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으라!
어떤 일에든 항상 대비하고 있으라
앤서니 켄트
재림을 기다리는 신실한 자기 백성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깨닫기 위해 성경 연구가들은 185년이 넘도록 마태복음 25장 1~13절에 주목해 왔다. 역사에 걸쳐 이 본문은 재림교회 사상과 증언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 핵심적인 성경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풍부하고 실제적인 지침을 제시하고자 한다. 2017년 3월, 미국 메릴랜드 주 스펜서빌 재림교회에 전한 설교 내용을 옮겼다. – 편집실
2011년 4월 29일에 여러분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그날은 영국 왕실에서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그날 세계 곳곳의 TV에서 그것 말고는 다른 내용을 보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신부가 누구였습니까? 케이트 미들턴이었습니다.
신랑은? 윌리엄 왕자였지요.
그런데 이 결혼식의 스타는 누구였습니까? 바로 피파 미들턴이었습니다. 신부의 동생이자 신부 들러리였죠.
예수님은 신부의 들러리 10명이 주인공인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 비유는 충격적입니다. 나쁜 비유라서가 아니라 놀라운 사건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깜짝 놀랄 준비하십시오. 아니, 그냥 준비하십시오! 어떤 번역에서는 “깨어 있으라!”는 뜻으로 옮겨 놓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그리스어 원본에서 열세 구절과 단어 170개로 간결하게 구성된 이 이야기에는 범상치 않은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정한 대화 내용과 낭패스럽고 불안한 분위기 등이 생각날 것입니다. 비유를 읽으면 당혹스럽고 불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 대들은 특히 황당한 일을 겪으면 “아, 어이없어!”라고들 말합니다. 이 비유야말로 가장 어이없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마 25:1).
“그때에.”
그때는 어느 때일까요?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그분의 재림 직전에 교회에서, 다시 말해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그분의 절친한 동료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묘사합니다. 이 비유는 21세기 제자도에 관한 것입니다.
비유의 첫 부분에는 시간에 관련된 심상치 않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천국은…와 같으리라(한글킹제임스).”
앞서 마태복음 13장에 소개된 일련의 비유들은 ‘천국은…과 같다.’로 시작합니다.
곡식과 가라지
겨자씨
밭에 감추인 보화
값진 진주
그물
그런데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비유들은 좀 독특합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이 비유들을 마태는 미래시제로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교회에서 일어날 일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로 이 비유를 대부분 무시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어느 저술가는 “분명 이 비유에 관심이 없는 학자들이 있으며 이 비유가 무시되거나 짧게 다뤄질 때가 많다.”고 논평하기도 했습니다.1
솔직히 우리 중에도 이 비유에 관심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비유는 송곳처럼 예리합니다. 처음부터 경고로 시작될 만큼 날카롭습니다.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2절).
마치 내용이 너무 놀랍고 충격적이어서 독자들에게 놀랄 것에 대비하라고 미리 요약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2 일부 TV나 동영상이 시작되기 전에 ‘시청 전 주의 사항’이라는 경고문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첫 번째로 놀랄 일은 신부에 관한 것입니다. 신부가 정확히 누구죠? 신부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여하튼 신부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비유는 ‘늦은 신랑의 비유’ 혹은 ‘한밤중에 찾아온 신랑의 비유’로 알려져 있지도 않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로 알려져 있지요. 초점이 신부 들러리입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예수님이 대단한 이야기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에 관한 것을 목적으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남들에 관해서였지요. 자신의 결혼식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그분은 남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비유는 하객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랑의 도착을 알리는 정체불명의 ‘밤중 소리’는 있지만,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초점은 신부 들러리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비유에서는 숨을 구석이 없습니다. 한 가지 선택만이 있습니다. 비유를 읽는 독자들은 신부 들러리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서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묘사된 특징들은 젊은 여성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열 사람의 특징은 모든 인류, 모든 국가, 모든 문화에서 나타납니다.
열 명 중에 슬기로운 다섯 명이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들을 ‘사려 깊은’3 혹은 ‘분별 있는’4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명은 어리석고 생각 없고 심지어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이 비유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면 “이 비유는 글자 그대로 이루어져 왔으며 또 이루어 질 것”5이라고 진술한 엘렌 화잇의 글을 생각해 보십시오.
따라서 사실상 이 비유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3절).
이 등은 어떤 등이었을까요?
권위 있는 주석가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기서 등이란 헤롯 시대에 손에 들고 다니며 사용하던, 작은 빛을 내는 작은 등이 아니라 횃불입니다.” “가난한 동네에서 쓰는 횃불은 기름 적신 천을 둘둘 말아 놓은 막대기였을 것입니다.”6 “이 횃불은 기름 묻힌 천을 다시 감싸기 전까지 15분 정도 탄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7
문제는 이 등이 환하게 불을 밝힐 수는 있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등불의 목적은 어둠 속에서 신랑이 길을 찾을 수 있게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빛은 신랑의 성대한 도착을 위한 것입니다. 신랑은 시선을 모으는 중심 대상으로 조명받습니다. 신부를 데리러 오는 그에게 이 순간은 영광의 순간입니다.”8
많은 사람이 화려한 불꽃놀이로 새해를 맞이하듯 들러리들은 최대한 밝은 불빛으로 신랑을 맞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4절).
어떤 학자들은 이 횃불에 딸린 기름통이 존재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통을 두고 왔을 수도 있고 더 가능성이 높게는 기름통은 가져왔지만 채우지 않은 상태였을 수도 있습니다.9
그러면 가져왔어도 전에 사용하고 남은 기름만 들어 있었겠지요. 준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기름통 혹은 기름병은 등이나 횃불을 담가 기름을 흠뻑 적실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헝겊은 스폰지처럼 기름을 빨아들였을 것입니다. 쿠키에 우유를 적시는 것보다 더 빨랐겠지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5절).
신부 들러리에 관하여 한참 이야기가 진행된 다음 드디어 신랑에 관한 설명이 처음 등장합니다. 그 신랑은 누구일까요?
신랑의 정체는 확실합니다. 모든 정황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비유의 맥락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신랑은 명백히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더디 왔습니다. 이것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 이야기와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맞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 처녀인 것입니다.
“기대한 시각에 신랑이 도착했다면 열 처녀 모두가 준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랑의 연착은 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고려했어야 한다. 여기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다. 파루시아(재림)는 지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왕국의 즉각적 출현을 기대한 예수님의 첫 제자들에게도 그리고 서기 70년에 성전이 파괴되어도 예수님이 오시지 않자 실망했던 이들에게도 말이다.”10
예수님의 재림은 지체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다 졸며 잘새.” 준비된 슬기로운 처녀들은 초인도 슈퍼 영웅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몸은 피곤할 때 잠자도록 지어졌습니다. 인류에게 쉴 안식일을 주신 분이 바로 그 신랑임을 잊지 마십시오.
본문의 말씀은 여기서부터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신앙을 포기했거나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잠든 것이 아닙니다. 열 처녀의 잠은 일반적인 생활 리듬이었습니다. 한밤중에 잠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정숙한 사람은 다른 시간에 잠을 잔다는 건가요? 한밤중에 잠을 자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6절).
살짝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어떤 행사이기에 한밤중에 시작할까?’
현대 기술 덕분에 어떤 스포츠 팬들은 밤중에 시작하는 경기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기가 벌어지는 곳이 시청자에게서 한참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그 경기는 매우 합리적인 시간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행사가 한밤중 또는 그 무렵에 끝나는 건 이상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종종 결혼식, 파티는 밤중에 끝나기도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자정까지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각 있는 사람은 그 뒤 곧 잠자리에 듭니다.
한밤중에 시작하는 결혼식에 가 보신 분 있습니까? 한밤중에 교회 직원회가 열린다면 참석하시겠습니까? 자정 예배를 드리는 교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림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건강 개혁을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밤중에’라는 말은 사실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그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한밤중’ 혹은 ‘밤늦도록’에 가깝습니다.11
시간이 어떻든 간에 처녀들은 모두 즉시 행동을 취하도록 요청받습니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시간의 추이가 아닌 것 같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사위는 일찌감치 던져졌다.”12
100여 년 전 끔찍하게 침몰했던 대형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를 생각해 봅시다. 선박의 부품 대부분이 최고급이었지만 리벳은 아니었습니다. 업자들이 구할 수 있는 리벳은 등급이 낮은 것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연결했던 리벳이 제대로 연결되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타이타닉이 침몰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언제 침몰하느냐였습니다.
이제 비유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외치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재림교인들에게 이 구절은 깊고도 강력한 이미지로 꽉 차 있을 것입니다. ‘밤중 소리’라는 개념은 재림교회 역사에서 남은 무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어서 1844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기대했던 이들은 정기 간행물 이름조차 <밤중 소리(Midnight Cry)>라고 지었습니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7~8절).
몇 해 전 슬로베니아에서 전도회를 이끈 적이 있습니다. 도착 이후 시차에 적응하는 데다 하루 종일 고되게 움직였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서 그날 밤에는 푹 잠이 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눕기 직전에 갑자기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휴대폰을 충전해라!’ 휴대폰을 보니 배터리가 절반 정도 남아 있었고 ‘이거면 되겠다.’ 싶어서 이튿날 밤에 충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다음 날, 전도회에서 여러 시간 설교를 하고 난 뒤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호주에서 부친이 별세하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절반쯤 남아 있는 배터리가 얼마나 빨리 닳는지 금세 알게 되었습니다. 전화로 이야기하고 싶을 때, 위로받고 위로해 주고 싶은 그 순간에 제 휴대폰 전력은 바닥이 났습니다. 급히 여행 계획을 세워야 했지만 휴대폰은 완전히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핵심 인물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하게 안 것이 아니라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도와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른바 ‘슬기로운’ 처녀들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따지기 좋아하거나 파괴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소화기, 물, 모래 상자를 갖고 온 게 아닙니다.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바람직한 물건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등이 있었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준비물인 기름을 빠뜨렸습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자동차는 있지만 연료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맡은 일은 하나입니다. 전체적인 계획 속에서 어느 한순간에만 필요한 역할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딱 한 번이지만 정확한 순간에 울려야 하는 트라이앵글이나 드럼과 같은 타악기처럼 말입니다. 연주자는 드럼과 드럼스틱 모두를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드럼스틱은 있는데 드럼이 없는 꼴입니다. 모든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른 연주자들도 그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휘자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청중들도요. 그런데 정적만이 흐릅니다.
몇 주 전, 예배가 마칠 때 교회 오르간 연주자가 제 귀에 익숙한 아름다운 곡을 연주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그가 곧 베이스 음을 연주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역시 예상한 대로 그 음을 연주하더군요. 이러한 순간에 여러분은 귀뿐 아니라 온몸으로 음악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대가 사라졌을 때의 실망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말입니다. 충분히 기대할 만한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의 어줍은 변명에 기가 찰 때가 있지요. 학생들이 흔히 “개가 제 숙제를 물어 갔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어떤 저술가가 말했듯이 “문제는 계획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잠시 정신줄을 놓는 것입니다.”13
이번에는 구약 시대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파수꾼들은…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사 56:10).
유명한 재림교회 복음전도자 마크 핀리 목사님은 이 순간에 대하여 “교회 전체가 영원의 끄트머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언저리에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14고 설명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과거의 경험만 믿고서 자기에게 영적으로 필요한 것이 다 마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데 소홀하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 영혼을 채우는 데 게을렀습니다.”15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계급은 외식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진리를 존중히 여기고, 진리를 옹호해 왔으며, 또 진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떨어져 자신의 옛 성질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16
그들은 적당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와 있고 모두 적절한 물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놓친 게 있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마 25:9).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는 게 조금은 충격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여분의 기름이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기름에 관하여 안 봐도 다 알고 있었겠지요.
사람들은 자기 자동차에 연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대출한 금액이 얼마인지 은행 계좌 잔고가 얼마인지 다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동차 연료 게이지 수치를 아는 것처럼 과연 우리는 자신의 영적 연료 게이지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십 대 아이들과 성경 연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 함께 비유를 읽고 토론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왜 기름을 나누어 주지 않았는지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15세 어느 학생이 단호하게 대답하더군요.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채울 기회가 있었는데 왜 슬기로운 처녀들이 그 사람들 때문에 위태로워져야 하나요?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까?”
좋은 지적입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처녀들이 지닌 등이나 횃불은 구조적으로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자동차 타이어의 공기를 다른 타이어에 나누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지요. 시험을 보는데 펜을 같이 쓰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안 되겠죠.
어느 저술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려 깊은 사람은 부주의한 사람을 나무라거나 판단하지 않는다.”17 그들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목적만이 있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횃불을 밝히는 것이지요.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10절).
이제 한밤중에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구하러 갑니다. 샅샅이 찾아보았겠지요. 문맥상 한밤중에 문을 열고 기름을 파는 가게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호의를 기대하며 아는 사람들의 집을 찾아가 기름을 빌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구걸을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바로 그때 신랑이 도착합니다.
상당히 오래 지체된 것에 비해 연회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시작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연회가 시작됐을 뿐 아니라 문이 닫힌 것입니다.
이쯤에서 어떤 기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문이 닫혀 버린 이야기를 또 한 번 언급하셨습니다. 노아의 이야기입니다(마 24:37~39).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마 25:11).
미련한 처녀들이 결국 기름을 구해 왔는지는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낙타에 물건을 잔뜩 싣고 돌아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횃불의 용도는 이미 지나갔고 신랑은 의기양양하게 도착했습니다.
운동 코치들은 말합니다. “장소는 되돌릴 수 있어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절).
11절에서 미련한 처녀들은 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마도 구걸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신랑은 ‘그들’과 이야기하러 나오지도 않습니다. 다만 닫힌 문 사이로 신랑의 목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신부의 들러리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는 결혼하지 않은 친구이거나 신랑이나 신부의 친척이어야 한다고 어느 저술가는 말합니다. “기름을 구하지 못했다는 비교적 사소한 실수가 상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거짓된 관계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짜 가족이 아니었다.”18
신랑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합니다.
가장 마음이 불편한 순간이자 우리가 가장 주의 깊이 들어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일에 불과한 영적 결심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만 지나치게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겠다는 결심이야말로 어리석은 결정인 것이다(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19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예수님의 비유에서 실제로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할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간직하고 보존하고 키워 나가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희망을 품으면 즐거운 기대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들을 만나도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으면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게 됩니다.
깨어 있으면 예수님에게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기도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묵상합니다. 그분에게 빠져듭니다.
깨어 있으면 성경을 찾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집니다. 깨어 있으면, 예수님이 자연스럽게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삶이 기로에 놓이고 굴곡을 만날 때마다 그분이 우리와 동행하고 돌보시며 인도하고 보호해 주십니다.
깨어 있으면 우리의 시각, 가치관, 비전이 그분의 멋진 시각, 가치관, 비전을 닮아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 시간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1 Klyne R. Snodgrass,
2 Preannounce important content of the parable and the
beginning of the actual story is delayed until verse 3 비유에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음을 예고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3절에서 시작된다(John Nolland,
3 Frederick D. Bruner,
4 R. T. France,
5
6 Craig S. Keener, (Grand Rapids : Eerdmans, 1999), p. 596
7 Ibid., p. 597
8 Nolland, Matthew, p. 1004
9 Ibid., p. 1006.
10 Keener, Matthew, p. 597
11 Nolland, Matthew, p. 1007
12 Ibid., p. 1006
13 Ibid., p. 1005
14 Mark A. Finley,
15 Ibid., p. 53.
16 <실물교훈>, 411
17 Bruner, Matthew, p. 548
18 France, Matthew, p. 950
19 Bruner, Matthew, p. 544
발문
슬기로운 처녀들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목적만이 있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횃불을 밝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