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 유산
왈덴스인들은 안식일 준수자였는가?
P. 제라드 담스틱
재림교회는 왈덴스인들에게 특별히 동질감을 느낀다. 왈덴스인들은 종교 박해 시대에 무자비한 대가를 치르면서도 성경의 진리를 간직하고 전했다. 재림교회가 그들에게 동료애를 느끼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암흑과 배도의 시대에 왈덴스인들이 있었는데…그들은 참된 안식일을 지켰다.”1고 엘렌 화잇이 진술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의 산기슭에 있는 그들의 주요 거점인 토레 펠리체에 들르면 재림교인들은 종종 왈덴스인들이 안식일을 준수했는지 묻는다. 그리고 초기 왈덴스인들이 줄곧 일요일을 지켰으며 안식일에 예배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실망한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왈덴스인은 누구인가?
초기 왈덴스인들은 중세 시대에 특히 스페인,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알프스 산간 지역에 살았던 유럽 개혁 운동에 가담한 이들이다. 그들은 여러 역사가를 통해 종교개혁의 선두 주자로 인정받고 있으며2 성경의 가르침을 유일한 신앙 기준으로 엄격히 고수했다.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예식에 성경보다 전통에 기초한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은 그 교리들과 의식들을 거절했고 신자들에게 신약 시대의 단순한 생활양식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로마 교회는 왈덴스인들의 가르침을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에서 조사했고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3 이어지는 종교회의들에서 그들은 재차 이단으로 단죄받았고 심한 박해를 피해 더 안전한 지역으로 도망했다. 그 결과 그들의 가르침은 유럽의 먼 지역에까지 전파되었다. 왈덴스인들은 다른 개혁 집단처럼 사라지거나 다른 운동에 흡수되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자신들의 존재를 이어 오고 있다.
왈덴스인의 안식일 준수
재림교회는 특히 이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개신교회에서는 그들을 초대 교회와 종교개혁을 이어 주는 연결고리로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재림교인들에게 특별한 관심거리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들이 제칠일 안식일을 지켰느냐는 것이다. 재림교인들은 <각 시대의 대쟁투>에 소개된 엘렌 화잇의 진술에 기초하여 왈덴스인 일부가 안식일을 지켰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대해 왈덴스인들과 심지어 재림교인 중 일부도 엘렌 화잇이 역사가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왈덴스인들이 안식일을 준수했다는 일차 자료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 학문 수준에 맞게 <각 시대의 대쟁투>를 개정 출간해야 한다고 지나친 주장을 하는 재림교회 역사학자도 있다.
안식일 준수 증거를 찾아서
필자는 지난 수년간 왈덴스인 중에서 안식일을 준수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대학원생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의 도서관들에서 오래된 자료들을 수집하며 연구해 왔다. 이런 연구가 어려웠던 이유는 왈덴스인에 관한 관련 문서들이 수 세기의 박해를 지나며 파기되거나 소각되었기 때문이다4.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그들을 일종의 이단 운동으로 묘사한 종교재판관들의 입을 통해 나온 것들뿐이었다.
13세기 전반기 왈덴스인들이 안식일을 준수했다는 중요한 증거 하나가 5권짜리 수집 문서에서 발견됐다. 그것은 도미니카 수도회의 종교재판관이던 북부 이탈리아 크레모나의 모네타 신부가 1241~44년쯤에 카타르파와 왈덴스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거기서 왈덴스인과 카타르파는 가톨릭교회가 안식일 계명을 범한다고 비판했고 모네타는 그에 대해 열정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 책에서 ‘De Sabbato, et De Die Dominico’라는 장을 보면 그는 출애굽기 20장 8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에서 제칠일 안식일의 중요성을 논한 후에 주일의 첫째 날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주의 날의 가치와 대조하고 있다.5
왈덴스인들에 대한 안식일 반대 주장들
모네타 신부는 안식일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창조와 출애굽의 기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유대교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안식에 대한 표징과 비유이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준수했듯이 우리도 주의 날을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4장 10~11절을 언급하면서 “그런 날들을 지키는 것은 죄”라고 진술했다. 또 할례가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 5:2)는 말씀을 지적하면서 안식일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결론으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는 골로새서 2장 16절을 언급했다.6
모네타 신부의 보고서는 13세기 동안 꽤 큰 무리의 카타르파와 왈덴스인들이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에서 일요일이 아닌 문자 그대로의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재림교인들이 오랫동안 잊힌 안식일 진리를 왈덴스인에게 전했을 때 왈덴스인들은 안식일 준수를 반대하는 모네타의 논증을 활용하여 재림교인들에게 대응했다.
적지 않았던 제칠일 안식일 준수자들
안식일을 준수하는 왈덴스인들은 교황의 박해 기간 동안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으로 도피했고 그 지역에 광범위하게 흩어졌다. 15세기에 출판된 문서
이와 같은 1차 사료(史料)의 증거들은 13~15세기에 왈덴스인들 상당수가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했음을 분명히 보여 줄 뿐 아니라 초기 왈덴스인 중에 안식일 준수자가 있었다는 <각 시대의 대쟁투>의 진술이 타당함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북부 이탈리아의 왈덴스인들이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포기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종교개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532년 앙그로냐 골짜기에서 열린 왈덴스인들과 프랑스 종교개혁 대표자들의 한 회합에서 대다수의 왈덴스인은 프랑스 종교개혁에 동참하기로 투표를 통해 결정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프라델토르노에 있는 바르베스대학에서 자신들의 순회설교자 양성을 멈추고 그 대신 목회 후보자들을 장 칼뱅과 그의 동료들에게 교육받도록 스위스 제네바로 보냈다. 칼뱅은 종교재판관들이 왈덴스인들에 대해 반박하는 데 사용했던 성경절들에 대한 자신의 동일한 견해에 기초해 안식일이 갖는 영적 중요성은 여전하나 문자적 제칠일 안식일 준수는 의식과 그림자라고 믿었다.8 칼뱅의 수하에서 교육받은 새로운 목사 세대는 더 이상 제칠일 안식일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고 일요일을 예배일로 가르쳤다.
안식일 준수 왈덴스인에 관한 이와 같은 의미심장한 발견을 실마리로 삼아 12세기 이전의 자료들을 심도 있게 조사한다면 이탈리아와 프랑스 지역에서 초기 개신교도들이 안식일을 준수했다는 증거를 더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엘렌 G. 화잇, <각시대의 대쟁투>, 65
2참고 Earle E. Cairns,
3http://www.newadvent.org/cathen/09017b.htm (accessed Jan. 23, 2017); http://www.catholic.org/encyclopedia/view.php?id=6882 (accessed Jan. 23, 2017)
4 참고 James Hastings,
5Moneta and Tommaso Agostino Ricchini,
6Moneta and Ricchini, 476~477
7Johann Döllinger,
8John Calvin,
P. 제라드 담스틱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이다.
발문
15
왼쪽 : 프라델토르노에 있는 바르베스(왈덴스인 순회설교자) 양성 학교
아래 : 앙그로냐에 있는 동굴 입구. 왈덴스인들이 종교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