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의, 현실적인 문제
칭의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지만, 오직 믿음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1521년 4월 18일, 황제와 귀족들과 신학자들 앞에서 마르틴 루터가 용감하게 증언하고 자신의 입장 철회하기를 거절하자 스페인 황제의 수행원이 “그를 불 속에 던져 버리라!”고 소리쳤다.
루터는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나는 이미 불을 통과했소. 이미 통과했다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모습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이 극적인 사건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생하게 예증한다. 무죄 판결을 받지 못했어도 루터는 법정에서 당당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굳게 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역으로 무죄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미 개인적인 심판을 통과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그러나 인간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의 심판은 무죄를 선고할 뿐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을 새롭게 창조한다. 하나님의 무죄 선고는 본성적인 인간을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창조적인 심판이다. 믿는 사람은 이미 믿는 대로의 상태가 된다. 의롭다 칭함 받은 사람은 의로운 삶을 산다. 루터는 이 둘을 통틀어 “온전한 의미의 칭의”1라고 이해했다.
오늘날 우리는 ‘칭의(죄의 용서)’와 ‘성화(죄의 극복)’라는 말을 사용한다. 엘렌 G. 화잇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하나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승리와 기쁨”의 삶이라고 했다.2 기적적으로 새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3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를 붙잡고 하늘의 통치에 복종한다.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영적 삶을 우리에게 불어넣으신다. 이런 삶은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열매요 증언이다. 그 삶은 하나님께 영광이고 타인에게 유익이 된다. 루터가 주장하듯 믿음이란 “하나님을 통해 변화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신성한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1:13).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의 마음, 용기, 생각과 모든 능력을 성령으로 변화시킨다. 믿음에는 계속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생생하고 꾸준하고 활발하고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 믿음은 선을 행해야 하는지 묻지도 않는다. 묻기도 전에 믿음은 이미 그것을 시작했고 계속한다.”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발걸음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이와 같은 새 삶은 분명 믿음으로 받은 구원의 결과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정받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구원의 사역에서 하나님은 용서만이 아니라 변화를 겨냥하신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상태인 것이지만 의로워지는 것은 일생 동안 계속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의 삶을 지배하신다. 루터의 말처럼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다.5 신자들이 법적으로 의롭게 된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들 안에 경건한 매일의 삶이 시작되게 하신다.
강도에게 공격당한 사람을 구원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일하신다. 사마리아인이 유대인 돕기를 주저하지 않았듯,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살던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롬 5:8).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10절). 사마리아인이 상처 입은 사람의 치료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하고 필요한 것을 지불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고 지불’하시며 그 결과 우리는 그분과 화목할 수 있고, 그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다(고후 5:17, 19, 21 참조).
그러나 마치 피해자에게 치료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죄인들도 그렇다. 그들은 성장해야 한다(벧후 3:18). 심지어 용서를 받았고 새 생명이 이미 시작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죄인들 안에(롬 7:17) 그리고 죄인들 주변에는(요일 5:19) 죄가 있다.
성령의 역사로 죄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지 못한다. 사실 죄는 통제된다(갈 5:16). 그럼에도 신자들은 현재 죄와의 싸움에서 면제되지 않았다(13절).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부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회개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제공되는 것임을 알기에 위안을 얻는다(요일 2:1; 히 7:25).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과 세상에서 죄와 투쟁하는 것 사이의 이와 같은 긴장감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성화 속의 성장은 점진적이다. 그리고 “심판의 아름다운 날”이 밝아 올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이런 삶은 경건한 것이 아니라 경건해져 가는 것이며 건강한 것이 아니라 건강해져 가는 것이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 가는 것이며 쉬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그곳으로 가고 있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이다. 끝이 아니라 나아가는 중이다.”6 “매일 우리가 더욱더 성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7
유사한 생각이 엘렌 G. 화잇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성화는 “일생의 과업”이다. “평생”의 경험이다. 죄와의 투쟁은 “매일의 과업”이며,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결코 끝나지 않을지라도 “믿음”은 “승리”를 안겨 준다.8
행함으로 알려지는 사랑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의로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새로움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 근거한다는 데 우리는 동의한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 믿음 자체는 사랑 안에서 드러나며, 사랑은 행위 속에서 드러난다.
신자들이 칭의와 성화의 선물을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10만 원을 주는 이야기로 종종 설명되곤 한다. 아들은 받은 돈을 그냥 갖고 있지 않는다. 그것을 잔돈으로 바꾸어 유용하게 사용한다. 이것이 성화이다. 루터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아버지께서 이토록 헤아릴 수 없이 값진 것을 주셨는데 당연히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순전히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이 흐뭇해하는 일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듯 나도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이웃을 위해 헌신하겠다. 이 땅에서 나에게 필요하지도 이롭지도, 이웃에게 유익하지도 않은 일은 하지 않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착한 일이 넘치기 때문이다.”9
1Paul Althaus,
2<각 시대의 대쟁투> 477
3Martin Luther,
4다음에서 인용함. Heinrich Bornkamm,
5Luther, 83
6Martin Luther,
7Martin Luther,
8<사도행적> 560~561,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114, <각 시대의 대쟁투> 471
9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는 칭의와 성화를 통해 우리에게 각각 무엇을 선사하시는가?
2. 성화는 ‘죄 없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3.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의미하는 성화는 무엇인가?
4. 성화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지만 구원을 증언한다. 이것에 관하여 토의해 보라.
발문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승리와 기쁨의 삶이다.
– 엘렌 G. 화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