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결코 끝나지 않을 그 여름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이다. 역사가들에게 이 사건은 중세와 현대를 나누는 획기적인 분수령이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재림 신도들을 포함하여)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이다. 기독교는 교리에 보조를 맞출 수 있었고 인간의 전통이 아니라 성경 말씀의 표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암흑시대’를 끝내는 종교적 대격변의 본질이다. 엘렌 화잇이 진술하였듯 “인간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신교의] 원칙이다.”1
“오라, 사랑하는 심판날이여”2
이 중요한 원칙 때문에 마르틴 루터는 칭의 문제에 관해서뿐 아니라 종말에 관한 초기 기독교 정신을 회복시키는 일에도 개혁자가 되었다.3
중세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었지만, 이 약속을 주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접했다. 구원의 확신이 없기에 그 끝은 “복수와 공포의 날”처럼 보였다고 중세 프랑스 수도사 셀라노의 토마스는 진술했다. 그에게 그날은 “심판자가 와서 엄중하게 심판하는” 때였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을 연구했고 마지막 날을 고대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을 되살려 놓았다. 그가 인식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더 좋은 소망”(히 7:19), “산 소망”(벧전 1:3), 따라서 “복스러운 소망”(딛 2:13)이었다.
그가 신앙 여정을 걸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되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더욱 강렬하게 고대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그에게 “달콤하고 신나는 설교”였다. 그날이 오지 않는다면 그는 태어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생의 투쟁과 슬픔 속에서 그가 하나님께 바란 것이 딱 하나였다는 점에 수긍이 간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악에서 구속하실 날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날이 와야 한다면 지금 당장 그날이 되게 하셔서 우리의 온갖 불행을 끝내 주소서.”4
‘얻은’ 것과 ‘아직 얻지 못한 것’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긴장으로 가득 찬 삶이라고 루터는 설명했다. 믿는 사람의 상태는 ‘얻은’ 상태인 동시에 ‘아직 얻지 못한’ 상태이다. ‘되었’으면서도 아직 ‘안 된’ 상태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아직 그것을 눈으로 보지 못했다. 이미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만, 하나님을 떠나 부서져 버린 세상에 여전히 살고 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성경의 원리를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을 고대했던 루터의 열정과 갈망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토대로 구원이라는 선물을 보증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 구원이 모든 피조물의 구원으로 바뀔 순간을 벅찬 가슴과 기쁨으로 고대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말했다. “사랑하는 주님이여, 복된 날, 주님의 거룩한 미래가 속히 올 수 있게 하소서.”5
시대의 징조 – “달콤하고 신나는 설교”
루터는 나이가 들수록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점점 강렬해졌다. 사람들과 세상을 대하면서 종종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왕자들이나 교황도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그는 확신했다. “이 세상은 마귀의 자식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도울 수도 가르칠 수도 없다.” “설교, 외침, 훈계, 협박 혹은 간청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상은 “마귀의 술집”이다. “뒤집힌 십계명”이 그 증거이다. 따라서 세상은 “도둑들의 소굴”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도움을 얻는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허다한 마귀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교황과 황제는 정치에 희망을 걸었고 사람들은 그들을 ‘구세주’로 여겼다. 그러나 루터는 재림을 분명하게 약속하신 “참된 구세주”를 기다리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기대감 속에 교회를 굳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연 재해와 전쟁을 포함하여 ‘시대의 징조’를 알려 주셨다. 루터에게 가장 명백한 징조로 보였던 그 당시의 큰 위험 요소는 오늘날과도 연관성이 있다. 다름 아닌 기독교 국가들의 영적 쇠퇴 그리고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갈등이다. 천주교회가 복음에서 떠나가는 모습 그리고 이미 유럽 남동부에서 창궐하여 1592년 빈 공방전까지 치달았던 이슬람 세력의 물결을 그는 지켜보았다. 또 개혁의 추종자들이 받은 빛을 배반함으로 받게 될 심판의 징조를 그는 뚜렷이 보았다. “나는 독일에 대하여 예언하고자 한다. 별을 보고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토대로 이 나라에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한다. …기도하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멸시하지 말자!”6
루터에 따르면, 모든 징조는 믿는 자에게 격려가 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된다. 믿지 않는 자가 이 문제로 걱정하지 않도록 ‘은혜’가 아직 남아 있다. 한편 믿는 자는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본다. 그것이 그들을 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기 때문이다.
징조들이 어디까지 성취되었는지 루터는 논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징조들의] 대부분이 이미 일어났다고 확신했다. 이것이야말로 재앙과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였다.
이 기쁨은 성경을 참되게 해석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별을 보는 자와 점쟁이(점성가와 신비철학자를 뜻하는 것으로 보임)”는 재난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너희의 구원’이라는 신나고 달콤한 말을 이해할 수 있다(눅 21:28).”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봐야지 세속적 추론에 근거해서 보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이를 악물고” “쓴 잔”을 마셔야 하며 그러고 나면 “달콤함”이 찾아올 것이라고 루터는 생각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사람들에게 일어나 기뻐하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선포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도 “적은 무리”는 그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생각하며 일하고 기도할 것이다. 루터가 말했듯, “긴 겨울을 보냈고 이제 아름다운 여름, 결코 끝나지 않을 여름이 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7
1<각 시대의 대쟁투> 204
2Martin Luther,
3Paul Althaus,
4Martin Luther,
5Martin Luther,
6Ibid., vol. 3, no. 3711
7Luther,
묵상을 위한 질문
1. 마르틴 루터는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그의 분석을 현대의 구원관과 비교해 보라.
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은 루터의 믿음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3.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루터의 기대와 중세 사람들의 기대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4.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소망은 현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발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긴장으로 가득 찬 삶이라고 루터는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