내의 메이 후아 생활 건강 센터가 있다(벤저민은 형과 합류하기 위해 1904년에 중국으로 건너왔다.).
중간
재림교회의 선교는 신속하게 해외로 확산됐다. 아브람 라루는 재림교회의 책자들을 배에 실어 마닐라와 다른 도시로 보냈다. 1911년 3월 11일, 필리핀에 첫 재림교회가 세워졌다. 지금도 이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처음 이 교회가 조직됐을 때는 갓 회심한 6명을 포함한 회심자 12명과 초대 선교사 2가정(핀스터 가정과 콜드웰 가정)으로 구성됐었다.
마이클 W. 캠벨 필리핀 AIIAS 역사신학 부교수이다.
호주
존 스크르지파젝
살아 있는 유산
호주 이야기
유적지의 중요성은 손에 잡히는 미적 가치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그 가치는 생생한 유적의 영감적인 이야기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때 살아 있던 존재들의 이야기가 그렇다. 그들의 이야기는 믿음, 비전을 향한 질주, 신념, 헌신, 결단의 본보기이며 그 결과로 시간의 화랑 속에 가시적인 흔적과 기념물이 세워졌다. 그와 같은 유산을 기억하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열정과 비전을 고취하여 과거를 재창조하고 재현할 뿐 아니라 그 시대와 장소에 관련된 생생한 유산의 새로운 본질을 생산하고 증진하기 때문이다.
호주에서의 재림교회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한 살아 있는 유산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1874년 엘렌 화잇이 호주와 도서 지역을 포함하는 세계 선교에 관하여 이상을 받으면서부터다. 그 수는 많지 않지만 호주의 유적지에서는 1885년부터 호주 재림교회의 이야기를 시작한 이들의 영적 깊이, 열정, 생생한 유산에 담긴 진취성, 시들지 않는 기억을 소개하고 있다.
왼쪽 : 1896~1900년, 엘렌 화잇이 거주했던 집 서니사이드는 호주에서 가장 유명한 재림교회 유적지이다. 잘 보존되어 있는 본 유산 애번데일 대학 설립과 주요 저술 활동과 관련 있는 장소다. 매년 호주 전역과 해외에서 2천여 방문객이 서니사이드를 찾고 있다.
오른쪽 : 엘렌 화잇이 1896년 10월 1일에 초석을 놓은 베델 홀은 오늘날 애번데일 대학의 첫 공식 건물이 됐다. 1897년 개교한 이 대학은 엘렌 화잇의 조직적인 운동으로 예정된 날짜인 4월 28일에 학교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엘렌 화잇은 “하루라도 연기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이 한 명밖에 없어도 예정된 날에 학교의 문을 열 것이다.”라고 기록했다(letter 149, 1897.). 현재 베델 홀은 애번데일 대학의 행정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래 : 태즈메이니아에 있는 콜린스베일 교회는 호바트 교회 지도자 2명이 개척하여 1889년에 조직됐다. 이곳은 호주 최초의 재림교회 건물이다. 1895년, 엘렌 화잇은 태즈메이니아를 방문하여 이 역사적인 교회에서 설교했다. 그림 같은 주변 환경에 위치하고 있는 이 교회에서는 지금 안식일에 예배를 드린다.
존 스크르지파젝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에 있는 애번데일 대학 구내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소 소장이다.
유럽
레네 프라우히거, 섄털 J. 클링바일
작은 시작
세상에 영향을 끼친 조그마한 예배당
1886년 12월 24일, 마차 한 대가 스위스 트라멜란의 어느 작은 마을 기차역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튿날이면 기억에 남을 크리스마스였다.
초대된 손님 중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미국인 여성이 있었다. 엘렌 화잇이었다. 화잇은 수년간 스위스 바젤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 신자들의 작은 모임을 격려하기 위해 트라멜란의 작은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 방문은 좀 특별했다. 로스 씨 가정의 뒷마당에 작은 목조 예배당이 완공되어 예배를 앞두고 있었다. 이곳은 북미 밖의 첫 재림교회였다. 엘렌 화잇은 12월 25일 안식일에 헌당식 설교를 전했다.
그녀는 설교에서 이 작은 목조 예배당을 솔로몬의 성전에 비교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수고에 복을 주시어 머지않아 이 예배당이 비좁아지기를 바랍니다.”
이 작은 예배당은 트라멜란의 작은 도시 너머로 영향력을 뻗쳤고 교인 중 다수는 유럽 및 전 세계에서 선교사가 됐다.
위 : 60제곱미터 크기의 예배당은 유럽 재림신앙 선교의 요람이다. 선각자들의 사진에 둘러싸인 당시의 집기들이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아래 : 로스 씨 가족은 3,300스위스프랑을 마련하여 마당에 작은 교회를 지었다. 유럽에 최초로 재림기별을 전한 자급 선교사 미하일 벨리나 체코스키의 활약을 통해 초기 재림교인 다수가 교회에 합류했다.
왼쪽 : 선교 기념관 : 트라멜란 예배당이 교회로 헌당되기는 했지만 재림교회 소유가 된 것은 아니다. 몇 년 후 로스 가족이 트라멜란을 떠나면서 다른 믿음의 가정에게 이 예배당을 넘겼다. 그 지역의 재림교인들은 1968년 더 큰 건물로 교회를 옮겼다. 2014년에 인터-유럽지회는 이 예배당을 매입했고 유적지를 복원하여 후세대에게 복음 전도 사명을 고취할 장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레네 프라우히거 은퇴 사업가이자 유럽 첫 재림교회 목회자의 후손이다. 섄털 J. 클링바일 대총회 엘렌 화잇 유산관리소 부소장이다.
남아메리카
헤나투 스텐셀
소외된 대륙에서 희망의 땅으로
남아메리카 이야기
남아메리카의 재림신앙 유산은 사실상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첫 재림교회인 아르헨티나 크레스포 교회와 두 번째로 조직된 브라질의 가스파르 알투 재림교회이다. 남아메리카 전역에서 많은 사람이 역사적 장소들을 방문하여 재림교회의 개척자 및 출발이 다소 늦은 남아메리카의 재림교회 역사를 배우고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창설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1890년 1월 3일에 해외 선교회를 조직하면서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급 문서 전도사 엘윈 W. 스나이더, 클레어 A. 놀런, 앨버트 B. 스타우퍼가 세 사람이 첫 선교사로 이곳에 발을 내딛었다. 이들은 1891년 12월, 몬테비데오에 도착하여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지에서 문서 전도를 시작했다.
1894년 8월 18일에는 첫 정식 목회자 프랭크 H. 웨스트펄 목사가 도착했다. 웨스트펄 목사는 남아메리카 대륙에 교회 조직 구조의 기틀을 세웠다. 남아메리카는 세계에서 재림교회 기별이 가장 마지막으로 전해진 대륙이다.
아르헨티나 크레스포 재림교회는 1894년 9월에 처음으로 조직됐다. 브라질의 가스파르 알투 교회는 이듬해인 1895년 6월에 조직됐다. 기별이 전해지면서 우루과이, 칠레, 페루, 파라과이,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지에 더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크레스포와 가스파르 알투 유적지와 박물관은 이 지역에 재림기별을 전한 선각자들에 대해 증언하면서 방문객들에게 “이 믿음과 희생의 사업이 조속히 마쳐야 할 것”을 알리고 있다.
*Floyd Greenleaf, (Tatuí Brazil: Casa Publicadora Brasileira, 2011), 26
위 : 2009년 교회 지도자, 교우, 방문객 등이 가스파르 알투 재림교회(왼쪽) 박물관(오른쪽) 개관식에 참석했다. 가스파르 알투 교회는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조직된 교회이다.
중간 : 아르헨티나의 크레스포 재림교회 박물관에서는 관련된 유물들을 살펴보며 남아메리카 초기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용기와 헌신을 배울 수 있다.
아래 : 남아메리카에 세워진 최초의 재림교회 아르헨티나 크레스포 재림교회에서 2012년에 열린 개관 예배에 방문객들이 참석했다.
헤나투 스텐셀 브라질 엘렌 G. 화잇 연구소 소장이다.
북미
멀린 D. 버트
하나님의 놀라운 행적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종종 성경에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다. 성경 대부분은 역사이다. 성경에는 역사에 관해 언급한 책이 많으며 성경의 핵심은 복음이다. 이 복음에는 예수님의 이야기와 그분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성령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시켜 주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행적은 성경뿐 아니라 재림교회 형성 과정에도 잘 나타난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현 위치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씩 전진하며 여행한 과거 역사를 회고해 볼 때 나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회고하면 나는 경탄과 우리의 인도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으로 충만해진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오신 길과 우리의 과거 역사를 통하여 주신 그분의 가르침을 잊어버리는 것 외에 우리는 미래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자서, 196). 재림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재림교회 유산 사역(AHM)을 통해 매우 중요한 재림교회의 역사적 유적지를 확보해 왔다. 이 유산들을 통해 재림교회의 역사와 성경의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다. 이곳들이 성지는 아니지만 기억하고 배워야 할 것이 거기에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곳이든, 미국이나 다른 여러 나라의 중요한 장소든 간에 역사 유적지를 방문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과 그분의 기별을 상기하게 된다. 이런 곳에서는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고 방문객들은 곧 오실 구주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왼쪽 : 재림교회 유산 사역에서 가장 최근에 확보한 것이 바로 조셉 베이츠의 생가이다. 베이츠가 1846년에 펴낸 소책자 <제칠일 안식일, 영원한 표징>을 통해 제임스와 엘렌 화잇, 하이럼 에드슨 및 다른 개척자들이 안식일을 받아들였다. 베이츠의 생가에서는 재림운동이 안식일 기별로 이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이야기, 뱃사람으로 지낸 시절, 절제를 강조하고 노예 폐지를 주장한 이야기, 밀러주의자이자 안식일 준수자인 그가 재림교회에 끼친 영향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왼쪽 : 윌리엄 밀러는 1844년까지 수년간 북미에서 재림운동을 이끌었다. 이 예언적 운동으로부터 안식일 준수 재림교회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생겨났다. 밀러는 개인의 구주이자 친구인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다. 또 그는 성경 연구에도 열정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미래 지도자들이 영향을 받아 곧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복음 전파에 삶을 바치게 하셨다.
오른쪽 : 미시간 주 배틀크리크에 있는 재림교회 역사 유적지에서는 햇병아리 같은 교회를 하나님이 어떻게 전 세계적인 복음 운동으로 변모시키셨는지 확인할 수 있다. 1855년 지도자들이 배틀크리크로 옮겨 왔고 그중 대부분은 48년 동안 그곳에 남아 있었다. 거기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명칭을 채택하고 대총회를 조직하여 출판, 건강,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를 조직함과 동시에 해외 선교를 시작했다. 이 역사적 마을에는 제임스와 엘렌 화잇 내외의 집, 엘렌 화잇이 미국 남북전쟁에 대한 첫 번째 이상을 보았던 미시간 파크빌 교회, 기타 역사적으로 복원된 여러 건물이 있다. 대쟁투, 십일조, 세 천사 기별에 강조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등 교회의 주요 가르침이 이곳에서 확정됐다. 방문객 센터에서는 존 하비 켈로그와 배틀크리크 요양원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아래 : 하이럼 에드슨은 재림기별을 위해 자신의 노고와 재정을 아끼지 않은 충실한 지원자였다. 북부 뉴욕 주에 위치한 그의 농장은 주요 회의와 성경 연구를 위한 장소였다. 에드슨에게 영향 받아 O. R. L 크로지어는 하늘 성소 교리를 발전시켰다. 1846년 후반 에드슨의 농장에서 조셉 베이츠는 예수님의 하늘 성소 사역을 안식일과 결부시켰고 그때부터 안식일은 세 천사의 기별과 연결되었다. 베이츠가 안식일에 관한 자신의 소책자를 읽어 주자 에드슨은 안식일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농장에서 에드슨은 1844년 10월 22일 대실망 이후에도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빛으로 인도하시리라는 평안을 얻었다.
멀린 버트 앤드루스 신학대학교에 있는 재림교회/엘렌 G. 화잇 연구센터 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