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묵상
하늘 너머의 성소
실비아와 베르너 렌츠
부부가 한 팀으로 일하는 베르너와 실비아 렌츠를 인터뷰하면서 종교개혁 시대의 핵심 발견 중 하나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와 구원의 실물 교훈인 성소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았다.
실비아 :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시지요(히 7:25). 왜 이것이 필요할까요? 저는 십자가에서 그분이 이미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생각했어요.
베르너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어요. 그 당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그분은 우리와 화해하셨지요(롬 5:10). 하지만 이것으로 해피엔딩이 완성된 것은 아니에요.
맞아요. 뉴스를 볼 때마다 그걸 느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된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며 외치실 때 하늘에서 즉시 응답이 왔어요.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이죠(마 27:51). 휘장은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 아버지께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어요(히 10:20).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에서 죄는 우리를 삶의 근원으로부터 끊어 버린다는 게 밝히 드러났어요. 아들 하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찢겨 나간 거예요.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둘째 사망을 맛보셨지요. 이것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성취하셨어요(갈 4:4).
그분의 사명은 무엇이었나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 주셨어요. 죄의 형벌인 죽음을 우리 대신 당하시면서 값을 치르셨고 우리를 구원하셨지요. 하지만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으므로 죽음이 그분을 붙들 수는 없었어요.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죽음을 이기셨어요. 우리에게 영원한 의를 가져다주셨어요(단 9:24).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여기시지요. 동시에 대제사장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는 그분처럼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지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의 대표자인 성령님이 하늘 성소에 계신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온라인 접속’을 이루어 주시지요. 그 연결을 통해 그분은 예수님의 완전한 삶이 우리 삶에서 실현되게 하셔요. 우리가 이 선물을 받겠다고 한다면 말이지요. 따라서 그분의 죽음과 삶 모두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하늘 입장권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가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아요. 사랑의 하나님과 사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거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신뢰하지 않아요. 오히려 자기 생각을 따르고요.
가장 아름다운 천사인 루시퍼는 이기심과 창조주에 대한 불신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렸어요. 이것은 ‘죄’라는 치명적인 재앙을 가져왔어요. 이 문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신 것으로만 해결할 수 있어요. 화목을 위한 그분의 제안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요.
그러나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에요. 사랑과 신뢰는 강요될 수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 기도하고 우리를 찾으시는 것인가요?
그렇지요. 그분께서는 우리를 돕고 싶어 하셔요(히 2:18). 하늘 성소는 죄의 형벌이 치료되는 요양원이지요.
사람들은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구원의 통로를 마련해 주셨다는 것을 알았어요(창 3:15).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기 대신 무고한 동물이 죽을 때마다 이 사실을 떠올렸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왜 일반적인 사형 방식인 돌팔매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했을까요?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구약의 한 장면을 상기시켜 주셨어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민 21:4~9).
또 이렇게 예언하셨지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33). 십자가에 달려 하늘과 땅을 연결하신 것이지요. 하늘의 수직선과 역사의 수평선이 교차한 거예요. 이 ‘더하기’ 기호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기초이며 성화 교리의 토대예요.
호주에서 한 땅꾼이 ‘뱀이 언제 가장 위험한가?’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당신이 뱀을 보고 있지 않을 때”라고 그가 대답했지요. 그리스도께서는 ‘장대 위에 달린 뱀’을 폭로하셨고 해치우셨어요. 무시무시한 영적 싸움에서 이 뱀의 머리가 짓이겨졌어요. 사탄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뱀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적 힘을 행사할 수 없어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뱀은 십자가에서 갇히고 공개됐어요. 그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악이 전부 제거되지요. 우리가 살아서 이 사실을 믿는 한, 마귀는 우리를 지배할 능력이 없어요. 뱀이 장대에 걸려 있어요. 그러니 머리를 들고 살아가세요. 예수님 또 우리 안에 있는 악 그리고 거기서 말미암는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세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삶이지요.
정말 멋지네요! 그런데 하나님은 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직후에 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으셨나요?
사람을 최대한 많이 구원하고 싶으시기 때문이지요.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이 구원받은 사람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창 22:17) 천국에 가득하길 원하셔요.
그러나 그분께서 그들 모두를 천국에 데려가시지는 않아요. 그분에게 ‘치유’를 맡기고 그분을 믿는 사람만 그렇게 되지요. 하나님은 각 사람을 아시고 생각과 마음을 다 들여다보시는데 천국에서 책을 펴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모든 지적 존재가 그 파일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내면의 동기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만 명확해져요. 객관적인 척도가 모두에게 적용돼요. 바로 십계명이지요. 하나님은 인간이 다른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셔요.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 그리고 치유를 갈망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는 거예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후 천사들이 있는 공개 석상에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지지요. 이것은 그분이 재림하시기 전에 있어야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괜찮아 보이지만 천국에서 못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그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해요. 1,000년, 즉 천년기가 지나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심판하셨는지를 이해하고 감사하게 되지요. 생각하는 모든 피조물은 마지막 노래를 함께 부를 거예요.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3). 모든 것이 완전히 드러날 때 비로소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요. 자신들이 평화와 믿음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음을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은 마지막 남은 순간에 드러낼 거예요. 그들은 하나님을 뒤엎고 그분의 자녀들을 죽이려고 할 거예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요. 사탄과 그의 무리는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해요. 그들은 최후의 불로 죄의 형벌을 받고 죽지요.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닦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지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거예요. 이것이 최고의 해피엔딩이지요.
실비아와 베르너 렌츠 독일 알스바흐 핸라인의 유럽 미디어센터 근처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 실비아는 호프 성경 연구소에서, 베르너는 편집인/강사로 봉사했다.
발문
하늘 성소는 죄의 형벌이 치료되는 요양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