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 유산
마이클W. 캠벨
지붕 위의 탈출
클래런스 C. 크라이슬러의 중국 선교 모험담
1915년 엘렌 화잇 서거 후 그녀를 도왔던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클래런스 C. 크라이슬러도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기회는 그가 임시 속기사로 봉직했던 1915년 연례회의 때 찾아왔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위대한 선교 사역에 대한 보고가 끝나자 A. G. 대니얼스 대총회장이 크라이슬러에게 중국 선교사로 가도록 요청한 것이다.
크라이슬러는 그 요청에 대해 그의 아내 미니(1874~1963), 딸 베아트리체와 아마도 여러 차례 의논했을 것이다. 그들은 곧 아시아지부(the Asiatic Division)의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몇 주 후 크라이슬러는 일단의 신참 선교사들,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동아시아 ‘여행’길에 올랐다. 그가 중국행 배에 오른 것은 1916년 11월 2일, 가족들은 이듬해 3월에 그를 따라 중국으로 넘어왔다.1
선교사가 되기까지
때마침 크라이슬러는 아시아지회(the Asiatic Division Conference) 조직에 참여했다. 대회(misson)들을 세계 교회의 일부로 연합회(union)에 편입시키는 중요한 회의였다. 그는 또한 총무로 선출되었고 문서선교도 책임졌다.2 자연스레 그는 출판 사업의 기초를 닦았을 뿐 아니라 의료, 교육 관련 분야에서도 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교회는 자산을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재배치해야만 했다. 그 결과 교회는 아시아 지역에 상당량의 자금을 쏟아 붓고 선교사들을 배치했다. 재림교회 선교의 ‘황금기’인 그때는 새로운 자료 개발에 결정적인 시기가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이 지역에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관한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다.3 그는 서적, 지도, 기타 자료들을 구하여 중국어를 배웠다. 그는 중국인들을 “지구상의 어떤 민족보다 사랑스러운 사람들이”4라고 기록했다. 가장 큰 도전은 그 많은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였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현지인 지도자를 훈련하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였다. 시간이 지나도 가장 효과적으로 자국민에게 전도할 수 있는 일꾼은 현지인이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모험
중국에서 지내는 삶은 평화로움과 거리가 멀었다. 의화단 사건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인이 숱하게 죽임을 당했다. 선교 명령은 그러한 희생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크라이슬러는 생각했다. ‘아슬아슬한 모험’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중국 후난성에서 벌어진 극심한 박해이다. 북쪽 군벌이 공산 파벌과 전투를 벌일 때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크라이슬러는 ‘우리 믿음의 기초’에 충성하는 헌신적인 일꾼들에게 감사했다. 그 지역에 있었던 정치적 긴장 상태로 그는 수년 동안 사역자들을 방문할 수 없었다가 1927년 2월 17~22일 만날 기회를 얻었다.
크라이슬러의 개인적 증언에 따르면, 집회를 하루 앞두고 과거의 동료였던 이들이 신자들을 교회로 유인해 몰살하려고 했다. 신자들은 한 사람씩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 도망쳤다. 선교본부가 관리들에 의해 폐쇄되어 시내 밖의 헛간에서 모임이 열렸고 폭풍우 덕분에 거기까지는 추적당하지 않았다. 그날의 모임은 흙바닥에서 벌어진 성찬식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크라이슬러는 과거의 그 어떤 집회보다도 감동적이었다고 기록했다. 탈출 후 지하로 잠입한 이도 있었고 몇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 교회가 그때까지 겪었던 가장 혹독한 시련 중 하나가 그렇게 시작되었다.5
이런 일이 크라이슬러에게는 일상과도 같았다. 그는 여러 번 화적 떼에 쫓기고 총상을 당했다고 보고했다. 다른 선교사와 교회 사역자들의 사망 사실을 기록하면서 목숨이 얼마나 위태한지를 실감했다.6 “박해당하고 투옥된 사람이 많다.”고 그는 기술했다.7
그가 남긴 유산
크라이슬러가 티베트에 재림기별을 전하러 가는 도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출발할 때부터 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중국 북서쪽의 오지 마을에서 그를 비행기로 이송해 오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시간을 놓쳤고 그는 폐렴으로 사망했다.8 대여한 비행기가 실어 나른 것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한 유족과 선교 지도자들이었다.9
그가 남긴 엄청난 헌신과 희생의 모본은 미래의 선교사들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일단의 학생들이 복음 전도에 일생을 바쳤다. 중국인을 지극히 사랑한 크라이슬러는 그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교사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10
최근에 필자는 중국 북서부에서 크라이슬러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여러 해 동안 숨겨져 있던 그의 묘지를 찾았다. 생명의 시여자께서 이름을 부르시는 날을 기다리며 그의 유해는 언덕 한쪽에 묻혀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의 무덤 둘레에 모여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분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충성할 수 있도록.
1
2 “Asiatic Division Conference: Summary of Proceedings of the First Session, Shanghai, April 5-24, 1917,”
3C. C. Crisler, “Asiatic Division Conference Session Notes—No. 2,”
4C. C. Crisler, “Advance Returns From China,”
5This account is based upon C. C. Crisler, “Our Faithful Chinese Workers in Hunan,”
6다음에서 인용한 C. C. Crisler의 편지 설명을 참조할 것 : H. W. Miller, M.D., “Delivered From Bandits,”
7다음과 비교해 볼 것. “Our Fallen Coworkers,”
8Frederick Lee, “A Challenge to the Remnant Church,”
9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소에 보관된 장례식 사진에는 ‘장 장군(General Chang)’의 비행기를 사용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리뷰 앤드 헤럴드>의 관련 기사에서는 밀러가 ‘친구’에게 비행기를 빌렸다고만 진술하여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10자세한 사항은 다음을 참고할 것. Michael W. Campbell, “Power, Print, and Martyrdom: C. C. Crisler and the Development of Seventh-day Adventist Missions in China, 1916-1936,”
마이클 W. 캠벨(Ph.D.) 필리핀 재림교회 국제대학원(AIIAS)의 역사신학 부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