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글렌 타우넌드 남태평양지회장
목회자나 성도가 과거에 섬겼던 교회를 다시 방문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여러 봉사 활동과 전도회를 위해 함께 일했던 교우들이 여전히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고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성도들과 함께 방문하고 사랑을 쏟았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잃은 양이 현재는 완전히 헌신하며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교회로 인도하여 침례까지 받았던 초신자가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며 어린이 안식일학교 교사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기쁨이다.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회에 참석했지만 쉽게 결심하지 않던 구도자가 마침내 예수님을 굳게 믿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같은 믿음을 얻도록 열심히 전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섭리 앞에 놀라게 된다.
이런 이야기들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나의 글이 끝난다면 참 좋겠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열심을 다해 함께 교회를 섬기던 성도가 보이지 않는다. 다른 교인들에게 물어보니 재림의 소망 속에 잠든 분도 있고, 어떤 이들은 이사하면서 교회를 옮기기도 했단다. 마음 아픈 소식들도 듣게 된다. 헌신적으로 활동하며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던 안식일학교 교사가 항간에 떠도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교회를 떠났다는 소식이다.
어느 여성도는 교회에서 건강 운동 클럽을 운영하여 구도자를 많이 얻었는데 클럽에 나오는 구도자들의 복장 문제로 교회 직원회에서 건강 운동 클럽 운영을 막아 버리는 바람에 교회를 등진 일이 있다.
어린 시절에 패스파인더와 안식일학교 활동에 함께했고 이제는 성공적인 변호사, 건축가, 사업가가 된 친구들이 교회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 친구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아무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의사, 기술자, 플로리스트가 된 그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반감을 느끼거나 그냥 세상에 휩쓸려 버렸다.
이런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재림교인의 50퍼센트 이상이 이런 형편이다.
지역 교회의 상황은 매우 유동적이다. 교회는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삶의 의미를 잃고, 배우자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변하는 곳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결점으로 서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과거에 우리와 함께 지내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우리의 자녀, 형제, 부모, 친구라는 사실은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들을 위해 일하는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분은 우리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이 그들을 더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권하시지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도 교회에서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마 24:13). 교회 생활은 정서적인 기복이 심하기 때문이다.
교회 생활을 통해 겪게 되는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는 달라지기로 선택해야 한다. 교회 내에서 겪는 상실의 아픔을 통해 좀 더 현실적인 안목을 키우자. 경청하고, 기도하고, 후원하고, 서로 판단이 아니라 충언을 나누자(마 7:1~2; 롬 13:8; 골 3:13).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가는 과정이고, 우리가 이루기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애드벤티스트 레코드>에 게재되었던 기사이다.