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복음 배우기
한스 하인즈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의 동지이면서 평화를 사랑했던 필리프 멜란히톤은 어느 날 친구들로부터 루터가 때로는 고집이 세고 불손하고 무례한 면이 있는데 왜 그 사람에게 그렇게 헌신적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대한 학자 중 한 명인 멜란히톤은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복음을 배웠다네.”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으로 ‘복음’은 근대 초기에 그리스도인 신앙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기별이다(롬 1:16).
바울의 정의에서 특별히 중요한 다섯 가지 용어가 있다.
복음
이 말은 ‘반가운 소식’, ‘기쁜 메시지’, ‘승리의 기별’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이다(롬 1:1).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다(롬 15:19). 세상을 위한 하늘의 메시아이신 나사렛 예수의 사명, 희생, 대속적 죽음에 관한 기별이기 때문이다. 또 복음에서는 그분이 죽음을 이기셨고, 지금 세상에서 여전히 몸부림치는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고 계시고 장차 오셔서 자기 사업을 마치실 것이라고 알려 준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현재 “구원받지 못한 세상을 구원하신” 후에 “온 세상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고 우리를 위로한다.
복음은 기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복음은 세상의 죄와 불행을 제거해 주는 유일한 해독제이다.”1
하나님의 능력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창조하는 힘이 있다. 인간의 말에는 창조력이 없다. 인간의 말은 그저 ‘소리와 격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음을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이루어진다. 즉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
구원
구원은 철학적 사변이나 이론이나 책에서 얻는 지혜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인간이 죄악의 참상과 삶의 덧없음에서 구원받는 것은 사람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행위와 사면으로 된다. 그것은 루터가 말한 라틴어 ‘아드미라빌레 코메르치움(admirabile commercium)’2 즉 놀라운 교환 혹은 대체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십자가에서 세상과 자리를 바꾸셨다(고후 5:19). 그분은 죄인이 받아야 하는 심판을 짊어지셨다. “심판자께서 우리의 자리에서 심판을 받으셨다.”3 그분은 친히 우리의 형벌을 도맡으셨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다(21절). 그분은 연약해지셨고 우리에게는 자기의 강함을 주셨다(고후 12:9).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고 우리에게는 자기의 풍성함을 주셨다(고후 8:9). 그분은 불행을 영광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셨고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빌 2:7) ‘아무것도 없는 자’인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게 하셨다(고후 6:10).”4
모두를 위하여
복음의 신비는 특정 국가, 성별, 사회적 지위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 혈통, 바리새인적인 자기 의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빌 3:4~6), 다메섹 경험 이후 이방 나라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이방 지역에도 동료 그리스도인을 많이 얻었다. 그들은 그의 “기쁨이요 면류관”이었다(빌 4:1).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으로(딤전 2:6) 그는 국가, 사회, 성별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났다(갈 3:26~28). 복음은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며 범국가적인 공동체를 만든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출생지, 교육, 경험이 다른 이들이 ‘파밀리아 데이(familia Dei)’,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 한 덩이를 이룬다. “그리스도께서는 민족을 갈라놓는 편견과 분리의 장벽을 헐어 버리시고 모든 인간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신다.”5 무엇보다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수평적으로 연합시키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수직적으로 연합시키신다. 자신의 구속적 죽음으로 인류를 하나님과 다시 연결시키시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바울이 말하는 ‘믿는다는 것(believing)’은 추측하거나 상상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특별한 진술에 동의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성경 즉 당시의 구약을 믿는다는 것은 “꽉 붙잡는 것, 움켜쥐는 것, 충성하는 것”6을 말한다. 신약 성경에서 믿음은 ‘맡겨 버림’, ‘성실함’을 뜻한다. 구원하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약속을 굳게 붙잡고 끝까지 충성할 때 우리는 구원, 즉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삶이 거듭나고 최종적으로 속량을 받는다. ‘악인’ 다시 말해 죄인은 신앙적 성취(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롬 4:5). 죄인의 칭의, 즉 속죄소 앞에서 그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선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일이며 율법을 행하는 것과는 무관하다(갈 2:16).
교회는 수 세기 동안 이 복음을 잘 보존해 왔고, 교회가 복음의 신실한 해석자라고 믿었다. 바울을 이해한다고 자부하면서도 그 기별의 핵심을 잊은 사람이 많다. ‘행함이라는 순결한 의’7가 기독교에 퍼지면서 사도가 가르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가 행함의 종교로 교묘하게 변질됐다. 은혜로 말미암는 죄인의 사면 대신 회당의 율법주의, 그리스의 ‘선(善)’ 사상, 로마의 사법 개념에 영향 받아 ‘고생’8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거기서는 자신이 구원받기에 충분한지 아닌지를 결코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행태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뚜렷한 소리를 내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 말에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사도의 기별이 영광스럽게 재발견되었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바울의 말이 다시 빛을 발했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9는 사실을 기독교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1<치료봉사> 141
2Martin Luther,
3Karl Barth,
4Horst Pöhlmann,
5<시대의 소망> 823
6Rolf Luther,
7Barth, 523
8Tertullian De poenitentia 6
9 Martin Luther,
묵상을 위한 질문
1. 복음으로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복음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2. 어떻게 하면 과학적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에게 복음의 필요성을 일깨워 줄 수 있을까?
3.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메시지에서 어떤 치유를 경험할 수 있는가?
4. 복음의 어떤 부분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는가?
발문
“나는 그에게 복음을 배웠다네.”
– 필리프 멜란히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