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믿음
나의 무모한 비행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 25년이 지났어도!
지난 6개월 동안 약 20개국을 여행하면서도 출입국관리소에서 문제를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간 캐나다에서는 달랐다.
재림교회 선교지 소식에 소개할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 캐나다 원주민 학교를 방문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앨버타 에드먼턴 공항에서 내 여권을 검사하던 출입국관리소 직원은 얼굴에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내 출입국 카드에 커다란 붉은 도장을 찍고는 추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공항의 다른 편에서는 두 번째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내 짐을 검색대로 들이밀면서 물었다. “과거에 출입국관리소에서 문제가 생긴 적이 있나요?”
“제 기억으로는 없는데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하면서 내가 대답했다.
내 여권을 가지고 오랫동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검사원은 마침내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1992년 3월 17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제야 그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날은 내가 미국에서 비행기를 훔쳐 타고 캐나다로 날아갔던 날이다.
다시 1992년으로
나는 선교사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나는 15살 때 미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몹시 분을 내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십 대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워싱턴주 왈라왈라대학에 입학하여 곧바로 비행 수업을 수강했다. 나는 줄곧 비행사가 되고 싶었고 얼마 안 되어 혼자서 2인승 세스나 152를 몰 수 있었다. 구름 위에서만큼은 내가 세상의 정상에 선 것처럼 느껴졌다.
비행기를 타지 않을 때는 삶이 더 복잡했다. 나는 무례하고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복 주실 수 없는 친구들을 사귀었다. 내 생각은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1년 뒤에는 성적 불량으로 대학에서 퇴학을 당했다. 하지만 선불 결제한 비행 수업을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비행기를 몰 수 있었다.
1992년 3월 16일, 왈라왈라대학 비행 훈련장에 가서 세스나 152 비행 실습 신청서를 제출했다. 완만한 구릉에 조성된 농장 위로 높이 솟아오르면서 나는 지난 19년 동안 받았다고 여겨지는 부당함에 대하여 혼자서 불평을 쏟아냈다. 그 모든 것과 작별하리라 생각했다. 그러고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4시간이 지나자 비행기의 연료 계기판 바늘이 거의 바닥을 가리켰다. 나는 어디에 착륙해야 할지 몰랐다. 아래로 강과 호수 그리고 숲으로 뒤덮인 언덕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공터를 발견했는데 다행히 작은 활주로가 눈에 들어왔다.
착륙하여 문이 잠긴 격납고 옆에 비행기를 세운 뒤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궁금해졌다. 해는 저물고 차가운 저녁 공기가 활주로를 쓸고 지나갔다. 입고 있는 얇은 재킷은 추위를 간신히 면하기에도 부족했다. 단돈 5달러가 전부였다.
가까운 곳에서 공중전화를 발견하고 0번을 돌려 교환원에게 무료 전화를 걸었다. 영국식 억양을 지닌 여교환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길을 잃었으니 내가 전화하고 있는 곳의 위치를 알 수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교환원은 어떻게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수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으면서 공중전화가 있는 곳은 브리티시컬럼비아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새로운 인생이 캐나다에서 시작될 것을 깨달았다.
비행기에서 잠을 잤고 남은 돈으로 이튿날 아침 인근 맥도널드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그리고 혹독한 추위 속에 13킬로미터를 걸어 로슬랜드까지 갔다. 긴급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경찰관이 나를 차에 태웠고 여권이나 입국 절차 없이 국경을 넘었다는 걸 알고는 곧바로 나를 감방에 집어넣었다.
그날 저녁 나를 데리러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너무 울어서 벌겋게 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 수심이 가득했다.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셨던 것이다.
“학생이 복귀하지 않아 대학 측은 왈라왈라 카운티 보안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동이 트자 각 기관 합동으로 항공 수색이 개시됐다.” 왈라왈라 ‘유니온 불레틴’ 신문은 당시에 그렇게 보도했다.
캐나다 당국에서는 아무런 벌금도 물리지 않고 나를 풀어 주었다. 대학도 나를 고발하지 않았다.
쏜살같이 흘러간 25년
이번 캐나다 방문은 1992년 이후 처음이었다.
지난 25년간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학부 공부를 마치고 편집장 생활 8년을 포함해 17년간 러시아에서 일했다. 2006년, 내 생애 처음으로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고 침례를 받았다. 그 후 부모님 그리고 내가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또 왈라왈라대학에 연락해 배상도 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런데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에드먼턴 공항에서 나를 붙잡아 1992년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저는 바보 같은 젊은이였어요.”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멍청한 짓을 했거든요.”
그 직원은 내게 몇 가지를 더 질문하고 내 짐을 손으로 뒤적거렸다. 검사가 끝나고 내가 가방 지퍼를 닫고 있는데 그가 다른 직원에게 걸어가 귓속말로 뭔가 이야기했다. 나는 기도했다.
그 직원은 돌아와서 잠시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캐나다 입국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내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 직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앞으로 캐나다에 올 때마다 비슷한 인터뷰를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모르겠습니다.” 그는 대답했다. “오늘은 당신의 입국을 허가했다는 기록만 남길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컴퓨터에 기록이 남게 되면, 우리가 당신을 잊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결과 다루기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뒤따른다. 성경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라고 증언한다.
이기심으로 가득했던 나는 1992년에 육체의 씨를 뿌렸고 사반세기가 흘러 그 결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고 내 부모님과 다른 이들도 나를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캐나다는 내 실수의 기록을 영구히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라 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이 낳은 결과들을 거두어야 한다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내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을 때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때까지 과거의 삶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이번 경험으로 깨달았다. 이사야 65장 17절에서 주님은 약속하신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의 용서로 하늘은 실수의 기록을 더 이상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앤드루 맥체스니 대총회 계간지 <미션> 편집장이다. AdventistMission.org에 매일 선교 소식을 소개하고 있다.
발문
구름 위에서만큼은 내가 세상의 정상에 선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