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존 브래드쇼
격하게 헌신하다
뉴욕시에 루즈벨트아일랜드라는 섬이 있다. 맨해튼과 롱아일랜드 사이를 흐르는 이스트리버에 위치한 길이 3킬로미터의 가느다란 섬이다. 맨해튼 북동쪽에서 이 섬으로 연결된 케이블카가 유명하다. 19세기에 이곳은 미국 전체를 들썩인 스캔들에 연루되어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다.
1887년에 이 섬은 블랙웰스아일랜드로 알려졌고, 뉴욕은 거기에 병원, 교도소 및 기타 기관, 블랙웰스아일랜드 정신병원을 세웠다.
블랙웰스아일랜드 정신병원은 당초 최신 시설을 갖추고 혁신적인 치료 방법을 적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더럽고 위험하고 혼잡한 정신병원으로 끝나고 말았다. 환자들은 썩거나 상한 음식을 먹고 야만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인근 교도소 죄수들에게 감시받았다.
블랙웰스아일랜드 정신병원에서 자행된 학대와 잔혹한 행위가 신문에 게재됐다. 1879년 뉴욕타임스는 ‘고문당하는 정신병자’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1887년에 기자 넬리 블라이는 정신질환자로 가장하여 병원에 입원했고 병원의 실상을 폭로했다.
그녀는 포화 상태의 정신병원에 10일 동안 머물면서 목격했던 충격적인 참상을 당시 조지프 퓰리처 소유의 신문 ‘뉴욕월드’에 보도했다. 그리고 같은 해 <정신병원에서 보낸 10일>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블라이는 그 정신병원을 “인간 쥐덫”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들어가기는 쉽지만, 일단 들어가면 나오기가 불가능한 곳”이라고 말했다. 입원한 뒤 그녀는 정신이상자 행세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말할수록 모두가 나를 더 미친 사람 취급했다.”고 술회했다.
넬리 블라이의 블랙웰스아일랜드 정신병원 체험 기사가 언론의 관심을 받자 뉴욕시는 이 시설에 1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또 단순히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로 입원한 이주민 환자들을 퇴원시키고 직원을 대량 해고했다. 잊혀지고 짓밟히고 학대당하는 이들과 함께한 블라이의 행동으로 허다한 사람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진면목을 드러내시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 세상은 한마디로 이러한 정신병원과 같았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당시, 갈릴리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폭군에게 통치받았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를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했다. 예수께서 성장한 마을 나사렛은 평이 좋지 않은 동네였다. 예수님의 미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을 정도였다(요 1:46). 넬리 블라이가 들어갔던 정신병원이라는 어둠의 세상은 잔인하고 고통이 가득한 곳이었다. 예수께서 들어가셨던 세상은 말도 안 될 만큼 더욱 악한 곳이었다. 이 땅에서 “죄는 하나의 학문이 되었고 부도덕은 종교의 일부로 성별되었다”(소망, 37).
넬리 블라이와 같은 사람은 왜 그렇게 무모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을 자처한 것일까? 넬리는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에 그는 발명가이자 여성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녀는 틈틈이 최단 기간 세계 일주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72일 만에 세계 일주를 마치고 뉴저지 호보켄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끝나기 바로 전해에 태어나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근처에서 자란 그녀는 모험과 악평으로 점철된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그녀의 지속적인 공헌이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였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한다.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려면 철저한 헌신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간디, 마틴 루터 킹, 넬슨 만델라를 생각해 보라. 이들 모두 스스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변화를 일군 장본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 즉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면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이야말로 무아적인 경지의 가장 경이로운 증거가 되시는 분이다. 10일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변호사의 요청으로 풀려난 뒤 기사, 저술, 모험으로 부를 이룬 삶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온 우주의 통치자께서 하늘을 떠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사건이다. 도덕적 좌표를 잃어버린 세상, 하나님의 원수가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고 있는 이 땅으로 그분이 오신 것이다. 게다가 아기 예수가 살해되지 않도록 육신의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도망칠 때 그분은 아직 갓난아기였다.
핵심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역사 속에서의 어떤 출생과는 다르다. 예수님에게는 한 가지, 단 한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이 허다한 사람의 삶 속에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7절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님은 사명을 지니신 분이다. 지구라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죄로부터 구원을 경험하는 기회가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넬리 블라이의 임무가 실패로 끝났다면 어떨지 잠시 상상해 보자. 뉴욕시 정신병원에서 고통 받던 사람들, 외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채, 하루 종일 강요된 침묵 속에서 딱딱한 벤치에 앉아 있어야 했던 여성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잠겨 있는 부서진 영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넬리 블라이는 “두 달 만 그렇게 지냈다가는 정신적·육체적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다행히 그녀의 임무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예수님의 임무가 실패로 끝난다면?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 의미하는 바이다.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구원의 관점에서 성육신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역사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다. 신성 모독과 안식일 문제로 고발당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5장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께서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수께서는 다른 시각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사명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그분께 다가가지 않았다.
제사장인 스가랴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벙어리가 되었던 이야기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제사장이 벙어리가 되었다는 소식이 인구에 회자되지 않을 리가 없다. 유대 지도자들은 구주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의 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목동들의 보고를 들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메시아에 대해 물었던 동방 박사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12세였을 때 성전에 가신 것도 알고 있었으며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하는 말도 들었다.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도, 아픈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 주신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에게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땅에 오는 것은 적지에 들어가는 것임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11, 5). 예수께서 메시아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다니엘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태어나실 당시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던 많은 사람이 구원의 운전대를 잡고 졸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속으로
성육신은 경이로우며 기적적인 초자연적 현상이다. 우주의 통치자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러나 2천 년 전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것을 가장 열렬히 기념해야 할 사람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이 역사가 반복될 수 있을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질문은 바로 ‘성육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이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처럼 우리 역시 알고 있다. 그들이 알고 있던 것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 죽은 자를 살리신 것,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 절름발이를 걷고 뛰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신 것 외에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 지난 2천 년 동안 기적적으로 섭리 가운데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고, 기적을 경험하고, 적어도 하나님이 다른 이들에게 역사하신 이야기를 듣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려고 오셨다는 걸 이 모두가 증언한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신성의 능력을 새겨 주시기 위해 혹은 가축의 쉼터에서의 아기 탄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음속으로 상상하게 함으로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 오셨다. 성육신은 그분의 지상 사역에 활기를 띠게 하여 전 인류 가족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할 기회를 주는, 숨이 멎을 만큼 놀라운 사건이다.
사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현재 하늘 성소에서 진행되는 그분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히브리서 2장 17절은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한다. 계속하여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한다(히 2:18).
성육신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성육신은 주고 또 계속해서 주기 위해 이 땅이라는 정신병원에 오셨던 구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돕기 위해”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세상으로 오셨다. 성육신은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죄로 고난 당하는 모두를 도우신다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우리의 싸움을 익히 아시는 그분은 우리 혼자 몸부림치다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잊히게 놔두지 않으신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그분은 경험으로 알고 계시며 누구든지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힘을 주겠다고 맹세하신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어리신 예수’와 ‘고요한 밤’을 부를 것이다. 아니 불러야 한다. 이 노래들은 강한 감동을 자아낸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가까워지게 하는 아름다운 노래들이다. 또 이 노래를 부르며 우리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지 30여 년 후에는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늘로 올라가셨다(히 4:16).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죄인이라면 모두 성육신을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예수께서 목적을 지니고 태어나셨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조물주의 형상을 사람에게 회복시키려고 오셨다.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품성을 다시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는 사람의 의지를 지배해 온 악마들을 쫓아내시려고 오셨다. 그는 우리를 진토에서 건져 내어 손상된 품성을 자신의 거룩한 품성대로 재형성하시고 그 품성을 자신의 영광으로 아름답게 하기 위해 오셨다”(소망, 37).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분께서 오로지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확실한 약속이다.
존 브래드쇼 ‘It is written’ 미디어 사역 담당 강사이며, 가족과 함께 미국 테네시주에 거주하고 있다.
발문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려면 철저한 헌신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 땅에 오는 것은 적지에 들어가는 것임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