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묵상
부와 명성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우리의 최선과 최악을 드러내는 이야기
제임스 L. 걸리, 노먼 R. 걸리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끝을 향하고 있었다. 이 기적의 일꾼을 보려는 사람들의 무리가 점점 더 커지자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증오도 커졌다. 그들은 유월절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잡기에 완벽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제자들,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시몬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그 시기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세 사람인 시몬, 유다, 마리아에 대해서 알아보자.
시몬
시몬은 치유받은 후에 돌아오지도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도 않은 나병 환자 아홉 중 한 명일 수 있다. 혹은 예수님에게 치유받은 다른 나병 환자일 수도 있다. 그는 잔치에 예수님을 초청함으로써 자신이 치유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자 했을 것이다. 시몬은 바리새인이었다. 당시 바리새인과 관원 중에 예수님의 권위를 폄하하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런 점에서 시몬이 예수님을 초청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시몬은 자신의 나병을 치유하신 예수님에게 지게 된 엄청난 빚을 갚아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찾은 것이다.
누가에 따르면 시몬은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기름 붓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죄인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시몬은 생각했다. ‘예수님이 정말 선지자라면 죄인인 마리아가 그분을 만지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어.’
시몬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에게 구원받고도 자신의 치유자를 은밀하게 의심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예수님은 시몬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비유를 들어 재치 있게 말씀하셨다(눅 7:40~43).
채권자에게 빚진 자 둘이 있다. 하나는 500데나리온, 하나는 50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두 사람 다 탕감해 주었다. 누가 채권자를 더 좋아할까?
시몬은 대답했다. “많이 탕감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대답하셨다(43절).
그리스도께서는 부드럽지만 확고하게 말씀하셨다. “마리아를 보아라. 내가 너의 집에 들어갔을 때 너는 내 발 씻을 물을 제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기 눈물로 내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았다. 너는 내게 환영의 입맞춤을 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가 들어온 이후로 줄곧 내 발에 입맞춤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붓지 않았지만, 그는 내 머리(누가복음)와 내 발(요한복음)에 향유를 부었다. 그러므로 그 여자의 죄는 많지만 용서받았다.”
시몬은 겉으로만 옳게 보이려는 데 집중했다. 그가 예수님을 초청한 이유는 빚진 것을 빨리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는 당시의 관습이었던 기본적인 예법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부자였고 분명 종도 많았을 텐데 자신의 종을 시켜 예수님의 발을 씻기지 않았다. 시몬은 귀빈을 맞이하는 관례적인 입맞춤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홀대했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진 빚을 최소한으로만 갚고 넘어가야 동료들에게도 눈총을 사지 않는다는 계산이 깔렸을 수도 있다.
유다
유다의 반응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제자 중 일부가 낭비된 향수에 대해 분개했다고 간단히 언급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용하는 돈을 유다가 횡령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유다는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라고 묻는다(요 12:5, 쉬운성경). 가난한 이들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도둑이었다(6절). 여기에 사용된 ‘도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클렙테스’이며 여기서 유래한 영어 ‘클렙토매니악(kleptomaniac)’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데도 충동적으로 훔치는 도벽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마리아의 행위는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유다의 이기심과 현저하게 대조되었다. 습관적으로 유다는 그녀의 선물에 대한 자신의 반대에 그럴싸한 가치를 부여하려고 했다”(소망, 559).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고 남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을 알고 있는가? 유다가 그런 사람이었다.
마리아
초기 사역 때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일곱 귀신을 쫓아내셨다(눅 8:2~3). 따라서 마르다가 일하고 있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보다도 자기에게 더 귀중한 말씀 곧 구주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귀중한 말씀으로 심령을 채우고 있었다”(소망, 525).
시몬과 같이 부유한 사람은 식탁 옆의 넓고 낮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을 것이다. 식사용 소파는 뒤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머리 부분에는 베개가 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왼쪽으로 누워서 먹었다. 따라서 그들의 발은 식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소파에 기대면서 예수의 발은 자연히 방 한가운데에서 바깥으로 뻗었고 마리아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관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마리아는 그녀의 깊은 사랑과 슬픔으로써 예수님께 영광 돌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 그분의 머리에 기름을 붓기 위해 향유를 담은 옥합을 샀다. 이 향유의 원산지는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 산맥이었을 것이며 가격이 매우 비쌌다. 300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의 300일치 임금이었다. 참으로 왕에게 걸맞는 선물이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트려 그 내용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그런 다음 무릎을 꿇었고 값비싼 향유와 자신의 눈물이 섞인 채로 예수님의 먼지투성이 발을 닦았다. ‘닦는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동사 ‘에크마세인’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을 때 사용된 용어이다. 주인이 등한시한 일을 마리아가 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냥 물을 사용하여 씻긴 게 아니었다. 씻겨야 하기 때문에 씻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특별한 기름 부음이었다.
마리아가 이목을 피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이 눈에 띄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름의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시몬이 맨 처음 그 향기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마리아는 정신없이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이기적인 유다의 빈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의 행동을 두둔하며 그를 인정하셨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분은 나지막하게 훈계하셨다(요 12:8).
더 나아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12~13).
이 이야기가 모든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그것은 용서와 구속에 관한 이야기이다. 희망 없는 약자가 궁극의 상급을 얻고 돌아오는 이야기의 결정판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를 위해 일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에, 심지어 그분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도 그 발 밑에 남아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 후 말을 건네신 첫 번째 제자들 중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분이 살아 계신다는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할 특권을 얻은 게 아닐까?
시몬과 유다는 독선적이고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을 크나큰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매우 깊이 사랑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행동은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에 대한 진정 어린 감사의 표시였다. 그녀는 예수님을 향한 부인할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사랑에 이끌렸다.
제임스 L. 걸리 워싱턴 D.C. 근교 미국 국립보건원의 연구 의사이다.
노먼 R. 걸리 테네시 주 서던 재림교회대학 종교학부 연구 교수이다.
발문
이 이야기가 모든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